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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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올스톱…일손 놓은 ‘금융 空기업’

수개월째 대책 없이 수장 부재중…업무 마비에 내부 인사도 파행

  • 이상훈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January@donga.com

    입력2013-08-23 17: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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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 올스톱…일손 놓은 ‘금융 空기업’

    신제윤 금융위원장 후보자가 3월 18일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지금부터 한국거래소는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합니다.”

    폭염이 절정이던 8월 12일 한국거래소(거래소) 임원들은 기자간담회에서 “증시 침체가 예상보다 너무 심각하다”며 ‘비상경영’을 선언했다. 상장 주식을 매매할 때 나오는 수수료로 먹고사는 거래소로선 증시 침체만한 직격탄이 없다. 호황기 때 10조 원에 이르던 하루 평균 거래대금이 7월 이후 3조~4조 원대까지 떨어졌다. 지난해 1222억 원이던 당기순이익이 올해는 수십억 원에 그칠 것이라는 게 거래소 측 설명이다. 민간기업이라면 생존을 걱정해야 할 수준이다.

    하지만 거래소는 해외 출장을 자제하고 전산투자를 내년으로 미루는 정도의 ‘미봉책’만 내놨다. ‘증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상투적 각오조차 드러내지 못했다. 거래소 고위 관계자는 “책임지고 조직을 이끌 수장이 부재중인데 무슨 대책을 내놓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거래소는 5월 김봉수 전 이사장이 사퇴한 뒤 3개월이 다 되도록 새 이사장을 맞지 못하고 있다.

    모피아 독식 논란과 낙하산 시비

    ‘인사 난맥’에 따른 파행적 운영은 비단 거래소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주요 공기업과 정부 소유 금융지주 자회사 상당수가 벌써 수개월째 이 같은 ‘인사 혼란’에 빠져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금만 기다리면 인사가 마무리될 것”이라는 말이 오갔지만 이제는 그런 희망조차 쑥 들어갔다. 인사가 계속 미뤄지면서 일부 공기업에서는 일상 업무조차 삐걱거리는 부작용이 벌어진다.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



    박근혜 정부 출범 초기만 해도 금융권 인사는 탄력을 받는 듯했다.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3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임기가 남았어도) 교체 필요성이 있다면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신 위원장이 내비친 기준은 새 정부의 국정철학 이해와 전문성. 자연스럽게 전 정부 시절 임명된 공기업 수장들과 일부 금융사의 ‘낙하산’ 인사 교체 여부에 관심이 쏠렸다.

    신 위원장의 말은 곧바로 현실이 되는 듯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금융계 4대 천왕’으로 꼽히던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과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이 며칠 간격으로 사의를 밝혔다. 금융계 안팎에서는 “큰 산을 넘었으니 본격적인 공기업 물갈이 작업이 시작될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이명박 정부 때처럼 일괄 사표를 받을지, 개별적으로 재신임 여부를 판단할지 정도가 마지막 남은 변수라는 시각이 많았다. 7월 임기가 끝나는 안택수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은 물론, 임기를 2년여 남긴 김주현 예금보험공사 사장까지 교체 대상이라는 전망이 일부 언론에 보도됐다.

    그러나 금융지주 새 회장을 선임하는 과정에서 인사가 꼬이기 시작했다. 이순우 우리금융지주 회장이 내정되는 과정에서 청와대와 새누리당 실세 의원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KB금융지주 회장 선임을 앞두고 신 위원장은 “관료도 능력과 전문성이 있으면 금융그룹 회장을 할 수 있다”며 임영록 당시 KB금융지주 사장(현 회장)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해 논란을 빚었다.

