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문에 ‘내가 만난 북한 엘리트’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다. 처음엔 한 번에 다 쓰려고 생각했지만 쓰다 보니 생각보다 양이 늘어 두 차례로 나누어 전하고자 한다. 다만 이들의 신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할 수 없다는 점은 양해를 구한다. 신분이 노출되면 당사자는 물론 주변 인물들까지 곤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면담 내용 가운데 아직 시기가 적절치 않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구릿빛 얼굴에 날카로운 눈빛
2011년 어느 가을 저녁, 중국 베이징에 있는 한 북한 식당을 찾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이라는 초대형 이슈가 터지기 불과 몇 개월 전이었다. 종업원 안내에 따라 널찍한 룸 안으로 들어갔다. 중년의 북한 남성 A가 환한 웃음으로 필자를 맞았다. 적당히 살찐 외모에 상대를 반갑게 맞는 태도 때문인지 첫인상이 푸근하고 편했다. 그러나 그 구릿빛 얼굴 위 눈빛만은 강하고 날카로웠다.
필자는 명함을 건넸지만 그는 받기만 할 뿐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자신이 누구인지 직책도 이름도 말하지 않는다. 여러 북한 인사를 만나다 보니 이런 풍경에 필자도 익숙해진 터였다. 그의 높은 신분은 이후 다른 경로를 통해 알게 됐다.
A를 만난 이유는 방북 취재 등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김정일 위원장의 유례없는 잇단 중국 방문(1년여 동안 4차례)까지…. 전 세계가 한반도를 쳐다보던 이 긴박한 시기, 기자라면 누구나 북한 내부 취재를 원했을 것이다.
식당 측에서는 고위층 인사가 남쪽 손님과 함께 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우리는 북한 술이 곁든 북한 음식을 함께 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어 소속 회사 소개부터 꺼냈다. 좌나 우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인 보도가 특징이라고 강조했다. A는 “우리가 보기에도 YTN은 그렇게 나쁘지 않다. 괜찮은 편”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A의 긍정적인 반응에 힘입어 필자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직접 북한에 들어가 취재를 해보고 싶다. 취재는 북측에서 허용하는 지역에서만 하겠다. 몰래 취재는 하지 않는다.”
희망 취재 포인트로는 세 곳을 제시했다. 평양 시내와 나선 특구, 무산 광산 등 자원개발 현장. 모두 북한의 개발과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지역이다. 그와 동시에 북측 처지에서도 공개하는 데 큰 부담이 없는 지역이라고 판단했다. A는 즉답을 피한 채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자고만 말했다.
북한 식당은 식사하면서 여성들의 공연을 보는 게 특징이다. 이날도 식사를 하는데 공연팀이 등장했다. 미모의 북한 여성들이 북한 노래와 춤을 선보였다. 특히 한 여성의 가야금 연주가 탁월했다. 줄을 뜯는 현란한 손놀림에서 나오는 명징한 소리. 감탄이 절로 나왔다. 중국에 있는 동안 북한 식당에서 공연을 제법 본 편이지만, 그때처럼 보는 이의 시선을 확 잡아당긴 연주는 기억에 없다. A 역시 이 여성의 가야금 연주 실력은 알아주는 수준이라고 했다. 중국에 나와 있는 북한 여성 가운데 단연 으뜸이라는 것이었다.
폭음 속 엉겁결에 블루스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는데, A가 돌연 가장 마음에 드는 여성이 누구냐고 묻는다. “모두 미인이라서 다 좋다”고 답하자 대뜸 한 명을 골라 춤을 추라고 한다. 필자가 머뭇거리자 강제로 한 명을 지목한다. 엉겁결에 2명 정도와 블루스를 춰야 했다. 중국에 있는 북한 식당에서 여성 종업원과 춤을 추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북측에서 이를 금하기 때문이다. 당시 A는 블루스를 추는 필자에게 “이렇게 춤추는 것은 엄청난 특혜”라고 말하기도 했다.
북한 술을 마신 뒤에는 맥주와 양주를 섞은 폭탄주가 돌았다. 필자는 술이 그다지 세지 않은 편이지만, 이날은 평소 주량에 비해 상당히 많이 마셨다. 하지만 취하지는 않았다. 취할 수가 없었다. 정신도 또렷했다. 행여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중압감, 긴장감 때문이었으리라.
취기가 오른 A가 노래를 부르자고 제안했다. 북한 식당이다 보니 노래책에 남한 노래는 없었다. 남쪽 노래가 없어서 곤란하다고 하자 “그럼 북쪽 노래로 한 곡조 뽑으라”고 한다. 아는 노래가 없다고 사양하니 이번에는 “그럼 나와 같이 부르자”고 조른다. 북한 노래는 대부분 김일성이나 김정일 찬양가였다. 아무리 술을 마셨대도 이런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게 내킬 리 없다. “다음 기회가 오면 그때 부르겠다”며 그 대신 중국 노래를 골랐다. 대만 가수 덩리쥔의 ‘달빛이 내 마음을 비추네’를 불렀다.
A는 “노래 잘하는구먼. 같은 동포인데 어떻게 중국 노래만 부르나. 북쪽 노래도 불러보라”며 계속 청했다. 난감해하던 차에 북한 여성이 부르는 노래가 귀에 들어왔다. ‘심장에 남는 사람’이었다. 필자가 “가사도 곡도 좋다”고 하자 가수 조용필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부른 노래라고 소개해준다. 드디어 같이 부를 만한 노래를 찾았다.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그렇지만 역시나, 가사 마지막 구절에는 예의 ‘장군님 찬양’이 담겨 있었다. 이 부분에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든 말든 A는 내가 이 노래를 함께 부른 것만으로도 매우 기분이 좋아진 듯 보였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A에게 북한 취재에 관해 다시 말을 꺼냈다.
