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6월 자포리자주 로보티네 수복 작전에 투입된 우크라이나 제47기계화여단 기갑차량들이 러시아의 대전차 방어선에 가로막혀 파괴됐다. 이듬해 8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비리·부실 공사로 방어선이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쿠르스크 전선으로 공세를 펼쳐 큰 전과를 올렸다. 러시아 국방부 제공
패닉 빠진 러시아, 북한에 파병 요청
이때 러시아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 쿠르스크에는 우크라이나 정예 병력을 저지할 정규군이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국경수비대는 연방보안국 산하 준군사조직이라 대전차 무기나 방공 무기 등 중화기가 없다시피 하다. 러시아는 하르키우 등 다른 전선에서 급히 정규군 부대를 차출해 쿠르스크 전선에 투입했다. 같은 해 10월 이후에야 우크라이나군의 진격을 멈춰 세우고 영토 탈환 작전을 시작할 수 있었다.이 사건의 후폭풍은 엄청났다. 러시아 입장에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 침공 후 처음으로 외국군에 본토를 넘겨줬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의 대공세는 결과적으로 북한군 참전이라는 국제 정치적 대사건으로 이어졌다. 러시아는 북한군의 도움을 받아 쿠르스크 영토 회복 작전에 착수하고 5개월 뒤인 지난해 3월에야 우크라이나군을 국경 밖으로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러시아는 쿠르스크 탈환과 동시에 국경 방어선이 왜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졌는지에 대한 대대적 조사에 착수했다. 수사당국이 현직 쿠르스크 주지사 알렉세이 스미르노프를 체포했다. 직전 주지사이자 당시 교통장관이던 로만 스타로보이트는 수사망이 좁혀오자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건에 연루된 스타로보이트의 최측근인 연방도로청 자산관리국 부국장 안드레이 코르네이추크라는 인물은 의문사했다. 현직 장관과 그 측근의 사망이 대규모 비리를 덮기 위한 꼬리 자르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살아남은 자들은 중형을 선고받았다. 스미르노프 전 주지사에겐 검찰 구형보다 많은 징역 14년형이 선고됐다. 이들이 받은 혐의는 190억 루블(약 4000억 원)이 투입된 쿠르스크 국경 방어선 건설 사업과 관련된 대규모 부정부패였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의 국경에 구축한 대전차 방어선. 우크라이나 육군 제공
제대로 건설한 방어선에 우크라이나 공세 좌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에 앞서 국경 요새화를 추진했다. 쿠르스크주 정부도 2019∼2022년 연방정부 예산을 받아 국경 방어 시설 건설에 나섰다. 이에 따라 계획대로라면 도로와 평야에 콘크리트로 만든 삼각형 모양 대전차 장애물인 ‘용치(龍齒)’와 대전차 지뢰, 철조망 등을 대량 설치하고, 그 뒤편으로 강화 콘크리트 벙커와 보병용 참호 등도 구축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쿠르스크주 당국자들은 설치하지 않은 방어 시설을 지었다고 허위 보고하거나 저질 자재를 쓰는 등 수법으로 막대한 예산을 횡령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기갑부대가 국경선을 넘어 쿠르스크 전역으로 달려가는 동안 러시아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점령지에 건설한 이른바 ‘수로비킨 라인’은 쿠르스크 방어선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사례다. 수로비킨 라인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군 사령관이던 세르게이 수로비킨 대장이 2022년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헤르손·자포리자·도네츠크·루한스크 등 점령 지역에 구축한 다중 방어선이다. 그는 러시아의 단기전 전략이 실패하고,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대규모로 공급하자 전황 악화에 대비해 방어선 건설을 지시했다. 수로비킨과 절친한 대규모 용병 조직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도 도네츠크·루한스크와 러시아 본토 벨고로드 국경선 일대에서 이른바 ‘바그너 라인’ 건설에 착수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점령지 곳곳에 대규모 방어선 공사를 진행한 사실은 2022년 10월 위성을 통해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방어선 건설은 “방어가 아닌 공세에 집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세르게이 쇼이구 당시 국방장관 등 군 수뇌부의 반발에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공격 작전에서 엄청난 사상자와 장비 손실을 본 러시아군 장병들 입장에선 공격 명령보다 방어선 구축 지시가 달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방어 시설을 지었다.
