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시, 서울 중구 동대문 의류타운은 밤을 잊었다. 화려한 불빛과 강렬한 음악소리 아래 밤샘 쇼핑을 즐기는 사람들과 좋은 물건을 가져가려고 안달이 난 보따리상으로 북적인다. 그나마 손님들의 발걸음이 뜸해진 틈을 타 밀리오레 3층 옷가게에서 일하는 김효연(37·가명) 씨가 늦은 저녁을 먹는다. ‘아이고고고’, 오후 8시 30분에 출근해 화장실 갈 때 한 번 빼고는 처음 자리에 앉는 거라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난다. 앞으로 오전 4시 30분까지 장사하고 2시간 정도 정리한 다음, 날이 밝은 후에야 하루 일이 끝난다. 그때까지 언제 또 틈이 날지 모르니 양껏 먹고 쉬어둬야 한다.
밤샘에 불규칙한 식사 살찔 수밖에 없는 곳
정해진 식사시간은 없다. 오후 11시부터 오전 2시 사이 손님 없을 때를 이용해 밥을 먹는다. 손님이 몰려드는 날에는 급하게 주먹밥으로 때울 때도 있다. 손님이 없더라도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식사를 마쳐야 한다. 오늘의 메뉴는 엽기떡볶이. 입 안이 얼얼하도록 맵고 자극적인 맛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여기서 일하는 ‘언니들’ 사이에서는 스트레스 해소 음식으로 최고 인기다.
“눈물 콧물 흘려가며 정신없이 먹고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오면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
물론 중간 중간 매점에서 과자, 초콜릿, 냉커피도 공수해 먹는다. 큰 보폭으로 두 번이면 다 닿는 좁은 공간에서 8시간 가까이 서 있자면 입이 심심해서 어쩔 수 없다. 점원이라고 무시하고,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는 ‘진상’ 손님이 한 명이라도 걸리는 날엔 스트레스 때문에 더 많이 먹는다. 새벽에 일 끝나고 주변 포장마차에서 닭똥집, 닭발 등을 안주 삼아 부어라 마셔라 하는 날도 많다. 살이 찔 수밖에 없는 상황. 키가 155cm가 안 되는 아담한 김씨도 한때 75kg까지 나갔다. 이들에게 다이어트는 미용이 아니라 생존이다. 뚱뚱하면 건강에 안 좋고 여성으로서 자신감에 상처 입는 건 둘째 치고, 무엇보다 장사가 안 되기 때문.
“파는 옷 중에 가장 ‘미는 옷’을 입고 있는데, ‘옷빨’이 안 나면 그게 팔리겠어? 안 그래도 장사가 안 되는데 그렇게 손님 쫓으면 안 되지.”
운동을 하자니 시간과 돈 둘 다 없다. 오전 7시가 다 돼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가 중학생 딸을 학교 보내고 집안일 좀 하다 한숨 자면 다시 출근시간이다. 그렇기에 김씨는 6년째 다이어트 약을 처방받아 먹다 끊기를 반복하고 있다. 한 달에 처방전과 약값에 드는 돈은 15만 원 정도. 밤새 일해 월 140만 원 버는 김씨에게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지만 그 마법 같은 효능을 알기에 끊을 수 없다.
“75㎏일 때 약을 먹었더니 3개월 만에 48㎏가 된 거야. 그러고 나서 약을 안 먹었더니 바로 55㎏이 되더라고. 그러니 어떡해, 먹을 수밖에 없지. 약 먹는 달은 내 몫으로 티셔츠 한 개 못 사는 거지.”
3개월 만에 30㎏이나 빼주는 약이 있다니, 어떤 여성이 솔깃하지 않으랴. 김씨의 소개로 그 병원을 찾아갔다.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이 병원은 이미 다이어트에 관심 있는 여성들에게 성지(聖地)와 같았다. 역시 동대문 쇼핑몰에서 일하는 이모(34) 씨는 “우리 점포 주변 언니들은 한 명도 안 빼놓고 그 약을 먹는다”고 말했다. 그 병원과 같은 층에 있어 처방전을 대부분 조제하는 약국까지 덩달아 붐빈다. 지역 보건소 소속으로 그 약국을 정기 단속한 적 있는 한 약사는 “당시 그 병원 처방전을 받아온 아가씨들이 끊임없이 약국에 몰려들어 조사가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과연 동대문타운 아가씨들을 매료시킨 그 약의 정체는 무엇일까.
