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부가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을 개정하고 이에 따라 도로표지판 등을 전면 재정비하기로 했다는 것은 나처럼 외국의 정보산업 분야에서 일하며 날마다 우리말의 ‘모순’에 시달림당하는 사람에겐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다. 한국인들과 함께 한글생활권에서만 사는 사람들에게는 로마자 표기법 개정이 뭐 그리 큰 일이냐 싶을 수 있겠다. 그러나 제대로 정돈된 로마자표기법 통일안은 우리나라 정보산업 발달에 적잖은 공헌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언어 정책이 실종됐다”는 짧은 한 문장에서마저 언어와 정책과 실종이라는 말이 데이터에 검색용어로 입력되는 시대가 되어 있는 사정이다. 말과 글을 통해 나오는 모든 ‘것’은 다 정보가 되는 시대인 것이다. 질이 높은 내용을 담고 있는 데이터베이스는 밀레니엄 시대를 이끄는 최고의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잘 구축된 데이터 베이스 요건의 첫번째가 ‘일관성’이다. 데이터에 담긴 수없이 많은 정보 가운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입력해야 할 검색용어에 일관성이 없다면 정보 찾기는 그야말로 섶에서 바늘찾기 꼴이 될 것이다.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이 일관성을 갖고 제대로 쓰여야 하는 첫번째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동안 원칙 없어 정보검색 한계
나는 곧잘 미국인들에게 한국인들의 이름을 몇가지 로마자로 표기해 놓고 읽어보라는 ‘실험’을 한다. Chung Ju Young, Chung Joo Young, Jeong Ju-Yeoung, Chung Jooyoung 등등은 모두 “정주영”의 영문표기인데, 그 중에 미국인들이 가장 우리말과 근접하게 읽는 것은 세번째 것인 Jeong Ju Yeoung이다. 또 그게 현행 로마자 표기법의 음운에 맞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씨들은 대개 성을 Chung으로 표기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동안 법으로 제정돼 있는 로마자 표기법을 무시하고 소위 ‘common way’라 하여 쓰고 있는 표기들은 서양인들이 발음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였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모순에 빠지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전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흔히 영문으로 바꾸는 Chun은 천씨 성 가진 사람들의 것과 똑같다. 만약 전씨가 Jeon으로 성을 쓰고, 천씨가 Cheon으로 성을 쓴다 면 두 성이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한글을 배우는 서양인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여간 곤욕이 아닐 수 없다. 로마자로 표기된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은 고씨는 코씨로, 조씨는 초씨로, 진씨는 친씨로, 박씨는 파알크씨로, 백씨는 패익씨로 둔갑돼 있는 상태다.
거기에 유학생을 비롯하여 외국을 돌아다니는 한국인들이 저마다 지어쓴 이름이 또 한몫(?)한다. 어떤 이는 로마자 표기법대로 하고 어떤 이는 발음나는 대로 해서 만들어놓은 우리말의 로마자 표기가 여권에 찍히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수난이라는 게 있다. 한번 거기에 기재가 된 이름을 다른 표기로 바꾸는 게 좀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이민할 때에 만든 여권에 자신의 이름이 Kim Seung-Ki로 개재된 탓에 김성기씨는 나중에 미국시민권을 신청하면서 변호사를 대느라 적잖은 돈을 허비해야 했다. Seong-Ki로 고침에 따라 바뀌어야 하는 미국 주민등록증(social security) 때문이었다. 그는 “여권관리국에서 스펠링 하나 잘못 써주는 바람에 돈만 썼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김대중대통령을 비롯한 한국의 유명 인사들의 이름은 또 어떻게 처리되고 있을까. 한국의 뉴스 가치가 높아지면서 외국 언론사들이 취재해 가는 보도물의 양도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인들의 이름은 가장 골치아픈 ‘fact checking’(사실확인) 거리에 든다. 