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성지인 이탈리아 밀라노 스칼라 극장.
클래식 음악 애호가가 대개 그렇겠지만, 필자도 오랫동안 해외 공연 관람에 대한 로망을 품어왔다. 이를테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입성은 모차르트 마술피리로’ ‘빈 무지크페라인에서 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말러 듣기’ 등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버킷리스트’인 셈이다. 이제 그중 상당수는 지워졌지만 아직 차례를 기다리는 항목도 적지 않다.
스칼라 극장에 관한 항목에 줄이 그어진 것은 가장 최근 일이다. 너무 지연된 감이 없지 않지만, 이른바 ‘베르디 3대 명작’ 중 하나이면서도 국내 무대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일 트로바토레’를 그곳에서 봤으니 기다린 보람은 있었다. 그러나 때로 오랜 기다림에 대한 보상은 실망과 아쉬움을 수반하기도 하는 법이다.
필자가 스칼라 극장에서 본 ‘일 트로바토레’ 공연은 당초 주인공 만리코 역에 아르헨티나 출신의 정상급 테너 마르셀로 알바레스, 루나 백작 역에 관록의 이탈리아 바리톤 레오 누치가 캐스팅돼 큰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공연 얼마 전 누치가 일신상의 이유로 하차했는데, 불안하기는 했어도 그것이 그토록 치명적인 손상을 초래할 줄은 미처 몰랐다.
일단 알바레스는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특히 마지막에 죽어가는 연인 레오노라를 품에 안고 흐느낄 때 잘 드러났듯, 거의 음표 단위로 변화를 준 감정선 처리가 일품이었다. 다만 결이 고운 미성에 지나치리만치 세공한 가창이 주특기인 가수이다 보니 유명한 카발레타 ‘저 타오르는 불꽃을 보라’에서는 충분히 강렬하지 못했지만, 전반적으로 소위 ‘클래스가 다른’ 가창을 들려줬다.
최근 이탈리아 무대를 중심으로 크게 각광받는 젊은 소프라노 마리아 아그레스타가 열연한 레오노라도 뛰어났다. 풍부한 음성과 다채로운 표현력을 겸비한 그녀는 ‘미제레레’ 직후의 고난도 카발레타까지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집시여인 아주체나를 맡은 예카테리나 세멘추크도 비록 귀기 서린 카리스마는 부족했을지언정 대체로 무난한 모습을 보여줬다.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된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
때로는 최고 무대에서 기대 이하의 공연을 만나기도 한다. 더구나 이번에 필자는 천장 근처 갈레리아에 앉았던 탓에 스칼라 극장 특유의 객석 차별(갈레리아 관객은 메인 로비에 출입이 제한됨)까지 체험해 뒷맛이 더 씁쓸했다. 이 극장의 명물 가운데 하나인 열혈 관객의 야유를 지근거리에서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어느 정도 보상이 되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