남의 이름으로 처방전 발행 등 불법 성행
평일 오전 10시, 문을 연 지 1시간밖에 안 돼 한가할 줄 알았는데 병원에는 벌써 5~6명이 대기 중이다. 로비에 앉아 기다리는데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카운터에 2만 원을 내밀며 다짜고짜 이름과 생년월일을 말했다. 간호사는 바로 처방전을 내줬고, 그 여성은 종이를 받아 바로 옆 약국으로 갔다. 진료 의사가 아닌 사람이 처방전을 내주는 것은 불법이지만, 1시간 동안 2명이나 의사 진찰 없이 처방전을 받아갔다. 환자도, 간호사도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먼저 체질량 지수(BMI 지수)를 측정했다. BMI 21. 병원 코디네이터는 “건강상으로는 정상이지만, 20대 여성 미의 기준으로 볼 땐 7kg 정도 빼는 게 좋겠다”고 했다. 원장실로 들어갔더니, 원장은 다짜고짜 “약만 먹으려고요?”라고 물었다. 병원은 비만클리닉, 피부과, 산부인과를 겸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대기 중인 손님 대부분이 ‘다이어트 주사’를 병행했다. “난 약만 먹겠다”고 하자 그는 “몇 개월분 해드릴까요?”라고 물었다. 난 “직장은 종로에 있고 주 5일, 보통 오전 9시부터 오후 12시까지 일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원장은 “원래 그러면 안 되는데 바쁘시니까 3개월분 끊어드릴게요”라고 했다. 그는 컴퓨터에 있는 처방전에 기자의 이름과 낯선 두 여성의 이름을 입력했다. 한 사람에게 석 달치를 처방하는 건 위법이기 때문이란다. 다른 두 명은 그 병원 피부관리사와 간호사인 듯했다. 이어 원장은 ‘물을 2.5ℓ이상 마셔라, 탄수화물은 지금 먹는 것의 반으로 줄여라, 간식은 절대 먹지 마라, 식사는 아침·점심·저녁 순으로 줄여가며 먹어라’ 등 기본 생활수칙을 설명했다.
“운동을 권하진 않겠어요. 생활 패턴을 보니 운동할 수 없는 상황이네요. 그래도 최대한 걸으려고 노력해보세요. 그래야 약의 효능을 높일 수 있으니까요.”
부작용은 없냐고 묻자 그는 “처음 일주일은 잠이 안 오거나 입 마름이 올 수도 있지만, 물을 충분히 마시면 괜찮아지고 그 후에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명함을 건네면서 “혹시 부작용이 있으면 문자 보내세요”라고 말했다. 그 밖의 부작용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3장의 처방전을 받고 나설 때까지 원장은 기자에게 평소 먹는 약이 있는지, 지병이 있는지 묻지 않았다. 처방전 1장당 4만 원씩, 총 12만 원. 물론 비보험이다. 신용카드를 꺼냈더니 “3장 처방전 이름이 다르기 때문에 한 번에 결제할 수 없다”며 현금을 요구했다. 1층 ATM까지 가서 현금을 뽑아다 주고 현금영수증을 달라고 했더니, 간호사는 안 된다며 황당하다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원래 이렇게 다른 사람으로 처방전 떼는 거 불법이에요.”
문제투성이 다이어트 처방전
3장의 처방전 내용을 살펴봤다. 각각 7개의 약이 모두 비급여로 돼 있다. 대한약사회(이하 약사회) 홈페이지에서 약의 성분을 찾아봤다. 그중 일반 다이어트 약은 살라이트 하나였다. 그 밖에 심장박동을 조정하는 카르틴정 330mg, 몸 안의 수분을 빼내는 이뇨제 알닥톤필름코팅정 25mg, 감기약인 해슈펜, 변비약 엠티정, 고혈압약 리놀민이 있었다. 또 향정신성의약품(이하 향정약품)의 하나인 펜타씬이 첫째 달에는 하루에 3회 1알씩, 둘째 달에는 1.5알씩, 셋째 달에는 2알씩 처방됐다.