개전 직후 수세에 몰린 우크라이나는 2022년 9월 반격을 개시했다. 우크라이나의 공세에 러시아가 방어선을 구축하지 못한 하르키우 전선에선 일주일 남짓한 시간에 러시아군 최정예인 제1근위전차군이 궤멸됐다. 미국 전쟁연구소(ISW) 분석에 따르면 당시 우크라이나는 공세 며칠 만에 2500㎢ 영토를 탈환했다. 당시 객관적인 전력 면에서는 러시아군이 압도적 우위였지만 우크라이나 기갑부대의 빠른 기동이 주효했다. 우크라이나군이 빠르게 후방으로 진출해 보급선을 차단하자 연료·식량·탄약이 부족해진 러시아군은 전의를 상실한 채 도주했다.
그런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대대적 공세를 막아낸 곳도 있었다. 수로비킨 라인이 완공된 자포리자·도네츠크 일대였다. 2023년 6월 러시아는 “자포리자주 로보티네 전선에서 우크라이나군 제47기계화여단의 공세를 저지했다”고 밝혔다. 당시 우크라이나군은 레오파르트 2A6 전차, M2A2 브래들리 보병전투장갑차 등 기갑차량 150여 대로 구성된 공격부대를 편성해 로보티네 방어선 돌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전차 지뢰와 철조망으로 구성된 러시아군 방어선에 막혀 기동력을 상실하고 돈좌했다. 이후 우크라이나는 비슷한 공격을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지난 3년 동안 전선이 교착에 빠진 것도 이 때문이다.

에스토니아가 러시아와의 국경에 건설 중인 방어선. 에스토니아 국방투자센터 제공
드론만으로 기갑부대 막기 어려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황의 변수로 등장한 방어선은 현대전에 큰 시사점을 던진다. 참호·벙커·대전차 지뢰와 각종 장애물로 이뤄진 방어선은 적 지상군 공격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동시에 유사시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억제책이다. 일각에선 1인칭 시점(FPV) 드론이 지상 방어 시설 역할을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드론전 개념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나온 단견이라는 게 필자 견해다.우크라이나는 물론, 최근 레바논 전장에서 촬영된 드론 운용 영상들을 분석하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FPV 드론은 정차했거나 정해진 도로에서 저속으로 달리는 차량만 공격한다는 것이다. 또한 드론에 파괴된 전차나 장갑차는 그에 앞서 지뢰나 급조폭발물(IED), 대전차 장애물에 의해 기동력을 상실한 경우가 많다. 연막탄을 터뜨려 시야를 막은 채 복잡한 회피 기동을 하는 기갑차량을 FPV 드론만으로 무력화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더구나 최근 기갑장비에는 FPV 드론을 막기 위한 드론 재머, 능동방어장치, 방어용 외부 구조물 등이 설치된다. 다시 말해 드론으로 적 기갑장비를 공격할 기회를 포착하려면 전통적 개념의 지상 방어 시설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러시아의 침공에 대비해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가 일명 ‘발트해 방어선’ 건설 사업으로 국경 요새화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 나라는 러시아에서 자국으로 향하는 주요 길목에 대전차 용치와 철조망은 물론, 전차가 건널 수 없는 1.5~2m 깊이의 대전차 참호도 구축하고 있다. 이 대전차 장애물 후방에는 중기관총과 야포, 대전차 미사일로 중무장한 수비 병력이 투입되는 강화 콘크리트 벙커가 들어서고 있다. 이런 벙커를 에스토니아 600개, 라트비아 1000개, 리투아니아는 3000개 이상 설치 중이다. 발트 3국은 2024년부터 매년 각각 6000만 유로(약 1050억 원) 넘는 예산을 투입해 방어선 건설에 매진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의 자폭 드론. 적 기갑장비에 대한 드론 공격의 성패는 대전차 방어 시설 역량에 달려 있다. 뉴시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