주간동아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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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대를 속인다면 러시아 문학에서 위로받으라

[김재준의 다빈치스쿨] 알렉산드르 푸시킨 “인간은 폭군, 배신자, 또는 죄수이거나 이 모든 것”

  • 김재준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입력2024-03-28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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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르 푸시킨. [위키피디아]

    알렉산드르 푸시킨. [위키피디아]

    기술혁명 시대 우리 모두는 불안하다. 챗GPT 세상이 왔고 나날이 성능이 향상되면서 상상을 초월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로봇과 인공지능(AI)이 결합하면 기존 직업은 대부분 사라지거나 줄어들 것이다. 인생을 바쳐 외국어 공부를 한 통번역가의 한숨소리가 점차 커지는 가운데 금융 및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고연봉자도 결코 안심할 수 없다. 이미 사무직 해고는 시작됐다.

    푸시킨이 주는 위안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낼 때면 러시아 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떠오른다. 러시아가 우리에게 낯선 곳은 아니다. 일제강점기를 산 근대 지식인은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같은 러시아 문인의 작품에 심취했고, 카추샤와 나타샤, 쏘냐는 순이만큼 친근한 이름이었다. 시베리아는 실제로 독립운동가들이 거쳐간 무대이기도 했다. 김진영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의 저서 ‘시베리아의 향수’에는 이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푸시킨의 이 시는 김효근 이화여대 경영학부 교수가 작곡한 가곡으로도 들을 수 있다. 필자는 테너 김승직이 부르는 버전으로 가끔 듣는다. 연이어 김효근 교수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도 듣는데, 푸시킨의 시와 이 곡의 노랫말이 잘 연결되고 동시에 큰 위안도 준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노래를 들어도 마음이 울적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반대로 가장 절망적인 소설을 읽는 것도 괜찮다. 필자에게는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암병동’이 그런 역할을 한다. 암병동을 읽다 보면 다시 푸시킨의 시와 만나게 된다.

    후손들이 우리 모두의 무덤 위에서 이 사람은 누구였느냐고 묻는다면 푸시킨의 시가 대답이 될지 모르겠군.

    “암울한 우리 시대에는… 어디를 가든 인간은 폭군 아니면 배신자 그리고 죄수.”




    책을 읽다가 만난 푸시킨의 시가 궁금해졌고, 시를 조금이라도 잘 이해하고자 한 달간 러시아어를 독학했다. 러시아어는 여느 유럽어와 달리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다. 가령 독일어 명사는 4격인데 러시아어 명사는 6격이다. 다행히 과거 번역 연습을 할 때 사용했던 자료를 찾았고, AI의 도움까지 받은 덕분에 시의 의미를 살려 번역할 수 있었다. 암병동에 나온 시 전문은 다음과 같다.

    유튜브와 책으로 양분된 아이들

    “인간은 폭군, 배신자, 또는 죄수이거나 이 모든 것”이라는 시의 마지막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소설에서는 인용되지 않은 내용이다. 이 부분을 읽다 보니 “사실 나야말로 약자에게는 폭군이자 양심을 저버린 배신자였고, 속한 조직의 죄수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 교양수업에서 1학년 학생들에게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강제로 읽게 한 기억이 떠올라서다. 학기가 끝날 무렵 대다수 학생이 “지옥의 고통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수의 학생이 “이 경험이 내 삶을 변화시켰다”고 말했던 것 역시 기억하고 있다.

    그간 ‘벽돌책 읽기’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오늘날에도 그 가치를 발휘한다고 믿었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도스토옙스키 소설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며 학생들을 사유의 바다로 이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영상에 중독된 지금 시대에도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요즘 초등학생은 책을 아주 많이 읽는 아이와 게임·유튜브가 전부인 아이로 양분된다. 물론 후자가 압도적일 테다.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다 보면 러시아 성악가 드미트리 흐보로스톱스키의 노래를 찾게 된다. 흐보로스톱스키는 자국 민속음악에 헌신했고, 러시아 성악이 가진 풍부함을 잘 표현했다. 55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세계 모든 성악가에게 영감을 줬다. 그는 생전에 ‘백학’을 비롯한 러시아 전통 민요를 즐겨 불렀다. 그가 부르는 ‘우리 얼마나 어렸던가’를 들으면 아주 진한 감정을 덩어리째 마시는 기분이 든다.

    “낯선 나그네여 뒤돌아보시오. 당신의 순수한 눈빛이 내겐 익숙하오. 아마 당신은 더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일까. 우리가 항상 자신을 알아보지는 못하지만… 지나간 청춘 또한 사라지지 아니하오. 우리는 얼마나 젊고 또 젊었던가.”

    김재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경상대학장, 국민대 도서관장과 박물관장,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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