왜 다이어트 약에 심장박동 조정약, 감기약, 고혈압약 등이 있는 걸까? ‘건강 사회를 위한 약사회’(이하 건약) 신형근 부회장은 “약품의 부작용(off-label)을 이용해 살을 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카르틴을 먹으면 심장박동 수가 빨라져 칼로리 소비가 늘고, 약의 부작용으로 속이 메슥거리고 입 안이 써서 식욕이 떨어진다. 감기약을 먹으면 식욕이 줄고 체온이 높아진다. 신 부회장은 “체온이 높아져 칼로리 소비가 많아지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리란 생각에 이 약을 처방한 것 같은데, 실제 효과는 증명된 바 없다”고 말했다. 고혈압약의 경우 몸속 콜레스테롤을 제거해 살을 빼려는 의도지만, 이 역시 의약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 이뇨제, 변비약은 몸 안의 배설물을 빼는 것으로 몸이 가벼워진 느낌은 들 수 있지만 실제 체지방 감량과는 상관없다.
더욱 문제가 되는 건 향정약품 펜타씬이다. 펜타씬의 성분명은 주석산 펜디메트라진. 뇌의 자율신경계에 영향을 줘 식욕을 억제하는 약품으로 일종의 마약류다. 약사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 약은 식이요법, 운동요법 등 적절한 체중감량요법에 반응하지 않는 BMI 30 이상 비만을 치료할 때 단기간 보조요법으로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기자는 BMI 21로 해당사항이 없는데도 이 약을 처방받았다. 심지어 처방하면서 의사는 기자의 BMI를 보지도 않았다. 또한 경고사항에 전문의약품, 일반의약품, 생약제제 등 다른 식욕억제제와 병용하지 않도록 돼 있지만 살사라진 등 다른 다이어트 약과 처방됐다. 또 4주 이내 단기간 투여해야 하나 기자는 석 달간, 그것도 점차 용량을 늘려 처방받았다. 본래 펜타씬은 환자가 첫 4주간 1.8㎏ 이상 만족할 만한 체중감량을 했을 때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고 이 약으로 계속 치료하라고 돼 있으나, 기자는 석 달치를 한 번에 처방받았으므로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비전문가의 눈에도 참으로 문제가 많은 처방이었다.
기자는 마약류 다이어트 처방전의 문제점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3년 이내에 그 병원에서 발행한 처방전 100여 장을 입수했다. 한결같이 펜디, 휴터민 등 향정약품이 감기약, 고혈압약, 변비약과 함께 처방됐다. 심지어 두 종류의 향정약품을 쓴 처방전도 있었다. 그 병원에서 1년 동안 처방하는 향정약품이 최소 3만여 정은 된다는 한 약사의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는 확신이 생겼다.
“혹시 고혈압 있으세요?”
기자의 처방전을 보고 식품의약품안전청(이하 식약청) 마약류관리과 김효정 사무관은 “왜 감기약, 고혈압약 등을 같이 처방했는지 모르겠다. 혹시 다이어트 약을 처방하면서 환자분이 가진 다른 질환까지 처방한 건 아니냐?”고 재차 물었다. 물론 아니다. 신 부회장 역시 기자의 처방전을 보고 “이렇게 약을 먹다간 속 다 버린다”며 아연실색했다. 가장 우려되는 건 약물중독. 펜타씬 같은 향정약품은 중독성, 습관성이 있어 끊기 어렵다. 실제 약을 넉 달 연속 복용한 동대문 의류타운 종업원 K씨는 “약을 안 먹으려고 하는데, 막상 그러면 계속 생각이 나서 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대다수 복용자가 “약을 끊으면 갑자기 살찐다”고 했는데, 이는 약에 대한 의존성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먹으면 약에 대한 내성이 생겨 식욕억제 효과가 떨어진다. 약을 먹어도 살이 빠지지 않고, 그렇다고 약을 끊을 수도 없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
펜타씬을 장기간 복용할 때 가장 우려되는 것이 폐에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에 문제가 생겨 폐동맥의 혈압이 상승, 갑작스럽게 호흡이 곤란해지는 폐동맥 고혈압이다. 약사회 홈페이지 약품 설명에 따르면, 펜타씬을 3개월 넘게 투여했을 때 폐동맥 고혈압의 위험이 23배 높아진다.
실제 향정약품 장기 투여로 인한 폐동맥 고혈압으로 사망한 사례도 있다. 2009년 10월 서울에서 펜타씬과 같이 마약류인 펜터민을 과다 복용한 30대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다이어트를 위해 친구 6, 7명에게 부탁해 펜터민을 처방받아 지속적으로 복용하다 사망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 결과 직접적인 사망원인은 갑작스러운 호흡곤란이었다. 그럼에도 이처럼 많은 의원이 마약류 약품을 장기간 무분별하게 처방하고 있다.
