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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돼지 ‘잠잠’, 야생 멧돼지 ‘확산’
농가에서 키우는 집돼지의 돼지열병 확진이 더는 나오지 않고 있지만, 문제는 야생 멧돼지다. 산에서 발견된 멧돼지 사체에서 돼지열병 바이러스가 속속 검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첫 사례는 10월 2일 경기 연천 비무장지대(DMZ)에서 발견됐다. 이후 같은 연천과 경기 파주, 강원 철원의 DMZ 이남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지역을 중심으로 10월 24일까지 총 14마리의 야생 멧돼지가 돼지열병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실이 확인됐다.북한과 접경지역인 민통선 인근에서 돼지열병 감염 사례가 집중 확인되자, 북한이 국내 돼지열병 유입의 진원지가 아니냐는 의심이 힘을 얻고 있다. 이미 북한은 이번 돼지열병 대란을 악화시킨 뇌관으로 지목되고 있다. 최근 세계동물보건기구(OIE)는 북한 당국에 돼지열병 발병 상황을 공개할 것을 촉구했다. 전염병에 대응하려면 국제기구 및 주변 국가와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절실하지만, 북한 측에서는 돼지열병에 관한 어떤 정보도 나오고 있지 않다. 북한은 5월 30일 자강도 우시군 내 양돈시설에서 돼지열병이 발생했다고 OIE에 보고한 이후 5개월간 아무런 후속 보고를 하지 않고 있다.
국내 대북 정보망에도 북한의 심상찮은 돼지열병 확산세가 포착됐다. 9월 24일 국가정보원은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돼지열병이 북한 전역으로 상당히 확산됐다는 징후가 있다”고 밝혔다. 평안북도의 경우 돼지가 전멸에 가까울 만큼 수가 줄어든 상황이라 “고기가 있는 집이 없다는 불평이 나올 정도”라고. 9월 18일 통일부는 북한 측에 돼지열병 발생 상황을 공유하고 남북 방역협력을 추진하자는 내용의 통지문을 보냈다. 통일부 관계자는 “그러나 한 달이 넘도록 북한으로부터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통선 안팎에서 발견된 돼지열병 감염 야생 멧돼지는 DMZ를 뚫고 남하한 ‘북한 멧돼지’일까.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DMZ에 철책이 완벽하게 쳐 있기 때문에 (야생 멧돼지가) 절대 뚫고 내려올 수 없다”고 말했다(9월 24일 국회 발언). 그러나 바른미래당 하태경 의원이 국방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북한이 돼지열병 발생 사실을 OIE에 통보한 5월 이후 확인된 DMZ 내 남한 측 철책 파손만 7건에 달했다. 모두 지난여름 태풍과 집중호우로 철책 하단 판망이 훼손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국내 돼지열병이 북한을 통해 유입된 것이 거의 확실하지만, 농가에 바이러스를 옮긴 직접적인 매개체가 DMZ를 넘어온 야생 멧돼지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남북한 모두 집돼지와 야생 멧돼지의 돼지열병 발생이 확인된 이상, 각각의 감염 경로를 추적하기란 쉽지 않다. 북한에서 국내로 돼지열병 바이러스가 침투한 경로에 대해 전문가마다 다양한 가설을 내놓고 있는 실정이다.
김재홍 서울대 수의과대학 교수는 “최근 정황을 보면 북한으로부터 유입이 거의 확실해 보이지만 북한에서 내려온 야생 멧돼지가 양돈농가 집돼지에 바이러스를 전파했다는 것은 아직 추정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동물 사체를 먹는 까치나 까마귀 같은 조류, 사체와 분변에 꼬이는 파리 같은 곤충에 의한 전파를 예측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에서부터 돼지농가까지’ 경로는 글쎄…
10월 23일 경기 파주 민간인출입통제선 안에서 발견된 아프리카돼지열병 감염 야생 멧돼지 사체. [뉴시스]
돼지열병이 쥐 같은 설치류를 매개로 북한에서 남한으로 유입됐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서상희 교수는 “돼지열병 바이러스는 돼지의 분변·분뇨에서 특히 많이 검출되고 설치류는 생태 특성상 이런 감염원과 쉽게 접촉한다”며 “설치류가 멧돼지처럼 덩치가 큰 동물과 달리 접경지역 철조망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집돼지의 돼지열병 발생이 어느 정도 통제된 것과 별개로 야생 멧돼지에서 계속 바이러스가 검출되는 점이 설치류를 통한 감염 가능성을 방증한다는 것. 그는 또한 “집단사육으로 면역력이 비교적 약한 집돼지와 달리 야생 멧돼지는 돼지열병 바이러스 감염 후에도 길게 생존할 수 있다. 그만큼 바이러스를 확산시킬 여지가 크다”고 덧붙였다.