    여기에 임종룡 NH농협금융지주 회장, 이건호 KB국민은행장 등 유력 후보로 거론되지 않던 관료·연구원 출신이 잇달아 깜짝 내정되면서 ‘모피아 독식론’이 불거졌다. 관치(官治) 논란과 낙하산 시비가 끊이지 않자 청와대는 돌연 공공기관장 인사를 중단했다. 거래소는 이사장이 사의를 표명한 뒤 시작한 후보자 공모 접수를 마감했고, 신용보증기금은 안택수 이사장의 임기가 만료됐지만 그런 ‘사정’이 청와대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논리적 설명도, 명분도 없이 멈춰버린 기관장 선임 작업은 벌써 2개월째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금융 공기업 인사 중단에 따른 문제는 크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수장이 공석인 기관은 부기관장 등 대행(代行)이, 대표 임기가 만료된 기관은 새 수장을 선임할 때까지 현 직책을 유지토록 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미 문제가 하나둘 불거지기 시작했다. 어느 조직이든 인사를 앞둔 시점에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뒤숭숭한 법. 한 금융 공기업의 부장급 관계자는 “어수선한 상황이 언제 끝나리라는 기약도 없이 몇 달째 지속되니 일상 업무 외에 새로운 사업 추진은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전했다. 내부에 공석이 생겨도 제때 채우지 못하다 보니 해당 소단위 조직은 사실상 업무에서 손을 놓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신용보증기금은 인사로 혼란을 겪는 대표적 공공기관이다. 7월 임기가 만료된 안택수 전 이사장이 일단 자리를 지키지만 공백 여파는 곳곳에서 나타난다.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회사채 시장 정상화 방안’의 주 업무를 맡았고 하반기에만 8조 원 규모의 신용보험을 인수해야 하지만, 세부 업무지침 하달이 늦어져 한동안 혼란을 겪었다. 거래소는 전산시스템 고장으로 지난달 야간 선물옵션 거래가 3시간 이상 중단되는 사고가 터졌다. 증권업계에서는 ‘무사고’를 자랑해온 거래소가 이사장 공백 한 달 만에 임직원의 기강이 해이해져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해당 공기업 가치 하락 불 보듯

    인사 올스톱…일손 놓은 ‘금융 空기업’

    6월 14일 서울 중구 회현동 우리은행 본점에서 열린 취임식에 참석한 이순우 우리금융지주 회장(가운데).

    우리금융지주는 회장 선임 이후 계열사 대표들을 내정해놓고도 ‘윗선 결재’가 나지 않아 2개월 넘게 인사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 내정자들은 비공식적으로 업무 보고를 받지만 책임을 져야 할 업무 결정은 손도 못 대고 있다.

    우리금융 계열사인 우리아비바생명의 경우 건전성 지표인 지급여력(RBC) 비율이 187.1%로 금융감독원 기준(200%)에 못 미치지만, 이를 메우기 위한 후순위채 발행 등을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올해 초 우리은행에서 분사해 연착륙이 시급한 우리카드는 정현진 초대사장이 3개월 만에 물러난 뒤 두 달 넘게 사장직이 공석이다. 이들 회사 노동조합(노조)은 최근 금융위원회가 입주한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1인 시위를 하며 각각 ‘낙하산 반대’ ‘사장 선임 촉구’를 주장하고 있다.

    공기업의 인사 공백 장기화는 필연적으로 기업 가치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특히 당장 하반기(7~12월)부터 매각이 이뤄질 우리금융 계열사들은 가치 하락에 따른 직격탄을 맞을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우리금융 계열사의 한 임원은 “최고경영자(CEO)의 공백이 당장 매각 가격을 크게 떨어뜨리지는 않겠지만, 가뜩이나 경기침체로 수익성 악화에 시달리는 상황에서는 1~2개월 영업이익을 끌어올리지 못하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공기업의 인사 공백은 새 정부 출범 초기마다 되풀이되고 있다. 5년 전 신문을 들춰보면 ‘기관장 공모 파행’ ‘늦어지는 인사로 뒤숭숭’ 등 지금 그대로 갖다 써도 별문제가 없어 보이는 기사들이 지면을 채우고 있다. 당시 사장 추천 인사가 내부 출신들로만 채워졌다고 재공모를 결정한 한국전력을 비롯해 한국석유공사, 한국가스공사, 한국전기안전공사 등이 잇달아 사장 공모를 두 번씩 했다. ‘적합한 인물이 없어서’라는 게 공식 이유였지만 회사 안팎에서는 ‘정부 입맛에 맞는 인물이 없어서’라는 말이 나돌았다. 실제로 재공모를 통해 뽑힌 인사 상당수는 대통령선거 캠프, 현대그룹 등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과 이런저런 인연이 있던 인물이다.

    청와대나 정치권, 해당 부처에서는 내부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혹은 꼭 말로 하지 않아도 눈치껏 알아챌 수 있는 이런저런 이유로 공기업 인사가 지금까지 미뤄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사연에 ‘아, 그런 일이 있었어?’라며 고개를 끄덕일 국민은 많지 않다. “전문성 없는 인사를 낙하산으로 선임해 보내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새 정부가 막중한 과제를 잘해내려면 인사가 중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3월 국무회의에서 인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 말이다. 지금의 인사 난맥을 풀 수 있는 열쇠는 결국 대통령이 국민 앞에서 다짐한 ‘원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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