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서초구 대법원. 뉴시스
“학계에선 재판소원을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이번 민주당의 헌법재판소법 개정이 갖는 문제는 재판소원이 허용된 후 헌법재판소의 사건 수 폭증에 대한 대비책이 없다는 것이다. 구체적 로드맵 없이 단순히 대법원 위상을 떨어뜨리려는 게 목적이 아닌지 우려된다.”(차진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문제는 추진 시기와 방법 등 ‘디테일’”
민주당이 대법관 수를 현재 14명에서 100명으로 늘리고 ‘재판소원’을 도입하려는 것에 대해 법학자들이 평가한 말이다. 두 가지 모두 그간 학계가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 보장 측면에서 주장해온 내용이지만 문제는 추진 시기와 방법, 부작용 방지책 마련 같은 ‘디테일’에 있다는 지적이다.최근 국회는 대법관 증원을 위한 법원조직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민주당 김용민 의원안은 대법관을 30명으로, 같은 당 장경태 의원안은 100명으로 증원하는 게 뼈대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민주당 간사인 박범계 의원은 대법관 수를 30명으로 늘리고 비(非) 법조인도 대법관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개정안 발의를 준비 중이다.
현행 법원조직법(제42조)에 따르면 대법관은 변호사 자격 소지자로, 20년 이상 법조 업무에 종사하거나 법대 교수로 일한 사람 가운데서 임용해야 한다. 이 조항에 ‘학식과 덕망이 있고 각계 전문 분야에서 경험이 풍부하며 법률에 관한 소양이 있는 사람’을 추가해 대법원 구성의 다양성을 제고한다는 것이 박범계 의원안의 취지다. 그러나 5월 22일 이 개정안의 주요 내용이 공개된 후 국민의힘 최영해 중앙선대위 대변인이 “(대법관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좌파 인사들로 채우겠다는 속셈”이라고 비판하는 등 논란이 확산됐다. 같은 날 민주당 조승래 중앙선대위 공보단장은 “당 차원에서 결정된 것은 없다”며 당론으로 추진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민주당은 법원조직법 개정과 별개로 대법원 판결에 재판소원을 제기해 헌재에서 판단받을 수 있게 하는 내용의 헌법재판소법 개정도 추진하고 있다. 일각에선 이 같은 움직임이 대법원의 이재명 후보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한 유죄 취지 파기환송 판결에 따른 ‘사법부 길들이기’가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민주당은 대법관 증원과 재판소원 허용을 추진하는 배경으로 ‘국민 권리 보장’을 꼽는다. 법원조직법 개정안에서 장경태 의원 등 발의자들은 “현행법상 대법관 수는 대법원장을 포함해 14명(표 참조)에 불과해 본래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기 어렵다” “개별 사건에 대한 충분한 심리와 판단이 사실상 불가능해 상고심 제도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심각하게 저하되고 있다”고 제안 이유를 밝혔다. 해당 개정안에 따르면 대법관 86명 증원은 법안 공포 1∼3년이 경과할 때마다 28명, 29명, 29명씩 단계적으로 이뤄진다.
전문가들도 그간 대법원 재판 지연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한국은 재판 불복률이 높은 탓에 대법원이 맡는 사건 수가 많은 편이다. 대법원장·대법관 14명 중 법원행정처장을 겸직하는 1명을 제외한 13명이 처리하는 재판은 한 해 4만 건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이 재판 효율화 차원에서 심리불속행 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기각 사유를 소송 당사자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아 국민 불만이 적잖다. 대법원이 지난해 국민의힘 유상범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02년 재판 업무 전산화 이후부터 2024년 8월까지 민사와 가사, 행정 본안 상고심의 심리불속행 기각 판결 비율은 각각 약 54.6%, 83%, 72.6%에 달했다. 차진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법관 증원 자체는 학계와 법조계에서도 계속 주장해온 내용”이라면서도 “문제는 대법관 증원을 추진하는 시기와 방식, 목적”이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번 법원조직법 개정이 진정으로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함이라면 단순히 대법관 증원뿐 아니라 그에 따른 후속 조치와 상세한 로드맵도 함께 나왔어야 한다. 하지만 개정안을 보면 그런 내용이 없다. 민주당의 법원조직법 개정안에 따르면 현재 14명인 대법관 정원을 100명까지 늘린다고 한다. 이 중 1차 증원인 28명만 해도 현 대법관 수의 2배에 달한다. 이 정도 규모의 대법관을 대통령 1명이 전원 임명한다면 자칫 사법부 코드인사에 따른 폐해가 우려된다.”
재판소원 도입에 헌재·대법 ‘찬반’ 교차
재판소원 도입의 경우 대법원과 헌재가 오랫동안 이견을 보인 사안이라 상황이 더 복잡하다. 현재 헌법재판소법 제68조 1항은 “공권력의 행사 또는 불행사로 인해 기본권을 침해당한 자는 법원의 재판을 제외하고는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법원의 재판’은 헌법소원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민주당 정진욱 의원이 대표 발의한 헌법재판소법 개정안 제안 이유를 살펴보면 “법원의 재판이기만 하면 심각한 기본권 침해가 발생하였더라도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받을 수 없는 모순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고 돼 있다. 이에 대해 천대엽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은 5월 14일 국회에 출석해 “현행 헌법상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헌법 규정에 반한다”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반면 헌재는 이튿날 국회에 “국민의 충실한 기본권 보호를 위해 개정안 취지에 공감한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오늘날 헌재와 대법원은 권력 분립을 이룬 상황이다. 두 기관이 선의의 경쟁을 펼치면서 균형을 이루는 게 국민의 인권 보호에 크게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민주당이 추진하는 것처럼 재판소원이 도입되면 대법원은 사실상 헌재 밑으로 들어가게 된다. 권력자 입장에선 헌재만 장악하면 사법부를 권력의 시녀처럼 부릴 수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헌재가 재판소원에 ‘찬성’ 입장을 낸 것은 일종의 조직 이기주의이자 어리석은 처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