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등장하는 미래사회, 즉 영상이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사회는 엄밀히 말해 시간 문제라기보다 선택의 문제다. 이 작품에서 묘사된 영상관련 기술들은 이미 기본 원리나 원초적 핵심기술의 개발이 사실상 끝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정작 관건은 우리가 이러한 ‘테크노 경찰국가’ 체제를 용인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먼저 영화에 등장한 망막인식 기술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사람 눈의 망막 실핏줄 패턴은 지문과 마찬가지로 모든 이들이 서로 다르다. 이를 이용해서 특정인을 식별하는 장면이 이미 20여년 전에 제작된 007 영화에 등장했을 정도다. 다만 망막식별 기능이 탑재된 ‘스파이더’라는 초소형 로봇 제작은 현재의 기술로는 당분간 무리로 보인다. 정밀기계공학과 초소형 인공지능 컴퓨터공학이 좀더 발달해야 이와 비슷한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
영화 속에서는 레이저광선을 쏘아 원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망막을 읽는 기술이 등장한다. 이 방법 역시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구현이 가능한 기술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정서가 그런 기술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일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상상해 보자. 거리를 지나가는데 상점 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컴퓨터 음성이 내 이름을 부르며 호객행위를 한다. 더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컴퓨터는 과거의 구매 행태나 취향까지도 다 알고 있다. 얼마나 섬뜩하겠는가? 설령 일상적인 일로 굳어져서 그러려니 하고 지낸다 해도 심리적인 스트레스는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개인의 신상 및 신용정보가 가는 곳마다 공개 방송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가는 곳마다 신상정보 공개 상상만 해도 끔찍
조지 오웰의 ‘1984년’과 같은 정치적 전체주의만이 악몽은 아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묘사된 미래의 미국 사회는 이윤 추구를 지고의 미덕으로 삼는 자본주의 이념이 극단적으로 실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디스토피아다. 과연 상품의 생산-소비-이윤 재투자라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생존을 위해 개인의 프라이버시까지도 무시되는 사회가 정말 도래할까?
이 으스스한 의문에 대한 답은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다른 장면을 통해 간접적인 추론이 가능하다. 다름 아닌 범죄 예지자들의 존재가 그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온당히 누려야 할 행복과 일상들을 모두 압수당한 채 오로지 범죄의 예방에만 몰두해야 하는 예지자들의 처지는 적어도 지금 현재의 사회 윤리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물론 영화 속 세상에서는 그들의 희생 덕분에 강력범죄가 경이적으로 줄어들었다지만, 어쨌거나 다수를 위한 소수의 일방적인 희생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그런데 지금 현실에서는 이와 비슷한 일이 훨씬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다. 9·11 테러의 피해자였던 미국이 이제 그와 같은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테러 지원 혐의가 큰 국가를 선제 공격하겠다며 공공연하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군·산복합체로 대표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지배계층이 종국에는 모두의 번영을 위해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기꺼이 포기하도록 강요하게 되지는 않을까?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보여주는 여러 영상들 중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부분은 3차원 입체 동영상의 기록, 저장 및 재생이다. 입체영상 그 자체는 이미 홀로그램이라는 형태로 개발된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비디오를 완전히 대체할 기술 수준까지 도달하기에는 아직 요원하다. 그러나 이 역시 단순히 기술적 가능성만을 따지기보다는 그 사회적 함의를 헤아려 보아야 할 것이다.
영상매체가 문자매체를 몰아내고 점점 득세하는 것은 이미 영화 속의 미래사회 얘기가 아니라 우리의 실제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영상기술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그래서 이 영화에서처럼 3차원 입체영상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인간의 두뇌 속에 간직된 시각 이미지까지 영상물로 기록하거나 가공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과연 문화 그 자체의 속성은 어떻게 변화되어갈까?
미국의 작가 레이 브래드베리는 1953년에 ‘화씨451’이라는 통렬한 문명비판 소설을 발표한 바 있다. 종이가 불타기 시작하는 온도를 제목으로 내건 이 작품은 책이란 책은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오로지 그림과 영상매체만을 허용하는 미래의 전체주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바로 그 책을 불태우는 일이 직업인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날, 주인공은 책을 몰래 숨겨놓고 읽던 이들을 알게 되면서 점점 자신의 세계에 대한 의문을 키워나가게 된다.
