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500

..

조선에도 금주령 있었다

[명욱의 술기로운 한국사] 곡식 낭비 막으려 영조 때 엄격히 시행

  • 명욱 주류문화칼럼니스트

    입력2025-08-05 09:00:02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역사상 가장 바보스럽다는 평가를 받는 법이 있다. 바로 미국 금주법이다. 1920년부터 1933년까지 시행된 이 법은 주류 소비를 없애겠다는 당초 취지와 달리 마약 및 폭력 범죄 증가, 마피아 조직 성장이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 결국 13년 만에 폐지됐으며 “국가가 만든 최악으로 실패한 정책”이라는 오명을 썼다. 당시 미국 언론은 “도덕으로 통치하려 한 순진한 법”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영조, 금주령 예외 인정 안 해

    ‘조선왕조실록’에 금주령이라는 단어가 수백 번 등장할 정도로 한국의 금주 정책은 역사가 깊다. GETTYIMAGES

    ‘조선왕조실록’에 금주령이라는 단어가 수백 번 등장할 정도로 한국의 금주 정책은 역사가 깊다. GETTYIMAGES

    그렇다면 금주법은 미국만의 얘기일까. 아니다. 한국에서도 아주 오래전부터 시시때때로 반복됐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금주령(禁酒令)이라는 단어가 수백 번이나 등장한다. 거의 생활 속 단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조선 금주령은 미국 금주법과 성격이 달랐다. 미국에서는 산업화로 값싼 술이 넘쳐 사회문제로 떠오르자 이를 막고자 금주법을 시행했다. 조선은 그보다 훨씬 절박한 이유에서였다.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어 죽는 상황에서 쌀을 술로 빚어 낭비할 수 없다 보니 금주령이 반복적으로 내려진 것이다. ‘태종실록’에는 “백성들이 술을 빚어 곡식을 허비하니 금주령을 내리고 적발 시 곡식을 몰수하라”는 기록이 있고, ‘세종실록’에는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리니 술을 빚지 말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다만 실제 시행 과정은 취지와는 다르게 흘러갔다. 왕의 명령은 곧 법이었기에 금주령은 곧장 시행됐다. 그러나 법은 주로 백성에게만 적용됐다. 관청이나 양반가에서는 여전히 잔치가 열렸고 관리들이 암주(暗酒·밀주)를 눈감아주거나 뇌물을 받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세종실록’에는 “탁주를 마신 자는 잡히고 청주를 마신 자는 잡히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탁주는 서민이 마시는 술, 청주는 양반과 권세가에서 즐기는 술이었다. 힘없는 자만 처벌받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법 집행이 금주령을 통해서도 드러난 것이다.

    백성들은 금주령을 피해 술을 몰래 빚었다. 발각되면 곤장과 유배를 각오해야 했지만, 술은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생활과 의례의 일부였기에 암주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조정은 일정 부분 예외를 두기도 했다. 관혼상제에 쓰이는 술은 허용했고, 생계형 소규모 판매도 묵인했다.



    그런데 이런 예외마저 인정하지 않겠다고 나선 군주가 있었다. 바로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금주령을 내렸던 임금 영조다. 영조는 52년 재위 기간 중 거의 50년 가까이 금주령을 내릴 정도로 술에 엄격했다. 제사 때도 술 대신 식혜를 쓰게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영조의 강경한 금주 정책은 때로는 참극을 낳았다. 대표적인 예가 윤구언 사건이다. 당시 남병사(호남 병마절도사)였던 윤구언의 집에서 술 단지로 보이는 항아리가 발견됐다. 술이 들어 있지 않았고 정황 증거에 불과했지만 대사헌 남태회의 탄핵 상소가 올라오자 영조는 격분했다.

    세 정승이 “극형은 지나치다”며 신중한 조사를 요청했지만 영조는 이를 거부했다. 숭례문 앞에서 직접 윤구언을 심문한 뒤 참형에 처했고 시신을 민중이 볼 수 있도록 내걸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가 직접 그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다. 금주령을 위반하는 게 단순 비위가 아니라, 국가 기강을 흔드는 중죄로 간주됐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영조는 술을 마시지 않았을까. 아니다. 그는 건강을 이유로 약용 술을 즐겼다. 송절차(松節茶)와 오미자차가 그 예다. 이름은 ‘차’지만 송절차의 경우 소나무 가지를 삶아 곡물과 함께 발효시킨, 사실상 술이었다.

    1736년(영조 12) 연회에서 한 신하가 “세간에 전하께서 술을 끊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라고 직언하자 영조는 “나는 목이 마를 때 오미자차를 마실 뿐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소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둘러댔다. 신하와 백성 사이에는 왕이 술을 즐긴다는 풍문이 널리 퍼졌다. 공적으로는 금주를 외치면서 자신은 술을 마시는 통치의 모순이 온전히 발각된 것이다.

    과도한 주류 통제 반대한 정조 

    억압적 금주 정책은 영조의 손자 정조 때 전환점을 맞았다. 정조는 지나치게 엄격한 금주령에 부정적이었다. 1792년 양조 금지를 주장한 신하에게 “명령만 내려 금하지 못할 바에는 신중한 편이 낫다”며 법 집행의 실효성을 강조했다. 영조 시대와 같은 대대적인 금주령은 사라졌다.

    이에 주류 시장이 활성화됐다. 도성 골목마다 크고 작은 양조장이 들어섰고,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정조 자신이 술자리를 즐기는 애주가였던 만큼 주류 문화 확산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주류 시장의 급속한 성장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1790년 대사간 홍병성은 “도성 안에 큰 술집이 골목마다 차고, 작은 술집이 처마를 잇댈 정도로 온 나라가 술 마시는 일만 일삼고 있다”며 곡물 낭비를 경고했다. 그러나 정조는 “비록 술이 폐단을 낳지만 어찌 온 나라가 술 마시는 지경에 이르렀겠는가”라며 과도한 통제에 반대 뜻을 밝혔다.

    조선 금주령 역사는 통치자의 의도와 민심, 그리고 법 집행 실효성 사이의 긴장을 보여준다. 영조는 철저한 법 집행으로 국가 기강을 세우려 했지만 지나친 엄정함이 참극과 민심 이반을 낳았다. 정조는 좀 더 현실적이고 유연한 정책으로 주류 시장을 열었으나 술 소비 급증이라는 부작용을 맞닥뜨려야 했다. 미국 금주법 역시 마찬가지다. 도덕과 공공선을 내세운 법이었지만 실효성 없는 강압은 마피아 성장과 범죄 확산이라는 역효과를 낳았다. 조선 금주령과 20세기 미국 금주법은 모두 “통치자가 현실과 민심을 읽지 못하면 법은 종이 위 명령에 불과하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