김대중대통령이 Kim Dae Choong, Daijoong, Daejoong, Dae-Joong, Dae-Jung 등으로 변화무쌍하게 기명되고 있는가 하면 이건희, 정주영, 김우중씨 등 세계 경제계에 정보가치가 높은 인물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회사 이름들도 그렇다. 일관성이 없으니 그 회사 정보를 찾고자 하는 외국인들로서는 ‘배운 상식’ 으로 검색용어 입력을 해봤자 데이터에서 회사를 찾는 데에 실패하는 확률이 높다. 현대와 삼성이 Hyundai와 Samsung으로 이름을 하나의 음절로 표기하는 데에 반해 적잖은 회사들이 이름을 음소로 띠어 쓰거나 하이픈(-)을 사용한다. 그러면 정보검색자는 예를 들어 Samsung을 Sam Sung이나 Sam-sung 등으로 찾아보아야 한다. 한국어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쉬운 일일 수 있을지 모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우리 기업의 정보검색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학 이름들도 본보기 예가 된다. 대학마다 ‘마음대로’ 로마자를 붙인 덕분에 한글로 대학 이름을 아는 사람은 인터넷 검색시 별의별 스펠링을 다 사용해 보아야 한다. 그 대학들의 로마자 표기를 정확히 알고 있다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고 현행 로마자 표기법을 대조하며 찾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아예 포기하는 것이 좋다. 차라리 검색 사이트로 들어가서 목록을 보고 클릭하여 들어가는 것이 그래도 빨리 그 대학 웹사이트를 찾는 방법이 될 것이다. 현행 로마자 표기법이라고 나와 있는 것이 실제에서는 통용되지 못하는 형국이니 우리나라 국민 4000만명이 영문 데이터베이스에는 8000만명쯤으로 입력돼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체계에 일관성이 있다면 정보화 시대에 중요한 또 한가지 요건인 ‘신속성’도 따라서 해결될 일인 것을 말이다.
외국인들에게 ‘실험’하면 할수록 우리의 로마자 표기법은 차라리 한글의 원음에 가장 가깝게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본의 히라가나를 보면 똑 그렇다. 우리말보다 워낙 단순한 점도 있긴 하지만 학교에서 정규 과정을 통해 배운다는 히라가나의 로마자 표기법 덕에 일본인 관련 정보를 찾고 쓰기에는 일목 요연한 데가 있다. 이번에 정부가 외래어 표기법에서 K, T, P 등을 G, D, B 등으로 바꾼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백번 잘한 일로 보인다. 과거처럼 우리가 일방적으로 서양인들을 편하게(?) 해준다는 개념보다는 기왕에 우리말에 관한 거라면 그들이 우리말을 더 정확히 발음하고 읽을 수 있도록 해줄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생각해 보면 그 ‘common way’ 라는 것 말고 우리들이 현행 로마자 표기법만이라도 제대로 따랐더라면 국제화시대의 언어 혼란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개정 로마자 표기법과 관련하여 유념해 볼 일이 하나 더 있다. 신문 기사는 물론이고 대학 논문, 보고서 등등의 문건 작성시에 이용되는 외국어, 외래어 등의 원어를 같이 표기해 주는 문제다. 정보의 다량을 서양인들과 그들 기관에 의존하면서 수도 없이 인용하는 서양 인물, 회사, 외래어들을 한글로만 표기해 놓으면 나중에 그 글을 토대로 더 많은 조사를 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정보제공처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 예를 들어 “엘빈 토플러가 ‘권력이동’이라는 책을 통해 …라고 말했다”는 문장을 쓰려면 Alvin Toffler라는 영문이름과 Power Shift라는 책의 원 제목을 괄호 속에 넣어 표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영어를 글 속에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이 특히 주의해야 할 일이고, 그런 책을 게재하는 출판인들과 언론 매체들이 반드시 해주어야 할 일이라고 본다. 기사 속에서 발견하는 외국 인물이나 사업체, 연구기관들에 관해 더 진행된 연구를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효과적인 참고자료가 될 수 있으며 한편으로 정보 제공자들에게는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효과적인 자원이 된다. 공자를 공자로만 알고 있다가 국제 사회에 나가 Gong Ja, 또는 조금 더 발음을 굴려 Kong Cha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