영상은 눈에 보이는 현란함만큼이나 우리의 창조적 상상력을 제한하는 매체다. 반면 활자매체, 즉 문자로 쓰여진 글은 우리에게 최소한의 정보만을 전달함으로써 그 나머지 부분은 모두 각자의 상상력으로 채우도록 자극한다. 똑같은 책을 열 사람이 보면 각자가 내용을 읽고 상상한 그림이 세부적으로 다 다르겠지만, 그 내용을 각색해서 영상으로 옮겼을경우 상상의 여지는 모두 사라지고 하나의 결정된 고정적 이미지만이 남게 된다. 결국 영상매체는 인간의 창조적 상상력을 제한하는 것이다.
‘화씨451’이 그리고 있는 미래사회는 바로 영상매체를 이용해 국민을 지배하는 세상이다. 동시에 활자매체를 엄격히 금지시켜 국민으로 하여금 딴생각을 못하도록 우민화하고 있다. 영상매체의 리얼리티가 높으면 높을수록 사람들은 상상의 영역에서 멀어지게 된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미래사회 역시 그렇듯 놀라운 입체영상 기술을 범죄 예방에까지 이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반론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에는 영상매체의 영향력에 대해 직접적인 사회학적 해석이 가능한 장면들은 그리 많이 등장하진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필립 K.딕이 쓴 원작의 분위기나 배경 설정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논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예컨대 발달된 과학기술은 어떤 식으로든 고스란히 사회 통제의 수단으로 전용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최근에 영상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색다르게 실감한 바 있다. ‘에너미 오브 더 스테이트’나 ‘에너미 라인’ 등의 액션영화를 보면, 인공위성으로 찍은 고해상도의 비디오 화면이 지상에서 추격전을 벌이는 인물들을 실시간으로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가능하다는 말도 들었지만 영화에서 연출한 장면쯤으로 치부해 왔는데, 최근 국내의 어느 부동산 중개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서울시 전체의 인공위성 사진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는 적잖게 놀랐다. 그 사진의 해상도는 소형 승용차도 문제없이 식별할 정도였다. 이 정도의 위성사진이 일반인들에게 공개될 정도면, 과연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의 군사위성들은 얼마나 놀라운 성능으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겠는가!
사족을 하나 덧붙이자면, 앞서 언급한 소설 ‘화씨451’은 프랑스의 예술영화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에 의해 1966년에 영화화되었다. 필자는 이 영화를 보다가 책이 불타는 장면에서 한글책이 잠깐 등장하는 것을 보고는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어쩐지 그 장면에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에.
먼저 영화에 등장한 망막인식 기술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사람 눈의 망막 실핏줄 패턴은 지문과 마찬가지로 모든 이들이 서로 다르다. 이를 이용해서 특정인을 식별하는 장면이 이미 20여년 전에 제작된 007 영화에 등장했을 정도다. 다만 망막식별 기능이 탑재된 ‘스파이더’라는 초소형 로봇 제작은 현재의 기술로는 당분간 무리로 보인다. 정밀기계공학과 초소형 인공지능 컴퓨터공학이 좀더 발달해야 이와 비슷한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
영화 속에서는 레이저광선을 쏘아 원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망막을 읽는 기술이 등장한다. 이 방법 역시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구현이 가능한 기술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정서가 그런 기술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일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상상해 보자. 거리를 지나가는데 상점 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컴퓨터 음성이 내 이름을 부르며 호객행위를 한다. 더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컴퓨터는 과거의 구매 행태나 취향까지도 다 알고 있다. 얼마나 섬뜩하겠는가? 설령 일상적인 일로 굳어져서 그러려니 하고 지낸다 해도 심리적인 스트레스는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개인의 신상 및 신용정보가 가는 곳마다 공개 방송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가는 곳마다 신상정보 공개 상상만 해도 끔찍
조지 오웰의 ‘1984년’과 같은 정치적 전체주의만이 악몽은 아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묘사된 미래의 미국 사회는 이윤 추구를 지고의 미덕으로 삼는 자본주의 이념이 극단적으로 실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디스토피아다. 과연 상품의 생산-소비-이윤 재투자라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생존을 위해 개인의 프라이버시까지도 무시되는 사회가 정말 도래할까?
