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도 말수가 적은 편이었던 국민회의 김홍일의원의 입이 요즘 들어 더욱 무거워졌다. 그는 일주일에 한 두번 지역구인 목포에 내려가는 일 빼고는 묵묵히 곧 내놓을 두 권의 상임위 정책자료집을 만드는데 몰두하고 있다. 의정활동에 애착이 워낙 강한데다 잠도 없는 편(하루 3시간 수면)이어서 ‘매우 실한 자료집’이 나오게 될 것이라고 그의 한 측근은 전했다.
그는 가능한 조용히 처신하며 평상심을 유지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가끔은 복잡한 속내를 밖으로 표출하기도 한다는 주위사람들의 얘기다. 그럴 때 그가 자주하는 말은 이것이다. “제발 대통령의 아들이 아닌 정치인으로 나를 평가해주세요.” 김의원의 이런 하소연의 배경에는 꽤 오래된 속앓이가 자리잡고 있다. 정확히는 ‘새 천년 민주신당’(가칭)의 창당 밑그림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7, 8월경부터 마음고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
DJ(김대중대통령)는 7월 호남지역 공천과 관련, “여론과 민심을 잘 봐가며 신진인사를 많이 투입하겠다”며 ‘호남 물갈이론’을 수면으로 떠올렸다. 8월에는 국민회의 이만섭총재권한대행이 ‘당의 기득권 포기’를 주장했다. 그리고 ‘50% 물갈이론’이 ‘정착’됐다.
공천에 사활이 걸린 현역 의원들의 불만과 역공이 터져나온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대폭적인 물갈이를 할 경우 김의원과 동교동 측근들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 “혁명적인 물갈이를 하려면 대통령에게 명분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아들부터 희생시켜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런 기류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는 ‘물귀신작전’의 성격이 짙다. 김의원을 희생양삼아야 한다는 뜻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물갈이를 피해보자는 간절한 바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표적’이 된 김의원으로선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무조건 자리를 양보하라는 게 말이 됩니까”
김의원이 진땀을 흘리는 것은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선거구제 문제가 그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여야 협상이 소선거구제 유지 쪽으로 가닥을 잡으면서 ‘리틀 DJ’로 불리는 한화갑의원과의 공천경쟁이 불가피해진 것.
목포-신안갑(김홍일) 목포-신안을(한화갑)은 두 선거구를 합해 인구 30만1000명에 불과하다. 여당안이나 야당안, 어느 것을 택하더라도 한곳은 사라져야 하는 상황. 이런 탓인지 한의원이 서울로 지역구를 옮기는 방안이 대안으로 굳어져 가는 듯하다.
이와 함께 그에게 청탁해 공천장을 손에 쥐어보려는 일부 현역의원과 정치지망생들의 로비도 그를 피곤하게 만들고 있다. 호남 물갈이론이 대세로 굳어지면서 일부 ‘위험한’ 의원들이 구명을 부탁하는 일도 많다. 그가 지난 봄 서교동으로 이사한 줄도 모르고 ‘은밀한 로비’를 시도하기 위해 옛 동교동집을 찾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반공개적으로 의원회관으로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김의원을 상대로 한 로비는 전혀 효과가 없으며 그래서인지 그 수도 크게 줄었다는 이만영보좌관의 얘기다. “김의원이 신당에 추천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그 자신도 아예 신당 일에 관여치 않고 있다. 또 대통령 말씀에 따라 국민회의 당무위원도 맡지 않고 있다. 김의원을 만나봐야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 퍼지면서 로비를 해보려는 인사도 과거에 비해 크게 줄었다.”
김의원은 “선의의 공정한 경쟁은 누구라도 피할 수 없지만 동교동계 의원들이라 해서 의정활동이나 지역구 지지도 등을 감안하지도 않은 채 무조건 자리를 양보하라는 얘기는 상식에 맞지 않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의 한 측근은 “김의원이 그동안 상임위 정책자료를 7집까지 내는 등 의정활동 면에서 다른 의원에 뒤지지 않으며 지역구민의 지지도 확고하다”면서 “경쟁력이 있음에도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만둬야 한다면 이는 전근대적인 발상이 아니냐”고 주장했다.
지난 9월 모 지역 신문이 한길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는 비교적 김의원에 우호적인 편이었다. 이 조사에서 김의원의 지역구활동에 대해 60.9%가 ‘잘하고 있다’, 28.2%가 ‘못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김의원이 재출마할 경우 ‘지지하겠다’는 42.6% 반면 ‘지지하지 않겠다’는 29.7%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