부작용도 살 빠지는 신호라며 참는 여성들
약을 장기 복용한 동대문타운 여성들은 모두 부작용을 호소했다. 3년간 먹은 박모 씨는 약을 복용한 날에는 하루 종일 굶는다. 입이 써서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기 때문. 심지어 약을 복용하고 밥을 먹다 속이 메스꺼워 모두 게워낸 적도 있다. 손이 떨리는 여성도 있었다. 먹고 나면 손, 팔, 다리에 힘이 쭉 빠져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했다. 입과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서 아무리 립케어 제품을 발라도 하얗게 일어난다는 사람도 있었다. 수면장애는 애교 수준이었다. 본래부터 자는 시간이 일정치 않아 개운하게 못 자는데, 약을 먹으면 24시간 뜬눈으로 지새우기도 한다고 했다.
약을 끊었을 때 오는 부작용도 있다. 약을 안 먹으면 각성 효과가 없어지면서 갑작스레 피로가 몰려온다. 김효연 씨는 “큰맘 먹고 약을 끊었을 때는, 근무시간에 선 채로 손님을 받는데도 눈이 감기고 졸려서 미치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약을 끊은 뒤 우울증을 호소하는 여성도 있었다. 기분이 처지면서 별것 아닌 일에 ‘욱’하게 되는 것. 자연히 손님과 시비도 늘어난다고 했다. 그들이 말한 증세는 모두 약사회 홈페이지 ‘펜타씬 사용상의 주의사항’에 나온 부작용이었다. 그러나 모두 당장 약을 끊을 생각도, 자신도 없었다. 심지어 “예뻐지려면 어느 정도 고통은 감수해야 한다. 그런 부작용은 살 빠지는 신호”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마약중독자’로 전락
식약청에서는 매년 의사, 약사에게 “향정약품 오·남용을 하지 말고 적절한 처방을 하자”는 내용의 의약품 안전성 서한을 배포한다. 향정약품은 4주 이내만 쓰고, 다른 식욕억제제와 병용 투약하지 말며, 되도록 최소만 투여하고 식욕억제 효과에 대한 내성이 나타날 때 약 사용을 중지하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권고사항이기 때문에 의원, 약국이 이를 따르지 않아도 처벌할 법률적 근거가 없다.
식약청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의사의 처방권을 보장한다. 그 결과 나타나는 부작용과 피해는 의사가 책임지면 된다”고 말했다. 의사는 어떤 약을 쓰더라도 환자의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는 논리다. 보건복지부는 “향정약품 장기 투약을 제한하는 법률시행령 개정을 추진할 계획이고, 해당 의료기관에 대해서는 식약청 등을 통해 지도·감독하겠다”고 했다. 관련 법안은 제17대 국회에서 건약과 민주노동당 최순영 당시 의원이 함께 발의했으나 처리 기한이 넘어 자동 폐기됐고, 여전히 소식이 없다.
그나마 기대를 거는 것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에서 야심차게 추진하는 DUR(의약품 처방조제 지원시스템)의 확대다. DUR는 의·약사가 처방조제 내용을 컴퓨터에 입력하면, 심평원 중앙 서버에 누적된 환자 조제 기록이 실시간 점검되고 팝업창을 통해 복용 또는 병용 금지 약물 목록을 의·약사에게 알려주는 시스템이다. 이를 통해 향정약품 병용 투약 및 오·남용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건약 임명희 사무국장은 “의협 등 단체에서 처방권 침해 등을 근거로 반대해 심평원이 의도한 대로 올해 안에 전국적으로 확대될지 의문이고, 강제력이 없다는 점에서도 처벌이 미약하다”고 말했다.
한편 앞서 기자가 찾았던 병원의 경우 다른 사람 이름으로 처방전을 제공한 것은 처방전 허위발급에 해당해 의사 자격정지 2년, 1년 이하 징역, 500만 원 이하 벌금이 부과된다. 의사 진료 없이 간호사가 처방전을 제공한 것은 무면허 의료행위를 한 혐의로 의사와 간호사 자격정지 3개월, 5년 이하 징역, 2000만 원 이하 벌금을 물어야 한다. 관할 보건소에 문의했더니 “그 병원을 고발해달라”고 했다. “어떻게 드러내놓고 불법영업을 할 수 있느냐”고 따졌더니, 보건소 측은 “우리가 만능이 아닌데 각 병원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일일이 알 수는 없지 않느냐”고 한탄했다.