이 으스스한 의문에 대한 답은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다른 장면을 통해 간접적인 추론이 가능하다. 다름 아닌 범죄 예지자들의 존재가 그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온당히 누려야 할 행복과 일상들을 모두 압수당한 채 오로지 범죄의 예방에만 몰두해야 하는 예지자들의 처지는 적어도 지금 현재의 사회 윤리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물론 영화 속 세상에서는 그들의 희생 덕분에 강력범죄가 경이적으로 줄어들었다지만, 어쨌거나 다수를 위한 소수의 일방적인 희생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그런데 지금 현실에서는 이와 비슷한 일이 훨씬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다. 9·11 테러의 피해자였던 미국이 이제 그와 같은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테러 지원 혐의가 큰 국가를 선제 공격하겠다며 공공연하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군·산복합체로 대표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지배계층이 종국에는 모두의 번영을 위해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기꺼이 포기하도록 강요하게 되지는 않을까?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보여주는 여러 영상들 중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부분은 3차원 입체 동영상의 기록, 저장 및 재생이다. 입체영상 그 자체는 이미 홀로그램이라는 형태로 개발된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비디오를 완전히 대체할 기술 수준까지 도달하기에는 아직 요원하다. 그러나 이 역시 단순히 기술적 가능성만을 따지기보다는 그 사회적 함의를 헤아려 보아야 할 것이다.
영상매체가 문자매체를 몰아내고 점점 득세하는 것은 이미 영화 속의 미래사회 얘기가 아니라 우리의 실제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영상기술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그래서 이 영화에서처럼 3차원 입체영상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인간의 두뇌 속에 간직된 시각 이미지까지 영상물로 기록하거나 가공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과연 문화 그 자체의 속성은 어떻게 변화되어갈까?
미국의 작가 레이 브래드베리는 1953년에 ‘화씨451’이라는 통렬한 문명비판 소설을 발표한 바 있다. 종이가 불타기 시작하는 온도를 제목으로 내건 이 작품은 책이란 책은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오로지 그림과 영상매체만을 허용하는 미래의 전체주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바로 그 책을 불태우는 일이 직업인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날, 주인공은 책을 몰래 숨겨놓고 읽던 이들을 알게 되면서 점점 자신의 세계에 대한 의문을 키워나가게 된다.
영상은 눈에 보이는 현란함만큼이나 우리의 창조적 상상력을 제한하는 매체다. 반면 활자매체, 즉 문자로 쓰여진 글은 우리에게 최소한의 정보만을 전달함으로써 그 나머지 부분은 모두 각자의 상상력으로 채우도록 자극한다. 똑같은 책을 열 사람이 보면 각자가 내용을 읽고 상상한 그림이 세부적으로 다 다르겠지만, 그 내용을 각색해서 영상으로 옮겼을경우 상상의 여지는 모두 사라지고 하나의 결정된 고정적 이미지만이 남게 된다. 결국 영상매체는 인간의 창조적 상상력을 제한하는 것이다.
‘화씨451’이 그리고 있는 미래사회는 바로 영상매체를 이용해 국민을 지배하는 세상이다. 동시에 활자매체를 엄격히 금지시켜 국민으로 하여금 딴생각을 못하도록 우민화하고 있다. 영상매체의 리얼리티가 높으면 높을수록 사람들은 상상의 영역에서 멀어지게 된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미래사회 역시 그렇듯 놀라운 입체영상 기술을 범죄 예방에까지 이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반론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에는 영상매체의 영향력에 대해 직접적인 사회학적 해석이 가능한 장면들은 그리 많이 등장하진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필립 K.딕이 쓴 원작의 분위기나 배경 설정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논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예컨대 발달된 과학기술은 어떤 식으로든 고스란히 사회 통제의 수단으로 전용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최근에 영상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색다르게 실감한 바 있다. ‘에너미 오브 더 스테이트’나 ‘에너미 라인’ 등의 액션영화를 보면, 인공위성으로 찍은 고해상도의 비디오 화면이 지상에서 추격전을 벌이는 인물들을 실시간으로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가능하다는 말도 들었지만 영화에서 연출한 장면쯤으로 치부해 왔는데, 최근 국내의 어느 부동산 중개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서울시 전체의 인공위성 사진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는 적잖게 놀랐다. 그 사진의 해상도는 소형 승용차도 문제없이 식별할 정도였다. 이 정도의 위성사진이 일반인들에게 공개될 정도면, 과연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의 군사위성들은 얼마나 놀라운 성능으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겠는가!
사족을 하나 덧붙이자면, 앞서 언급한 소설 ‘화씨451’은 프랑스의 예술영화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에 의해 1966년에 영화화되었다. 필자는 이 영화를 보다가 책이 불타는 장면에서 한글책이 잠깐 등장하는 것을 보고는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어쩐지 그 장면에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