육지가 아닌 물길이 감염 통로일 가능성도 있다. 서정향 건국대 수의과대학 교수는 “북한에서 버린 돼지 분변이 임진강과 한강을 따라 남하해 경기 파주, 김포, 인천 강화에서 돼지열병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고 추정했다. 수km 이상 헤엄칠 수 있는 멧돼지의 능력도 변수다. 2013년 전남 완도군 청산도에서는 10km가량 떨어진 인근 섬에서 헤엄쳐 들어온 야생 멧돼지 개체수가 150여 마리로 늘어 주민 피해가 발생한 바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북한 멧돼지’가 국내 농가에 돼지열병을 감염시킨 주범임을 밝히는 것보다 야생 멧돼지 사이에서 번지는 돼지열병을 통제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멧돼지는 보통 가족 단위로 무리지어 다니기 때문에 한 마리가 돼지열병으로 폐사했다면 같은 무리의 다른 개체도 감염됐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북한과 접경지역에 서식하는 야생 멧돼지는 2만 마리로 추산된다. 현재 유효한 멧돼지 통제 방법으로는 ‘포획 후 사살’이 꼽힌다. 서정향 교수는 “야생 멧돼지 사체 처리 또한 중요하다”며 “폐사한 멧돼지가 발견된 지점과 인근 10개소 토양을 3~5회가량 지속적으로 채취해 검사함으로써 바이러스가 재확산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 내 돼지열병 확산을 막지 못하면 겨우 진정 국면에 접어든 국내 상황도 다시 악화될 수 있다. 김준영 대한수의사회 부회장은 “그래서 북한과의 방역 공조가 절실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2005년 정부의 대북협력사업 일환으로 사단법인 통일농수산사업단을 통해 북한 내 양돈사업 육성을 추진한 경험이 있는 김 부회장은 2010년 5·24 조치로 남북 교류가 중단될 때까지 북한 강원지역 3곳, 개성 1곳에 양돈장을 건립하고 돼지 사육 기술을 전수했다. 그는 “북한 내부 사정에 밝은 주변 소식통에게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북한 측 피해가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이 개성에 세워준 양돈장의 돼지가 전멸했을 공산이 크다”고 전했다.
김 부회장에 따르면 북한 내 돼지열병은 북한이 OIE 측에 보고한 5월보다 앞선 시기에 발생했을 개연성이 크다. 그는 “올해 2월부터 이미 국내 수의사들 사이에서 북한에 돼지열병 발병 조짐이 있다는 얘기가 오갔다. 그즈음 북한 ‘노동신문’이 이례적으로 돼지열병 위험성을 경고하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중국 동북 3성(랴오닝·지린·헤이룽장성)을 휩쓴 돼지열병이 허술한 국경 방역망을 뚫고 북한으로 유입된 것 같다”고 말했다. 3월 평안북도→6월 평양→7월 개성 순으로 사실상 북한 전역에 돼지열병이 퍼졌다는 것.
북한 통제 못 하면 국내 방역 무의미
북한은 농업성에 수의방역국을 두고 있지만, 돼지열병 예방을 위한 소독약과 바이러스를 검사할 진단 장비가 부족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부회장은 “1kg짜리 정제 소독약 2000병이면 북한 내 1000개 농장의 한 해 필요량을 감당할 수 있다”며 “북한이 돼지열병을 통제하지 못하면 국내 방역도 무의미해진다. 공동방역을 통해 윈윈(win-win)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북한을 통한 전염병 유입 우려는 이번 돼지열병이 처음은 아니다. 돼지열병과 달리 인수공통전염병, 흔히 ‘광견병’으로 불리는 공수병은 북한으로부터 유입이 의심되는 대표적인 질병이다. 국내에서 공수병은 1970년대까지 매년 수백 건씩 발생했으나, 1980년대 이후 크게 줄었다. 그러다 1999년부터 재발하기 시작해 2004년까지 총 6명의 환자가 발생했다. 모두 북한과 접경지역인 경기·강원 북부 주민이었다. 김재홍 교수는 “당시 국내 공수병 재발은 북한에서 넘어온 오소리, 너구리 같은 야생동물이 매개체였을 개연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2015년 영국 보건당국은 북한을 공수병 ‘고위험 국가’로 지정한 바 있다. 한 보건의료 전문가는 “북한에서 유병률이 높은 전염성 질환은 국내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며 “약품과 의료인력 지원 등을 통해 남북 공동방역체계를 갖추는 것이 질병 퇴치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국내 양돈농가들은 돼지열병 공포에 더해 돼지고기 가격 급락으로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kg당 4500~4600원 선이던 국산 돼지고기 도매가격은 돼지열병 최초 발병 직후인 9월 18일 6201원까지 급등했다. 하지만 곧 하락 곡선을 그리기 시작해 22일 생산원가(4200원)보다 낮은 3054원까지 떨어졌다. 한돈자조금관리위원회 관계자는 “돼지열병 발생 직후 유통업체가 물량 확보에 나서 일시적으로 가격이 올랐지만, 돼지고기 소비 위축으로 가격 하락이 지속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직까지는 경기·강원 북부가 ‘돼지열병 마지노선’으로 버티고 있다. 하지만 돼지열병이 국내 최대 양돈지역인 충남까지 확산될 경우 국내 양돈업은 큰 타격을 입고 돼지고기 값은 크게 오를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2013년 80%를 넘던 국내 돼지고기 자급률은 점차 낮아져 2018년 68.6%까지 떨어졌다. 만일 돼지열병 확산으로 국내 돼지 사육량이 줄어든다면 수입 의존도는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돼지열병으로 자국 양돈시장에 타격을 입은 중국이 미국 등으로부터 돼지고기 수입 물량을 늘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9월 유럽 내 돼지고기 가격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 이상 올랐고, 대체재인 소·닭·양고기의 국제가격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다. 중국이 돼지열병 발병 후 확보한 냉동 돼지고기마저 모두 소비한다면 그야말로 세계적인 ‘육류대란’이 우려되는 실정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돼지고기 최대 생산국이자 소비국인 중국 내 돼지열병 확산으로 향후 수입 물량에 의존하기도 어려워질 전망이라 국내 양돈시장을 굳건히 지켜내야 한다”며 “돼지열병 토착화를 막는 데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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