“한반도가 많이 시끄럽다. 세계 언론이 너나 할 것 없이 주요 기사로 다룬다. 북측 처지에서 보면 얼토당토않은 보도도 있을 것이다. 그런 보도가 있다면 북쪽으로서는 화가 날 것 아닌가. 내 취재를 허용해달라. 내가 들어가면 두 눈으로 분명하게 확인한 것을 토대로 보도하겠다. 악의적인 왜곡 보도는 하지 않겠다. 있는 그대로 보도하겠다.”
A는 필자의 말에 관심을 보였다. 전혀 사실과 다른 보도가 수두룩하다며 분노를 터뜨렸다. 필자는 곧바로 말했다. “언론이 보도한 것 가운데 사실과 다른 게 있다면 말해달라. 내가 보도할 수 있다. 그 대신 확실한 물증만 달라.” 그러면서 ‘정치적 색깔이 없다’는 소속 회사의 강점을 재차 강조했다. A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는 필자를 만나기 전 YTN에 대한 정보를 미리 확인했을 것이다.
A도 나도 서로의 대화에 흡족해하는 분위기가 됐다. 나는 이번 만남으로 끝내지 말고 앞으로도 계속 만남을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A도 흔쾌히 “좋다”고 화답했다. 다만 전제조건을 달았다. 이 만남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요구였다. 그렇게 약속한 뒤 우리는 북한 식당에서의 거한 술자리를 마치고 헤어졌다.
북한 고위급 인사 A와 필자가 처음 만났던 중국 베이징에 있는 북한 식당의 겉모습(왼쪽)과 평양 취재에 합의했던 식당가의 러시아 레스토랑.
첫 만남 이후 A와 필자는 몇 차례 통화하거나 만남을 가졌다. 연락은 그가 먼저 했다. 통화 첫마디는 늘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 그와 필자가 사전에 약속한 일종의 암호였다. A와 다시 만났다. 이번엔 러시아 레스토랑에서였다.
A는 ‘평양 취재’가 가능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들고 나왔다. 하지만 나선 특구 취재는 어렵다고 했다. 나선에 들어가려면 중국 쪽 승인도 받아야 하는데 난색을 보인다는 것이다. 또 무산 광산 등 자원개발 현장 역시 힘들다고 했다.
그 정도로도 좋았다. 긴장과 긴박함이 넘치는 시기에 북한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 현장 분위기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아무리 북측이 주선하는 제한된 취재라 해도 마다할 수 없는 기회였다. 이 무렵 평양은 도시 곳곳에서 개발 공사가 한창이었다. 북측 당국도 평양의 변화상, 개발상을 외부 언론이 보도해주는 게 오히려 홍보 효과가 크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나선이냐 평양이냐가 아니었다. 북한이 오케이를 하더라도 우리 정부의 승인이 없으면 방북 취재가 어렵기 때문이다. 당시 필자는 이 문제를 논의하려고 베이징 주중한국대사관 관계자를 몇 차례 만났다. 방북 취재에 대한 필자의 희망을 말하자 이 관계자는 쓴 웃음을 지으며 “아마 힘들 것”이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에서는 언론인의 방북 취재를 일체 불허했다. 결국 내 방북 취재 계획은 무산됐다. 이후 이런 결과를 알려주자 A는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A는 ‘사상적으로 단단하게 무장돼 있어 빈틈이 없다’는 느낌을 주는 인물이다. 방북 취재와 관련한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북한 취재를 허락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어떤 시각으로 어떻게 보도하는가’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한국의 특정 언론사를 언급하며 그런 곳은 결코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통상 방북 취재를 위해서는 북측에 일정 비용을 지불하는 게 관행처럼 돼 있었다. 일부 인사들은 그 과정에서 일종의 수수료를 챙기기도 한다. 그러나 A는 “공화국에 돈은 얼마든지 있다. 최소한 나와 이야기할 때 돈은 중요치 않다”고 강조했다. 이런 반응은 방북 취재를 위해 그간 접촉했던 다른 인사들과는 분명 달랐다. 물론 그의 담당 분야가 달라서일 수 있다.
A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때로는 어떤 중압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상대의 정보를 세밀하게 장악해 기선을 제압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입 밖으로 꺼낸 말 자체는 신뢰할 만했다. 가볍게 말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되는 것을 안 된다고 하거나 안 되는 것을 된다고 하는 경우가 없었다. 예를 들어 필자는 그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나 후계자 김정은과의 인터뷰가 가능할지 물은 적이 있다. 돌아온 답은 “노(No)!”였다. 엄지손가락을 치치며 “이건 불가능하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북한 측 인사나 정보원 중에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것을 해주겠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물론 사탕발림이다. 기자의 호기심을 자극해 이를 미끼로 밥이나 술을 얻어먹고, 때로는 돈을 요구하기도 한다. 한국 특파원에 비해 재원과 인적자원이 넉넉한 일본 특파원은 이런 경우를 훨씬 자주 겪는다(북한 뉴스에 놀라울 정도로 집중하는 일본 언론과 필자가 겪은 북한 정보원의 사기행각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하지만 A는 이런 면에서 결코 가볍게 언행하지 않았다. 장난치지 않는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