그 사이 많은 동대문타운 젊은 여성은 ‘마약중독자’가 되고 있다. 김효연 씨는 늘어진 양팔의 살가죽을 바라보며 씁쓸해했다. 약을 먹고 살을 빼면 몸무게는 줄어들지만 살이 적응을 못해 이처럼 흐물흐물해진다는 것. 온갖 부작용은 이미 삶의 일부분이 됐다. 그래도 그는 “살찌는 것보다는 그렇게 해서라도 몸매를 유지하는 게 낫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 밤도 그는 좁은 점포에 위태롭게 서서 약 한 봉지를 입 안에 털어넣는다. 입 안에 맴도는 쓰디쓴 맛은 그의 인생과 닮았다.
밤샘에 불규칙한 식사 살찔 수밖에 없는 곳
정해진 식사시간은 없다. 오후 11시부터 오전 2시 사이 손님 없을 때를 이용해 밥을 먹는다. 손님이 몰려드는 날에는 급하게 주먹밥으로 때울 때도 있다. 손님이 없더라도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식사를 마쳐야 한다. 오늘의 메뉴는 엽기떡볶이. 입 안이 얼얼하도록 맵고 자극적인 맛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여기서 일하는 ‘언니들’ 사이에서는 스트레스 해소 음식으로 최고 인기다.
“눈물 콧물 흘려가며 정신없이 먹고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오면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
물론 중간 중간 매점에서 과자, 초콜릿, 냉커피도 공수해 먹는다. 큰 보폭으로 두 번이면 다 닿는 좁은 공간에서 8시간 가까이 서 있자면 입이 심심해서 어쩔 수 없다. 점원이라고 무시하고,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는 ‘진상’ 손님이 한 명이라도 걸리는 날엔 스트레스 때문에 더 많이 먹는다. 새벽에 일 끝나고 주변 포장마차에서 닭똥집, 닭발 등을 안주 삼아 부어라 마셔라 하는 날도 많다. 살이 찔 수밖에 없는 상황. 키가 155cm가 안 되는 아담한 김씨도 한때 75kg까지 나갔다. 이들에게 다이어트는 미용이 아니라 생존이다. 뚱뚱하면 건강에 안 좋고 여성으로서 자신감에 상처 입는 건 둘째 치고, 무엇보다 장사가 안 되기 때문.
“파는 옷 중에 가장 ‘미는 옷’을 입고 있는데, ‘옷빨’이 안 나면 그게 팔리겠어? 안 그래도 장사가 안 되는데 그렇게 손님 쫓으면 안 되지.”
운동을 하자니 시간과 돈 둘 다 없다. 오전 7시가 다 돼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가 중학생 딸을 학교 보내고 집안일 좀 하다 한숨 자면 다시 출근시간이다. 그렇기에 김씨는 6년째 다이어트 약을 처방받아 먹다 끊기를 반복하고 있다. 한 달에 처방전과 약값에 드는 돈은 15만 원 정도. 밤새 일해 월 140만 원 버는 김씨에게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지만 그 마법 같은 효능을 알기에 끊을 수 없다.
“75㎏일 때 약을 먹었더니 3개월 만에 48㎏가 된 거야. 그러고 나서 약을 안 먹었더니 바로 55㎏이 되더라고. 그러니 어떡해, 먹을 수밖에 없지. 약 먹는 달은 내 몫으로 티셔츠 한 개 못 사는 거지.”
3개월 만에 30㎏이나 빼주는 약이 있다니, 어떤 여성이 솔깃하지 않으랴. 김씨의 소개로 그 병원을 찾아갔다.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이 병원은 이미 다이어트에 관심 있는 여성들에게 성지(聖地)와 같았다. 역시 동대문 쇼핑몰에서 일하는 이모(34) 씨는 “우리 점포 주변 언니들은 한 명도 안 빼놓고 그 약을 먹는다”고 말했다. 그 병원과 같은 층에 있어 처방전을 대부분 조제하는 약국까지 덩달아 붐빈다. 지역 보건소 소속으로 그 약국을 정기 단속한 적 있는 한 약사는 “당시 그 병원 처방전을 받아온 아가씨들이 끊임없이 약국에 몰려들어 조사가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과연 동대문타운 아가씨들을 매료시킨 그 약의 정체는 무엇일까.
