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주에서 싱글 몰트 시장 석권한 ‘더 글렌리벳’

[명욱의 위스키 도슨트] 1824년 스코틀랜드서 정식 면허… 영국 국왕 조지 4세 애용

  • 명욱 주류문화칼럼니스트

    입력2026-01-18 09:00:02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최초라는 타이틀은 강력한 힘을 갖는다. 그렇다면 스카치위스키 역사에서 ‘공인 1호’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곳은 어디일까. 스페이사이드의 전설, ‘더 글렌리벳(The Glenlivet)’이다. 

    공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는 것은 그 전까지 위스키 제조가 대부분 불법이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18세기 영국은 프랑스와의 7년 전쟁, 미국 독립혁명 등 굵직한 전쟁을 치르느라 막대한 비용을 소모했다. 부족한 국고를 채우려고 정부가 선택한 방법은 가혹한 세금 징수였고, 그 칼날은 스코틀랜드 보리로 만든 위스키를 향했다.

    더 글렌리벳 12년산(왼쪽)과 18년산. 과일과 꽃향기, 입안을 부드럽게 감싸는 풍미를 자랑한다. 페르노리카코리아 제공

    더 글렌리벳 12년산(왼쪽)과 18년산. 과일과 꽃향기, 입안을 부드럽게 감싸는 풍미를 자랑한다. 페르노리카코리아 제공

    스코틀랜드 공식 1호 증류소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1707년 병합됐으나 정서적으로 보든, 종교적으로 보든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다. 성공회를 국교로 하는 잉글랜드와 달리,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역은 가톨릭 성향이 강했다. 이들에게 위스키에 부과된 세금은 단순한 조세가 아니라 생존을 위협하는 수탈이었다. 하이랜드 사람들은 험준한 산속 깊은 계곡으로 숨어들어 밀주를 빚었고, 세관원이 들이닥치면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 밀주는 그들에게 잉글랜드를 향한 저항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중에서도 빛나는 위스키가 있었다. 바로 ‘부드럽게 흐르는 계곡’이라는 뜻을 가진 리벳(Livet)강 유역의 글렌리벳 지역 위스키다. 1822년 영국 국왕 조지 4세는 스코틀랜드를 방문했다. 미식가이자 애주가였던 그는 불법임에도 명성이 자자하던 글렌리벳 위스키를 찾았다. “글렌리벳이 아니면 마시지 않겠다”는 국왕의 한마디는 위스키 역사 물줄기를 바꾼다. 이 일을 계기로 스코틀랜드 유력가이던 고든 공작은 합법적인 증류를 허용하는 법안(1823년 주세법) 통과를 주도했고, 자신의 영지 내 유력한 농장주인 조지 스미스에게 합법적인 면허 취득을 권유한다.

    1824년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역 최초로 정식 면허를 취득한다. 이것이 바로 ‘더 글렌리벳’의 시작이다. 하지만 최초의 대가는 혹독했다. 동료 밀주업자들은 그를 스코틀랜드의 자존심을 팔아넘긴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마치 일제강점기 시절 변절자를 바라보는 시선과 같았을 것이다. 이웃들은 그에게 “증류소와 함께 태워 죽이겠다” 등 살해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스미스는 밤낮으로 두 자루의 권총을 차고 다니며 자신의 신념과 증류소를 지켜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1858년에는 증류소에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해 모든 것이 전소되는 비극을 겪는다. 60도 넘는 위스키 원액이 가득한 오크통은 화약고나 다름없기에 피해가 막심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됐다. 기존 증류소는 산 중턱에 위치해 밀주 단속을 피하기엔 좋았으나, 대량생산과 운송에는 불편함이 컸다. 스미스는 과감하게 산 아래 민모어(Minmore) 지역으로 증류소를 옮겨 재건했다. 민모어는 평탄한 지형 덕분에 물류 이동이 훨씬 수월했고, 무엇보다 글렌리벳 맛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미네랄워터 수원지인 ‘조시의 우물(Josie’s Well)’을 바로 곁에 둔 천혜의 입지였다. 화재 덕분에 현대식 대량생산 설비와 최상의 수원을 동시에 확보하게 된 것이다.

    ‘더’ 글렌리벳이 되기까지

    ‘더 글렌리벳 스피라 60년 1965’는 지난해 브랜드 역사상 최고가인 약 12억 3500만 원에 낙찰됐다. 페르노리카코리아 제공

    ‘더 글렌리벳 스피라 60년 1965’는 지난해 브랜드 역사상 최고가인 약 12억 3500만 원에 낙찰됐다. 페르노리카코리아 제공

    품질과 생산량을 모두 잡은 글렌리벳의 명성이 높아지자 이름 도용이 이어졌다. 너도나도 제품명에 ‘글렌리벳’을 붙여 팔기 시작한 것이다. 스미스 가문은 긴 법적 투쟁을 시작했고, 1884년 마침내 승소한다. 법원은 오직 스미스의 증류소에서 생산된 위스키에만 정관사 ‘The’를 붙일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다른 증류소들은 ‘맥캘란-글렌리벳’처럼 하이픈 뒤에 지역명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글렌리벳을 유일하게 ‘더 글렌리벳’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글렌리벳이 세계적 브랜드로 도약한 결정적 계기는 1933년 미국의 금주법 해제였다. 당시에는 여러 곡물을 섞어 대량생산하는 블렌디드 위스키가 대세였는데, 글렌리벳은 섞지 않은 순수함을 강조해 ‘언블렌디드 올 몰트(Unblended All Malt)’라는 프리미엄 전략을 내세웠다. 특히 미국 호화 열차인 풀먼 기차와 독점 계약을 맺고 미니어처 병을 공급하며 상류층의 여행 동반자로 자리 잡았다. 이는 훗날 고급 위스키의 카테고리 중 하나인 싱글 몰트 위스키 시장을 여는 초석이 됐다. 지난해에는 단 하나의 캐스크에서 60년간 숙성시킨 희귀 위스키 ‘더 글렌리벳 스피라 60년 1965’가 브랜드 역사상 최고가인 약 12억3500만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오늘날 페르노리카그룹의 핵심 브랜드가 된 더 글렌리벳은 글렌피딕과 함께 세계 싱글 몰트 시장 1, 2위를 다투는 거인이 됐다. 대표 제품인 12년산과 18년산을 맛보면 스미스가 왜 목숨을 걸고 이 맛을 지키려 했는지 알 수 있다. 향미를 섬세하게 들여다보면 파인애플 향과 꽃내음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입안을 부드럽게 감싸는 우아함은 200년 전 국왕이 매료됐던 그 풍미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