남의 이름으로 처방전 발행 등 불법 성행
동대문 쇼핑몰에서 장사를 잘하려면 날씬한 몸매도 중요하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먼저 체질량 지수(BMI 지수)를 측정했다. BMI 21. 병원 코디네이터는 “건강상으로는 정상이지만, 20대 여성 미의 기준으로 볼 땐 7kg 정도 빼는 게 좋겠다”고 했다. 원장실로 들어갔더니, 원장은 다짜고짜 “약만 먹으려고요?”라고 물었다. 병원은 비만클리닉, 피부과, 산부인과를 겸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대기 중인 손님 대부분이 ‘다이어트 주사’를 병행했다. “난 약만 먹겠다”고 하자 그는 “몇 개월분 해드릴까요?”라고 물었다. 난 “직장은 종로에 있고 주 5일, 보통 오전 9시부터 오후 12시까지 일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원장은 “원래 그러면 안 되는데 바쁘시니까 3개월분 끊어드릴게요”라고 했다. 그는 컴퓨터에 있는 처방전에 기자의 이름과 낯선 두 여성의 이름을 입력했다. 한 사람에게 석 달치를 처방하는 건 위법이기 때문이란다. 다른 두 명은 그 병원 피부관리사와 간호사인 듯했다. 이어 원장은 ‘물을 2.5ℓ이상 마셔라, 탄수화물은 지금 먹는 것의 반으로 줄여라, 간식은 절대 먹지 마라, 식사는 아침·점심·저녁 순으로 줄여가며 먹어라’ 등 기본 생활수칙을 설명했다.
“운동을 권하진 않겠어요. 생활 패턴을 보니 운동할 수 없는 상황이네요. 그래도 최대한 걸으려고 노력해보세요. 그래야 약의 효능을 높일 수 있으니까요.”
부작용은 없냐고 묻자 그는 “처음 일주일은 잠이 안 오거나 입 마름이 올 수도 있지만, 물을 충분히 마시면 괜찮아지고 그 후에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명함을 건네면서 “혹시 부작용이 있으면 문자 보내세요”라고 말했다. 그 밖의 부작용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3장의 처방전을 받고 나설 때까지 원장은 기자에게 평소 먹는 약이 있는지, 지병이 있는지 묻지 않았다. 처방전 1장당 4만 원씩, 총 12만 원. 물론 비보험이다. 신용카드를 꺼냈더니 “3장 처방전 이름이 다르기 때문에 한 번에 결제할 수 없다”며 현금을 요구했다. 1층 ATM까지 가서 현금을 뽑아다 주고 현금영수증을 달라고 했더니, 간호사는 안 된다며 황당하다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원래 이렇게 다른 사람으로 처방전 떼는 거 불법이에요.”
문제투성이 다이어트 처방전
병원은 다이어트를 원하는 환자들에게 펜타씬, 푸링, 휴터민 등 향정신성의약품을 무분별하게 처방했다.
왜 다이어트 약에 심장박동 조정약, 감기약, 고혈압약 등이 있는 걸까? ‘건강 사회를 위한 약사회’(이하 건약) 신형근 부회장은 “약품의 부작용(off-label)을 이용해 살을 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카르틴을 먹으면 심장박동 수가 빨라져 칼로리 소비가 늘고, 약의 부작용으로 속이 메슥거리고 입 안이 써서 식욕이 떨어진다. 감기약을 먹으면 식욕이 줄고 체온이 높아진다. 신 부회장은 “체온이 높아져 칼로리 소비가 많아지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리란 생각에 이 약을 처방한 것 같은데, 실제 효과는 증명된 바 없다”고 말했다. 고혈압약의 경우 몸속 콜레스테롤을 제거해 살을 빼려는 의도지만, 이 역시 의약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 이뇨제, 변비약은 몸 안의 배설물을 빼는 것으로 몸이 가벼워진 느낌은 들 수 있지만 실제 체지방 감량과는 상관없다.
더욱 문제가 되는 건 향정약품 펜타씬이다. 펜타씬의 성분명은 주석산 펜디메트라진. 뇌의 자율신경계에 영향을 줘 식욕을 억제하는 약품으로 일종의 마약류다. 약사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 약은 식이요법, 운동요법 등 적절한 체중감량요법에 반응하지 않는 BMI 30 이상 비만을 치료할 때 단기간 보조요법으로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기자는 BMI 21로 해당사항이 없는데도 이 약을 처방받았다. 심지어 처방하면서 의사는 기자의 BMI를 보지도 않았다. 또한 경고사항에 전문의약품, 일반의약품, 생약제제 등 다른 식욕억제제와 병용하지 않도록 돼 있지만 살사라진 등 다른 다이어트 약과 처방됐다. 또 4주 이내 단기간 투여해야 하나 기자는 석 달간, 그것도 점차 용량을 늘려 처방받았다. 본래 펜타씬은 환자가 첫 4주간 1.8㎏ 이상 만족할 만한 체중감량을 했을 때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고 이 약으로 계속 치료하라고 돼 있으나, 기자는 석 달치를 한 번에 처방받았으므로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비전문가의 눈에도 참으로 문제가 많은 처방이었다.
기자는 마약류 다이어트 처방전의 문제점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3년 이내에 그 병원에서 발행한 처방전 100여 장을 입수했다. 한결같이 펜디, 휴터민 등 향정약품이 감기약, 고혈압약, 변비약과 함께 처방됐다. 심지어 두 종류의 향정약품을 쓴 처방전도 있었다. 그 병원에서 1년 동안 처방하는 향정약품이 최소 3만여 정은 된다는 한 약사의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는 확신이 생겼다.
“혹시 고혈압 있으세요?”
기자의 처방전을 보고 식품의약품안전청(이하 식약청) 마약류관리과 김효정 사무관은 “왜 감기약, 고혈압약 등을 같이 처방했는지 모르겠다. 혹시 다이어트 약을 처방하면서 환자분이 가진 다른 질환까지 처방한 건 아니냐?”고 재차 물었다. 물론 아니다. 신 부회장 역시 기자의 처방전을 보고 “이렇게 약을 먹다간 속 다 버린다”며 아연실색했다. 가장 우려되는 건 약물중독. 펜타씬 같은 향정약품은 중독성, 습관성이 있어 끊기 어렵다. 실제 약을 넉 달 연속 복용한 동대문 의류타운 종업원 K씨는 “약을 안 먹으려고 하는데, 막상 그러면 계속 생각이 나서 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대다수 복용자가 “약을 끊으면 갑자기 살찐다”고 했는데, 이는 약에 대한 의존성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먹으면 약에 대한 내성이 생겨 식욕억제 효과가 떨어진다. 약을 먹어도 살이 빠지지 않고, 그렇다고 약을 끊을 수도 없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
펜타씬을 장기간 복용할 때 가장 우려되는 것이 폐에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에 문제가 생겨 폐동맥의 혈압이 상승, 갑작스럽게 호흡이 곤란해지는 폐동맥 고혈압이다. 약사회 홈페이지 약품 설명에 따르면, 펜타씬을 3개월 넘게 투여했을 때 폐동맥 고혈압의 위험이 23배 높아진다.
실제 향정약품 장기 투여로 인한 폐동맥 고혈압으로 사망한 사례도 있다. 2009년 10월 서울에서 펜타씬과 같이 마약류인 펜터민을 과다 복용한 30대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다이어트를 위해 친구 6, 7명에게 부탁해 펜터민을 처방받아 지속적으로 복용하다 사망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 결과 직접적인 사망원인은 갑작스러운 호흡곤란이었다. 그럼에도 이처럼 많은 의원이 마약류 약품을 장기간 무분별하게 처방하고 있다.
부작용도 살 빠지는 신호라며 참는 여성들
약을 장기 복용한 동대문타운 여성들은 모두 부작용을 호소했다. 3년간 먹은 박모 씨는 약을 복용한 날에는 하루 종일 굶는다. 입이 써서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기 때문. 심지어 약을 복용하고 밥을 먹다 속이 메스꺼워 모두 게워낸 적도 있다. 손이 떨리는 여성도 있었다. 먹고 나면 손, 팔, 다리에 힘이 쭉 빠져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했다. 입과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서 아무리 립케어 제품을 발라도 하얗게 일어난다는 사람도 있었다. 수면장애는 애교 수준이었다. 본래부터 자는 시간이 일정치 않아 개운하게 못 자는데, 약을 먹으면 24시간 뜬눈으로 지새우기도 한다고 했다.
약을 끊었을 때 오는 부작용도 있다. 약을 안 먹으면 각성 효과가 없어지면서 갑작스레 피로가 몰려온다. 김효연 씨는 “큰맘 먹고 약을 끊었을 때는, 근무시간에 선 채로 손님을 받는데도 눈이 감기고 졸려서 미치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약을 끊은 뒤 우울증을 호소하는 여성도 있었다. 기분이 처지면서 별것 아닌 일에 ‘욱’하게 되는 것. 자연히 손님과 시비도 늘어난다고 했다. 그들이 말한 증세는 모두 약사회 홈페이지 ‘펜타씬 사용상의 주의사항’에 나온 부작용이었다. 그러나 모두 당장 약을 끊을 생각도, 자신도 없었다. 심지어 “예뻐지려면 어느 정도 고통은 감수해야 한다. 그런 부작용은 살 빠지는 신호”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마약중독자’로 전락
식약청에서는 매년 의사, 약사에게 “향정약품 오·남용을 하지 말고 적절한 처방을 하자”는 내용의 의약품 안전성 서한을 배포한다. 향정약품은 4주 이내만 쓰고, 다른 식욕억제제와 병용 투약하지 말며, 되도록 최소만 투여하고 식욕억제 효과에 대한 내성이 나타날 때 약 사용을 중지하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권고사항이기 때문에 의원, 약국이 이를 따르지 않아도 처벌할 법률적 근거가 없다.
식약청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의사의 처방권을 보장한다. 그 결과 나타나는 부작용과 피해는 의사가 책임지면 된다”고 말했다. 의사는 어떤 약을 쓰더라도 환자의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는 논리다. 보건복지부는 “향정약품 장기 투약을 제한하는 법률시행령 개정을 추진할 계획이고, 해당 의료기관에 대해서는 식약청 등을 통해 지도·감독하겠다”고 했다. 관련 법안은 제17대 국회에서 건약과 민주노동당 최순영 당시 의원이 함께 발의했으나 처리 기한이 넘어 자동 폐기됐고, 여전히 소식이 없다.
그나마 기대를 거는 것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에서 야심차게 추진하는 DUR(의약품 처방조제 지원시스템)의 확대다. DUR는 의·약사가 처방조제 내용을 컴퓨터에 입력하면, 심평원 중앙 서버에 누적된 환자 조제 기록이 실시간 점검되고 팝업창을 통해 복용 또는 병용 금지 약물 목록을 의·약사에게 알려주는 시스템이다. 이를 통해 향정약품 병용 투약 및 오·남용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건약 임명희 사무국장은 “의협 등 단체에서 처방권 침해 등을 근거로 반대해 심평원이 의도한 대로 올해 안에 전국적으로 확대될지 의문이고, 강제력이 없다는 점에서도 처벌이 미약하다”고 말했다.
한편 앞서 기자가 찾았던 병원의 경우 다른 사람 이름으로 처방전을 제공한 것은 처방전 허위발급에 해당해 의사 자격정지 2년, 1년 이하 징역, 500만 원 이하 벌금이 부과된다. 의사 진료 없이 간호사가 처방전을 제공한 것은 무면허 의료행위를 한 혐의로 의사와 간호사 자격정지 3개월, 5년 이하 징역, 2000만 원 이하 벌금을 물어야 한다. 관할 보건소에 문의했더니 “그 병원을 고발해달라”고 했다. “어떻게 드러내놓고 불법영업을 할 수 있느냐”고 따졌더니, 보건소 측은 “우리가 만능이 아닌데 각 병원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일일이 알 수는 없지 않느냐”고 한탄했다.
그 사이 많은 동대문타운 젊은 여성은 ‘마약중독자’가 되고 있다. 김효연 씨는 늘어진 양팔의 살가죽을 바라보며 씁쓸해했다. 약을 먹고 살을 빼면 몸무게는 줄어들지만 살이 적응을 못해 이처럼 흐물흐물해진다는 것. 온갖 부작용은 이미 삶의 일부분이 됐다. 그래도 그는 “살찌는 것보다는 그렇게 해서라도 몸매를 유지하는 게 낫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 밤도 그는 좁은 점포에 위태롭게 서서 약 한 봉지를 입 안에 털어넣는다. 입 안에 맴도는 쓰디쓴 맛은 그의 인생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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