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에 중독된 사람은 족제비처럼 짧은 팔을 가졌다. 동정적인 사람은 섬세하고 창백하며 욕정적인 눈을 가졌다. 수다쟁이는 상체가 비정상적으로 크고 배가 둥글고, 배 둘레에 굵은 털이 무성하게 나 있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상체가 유달리 작고 뼈대는 가늘지만 살이 보기 좋게 차올라 있다.
다소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이 글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관상학’이라는 책에 쓴 내용이다. ‘몸은 영혼을 드러내는 표지(標識)’라는 믿음을 근거로 한 관상의 전통은 동양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뿌리가 깊다.
관상은 문명이 발생한 시기와 비슷한 때에 생겨났다. 기원전 2000년 메소포타미아 유적에선 ‘어깨에 곱슬곱슬한 털이 난 남자에게는 여자들이 따를 것이다’라는 식의 내용이 적힌 관상학 핸드북이 발견되기도 했다. 고대에는 자연현상을 인간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었기에 비정상적인 신체 특징이나 움직임에서 그 원인을 찾고 인간의 미래를 읽고자 했다. 이 시기에는 이처럼 어떤 일이 생긴 이유를 신체에 새겨진 운명 탓으로 돌리는 ‘예언적 관상’이 주를 이뤘다.
기원전 2000년 관상 핸드북 발견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생김새를 유형별로 나눠 인간의 성격을 해석하는 ‘분석적 관상’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관상은 종교나 신비적 성격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과학으로 자리잡아갔다. 타고난 신체가 성격을 말해주지만, 이러한 성격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인식도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과 닮은 동물의 대표적인 특질로 관상을 해석했다. ‘이마가 좁은 것은 돼지에서 보듯 멍청함을 나타내고, 사각으로 균형 잡힌 이마는 사자처럼 자존심이 강하다’는 식이다.
잠시 주춤하는 듯했던 예언적 관상학은 로마시대 들어 다시 힘을 얻었다. 이때는 정치와 관상이 결합했으며, 신의 뜻을 계시하는 점성학이 관상학에 영향을 끼쳤다. 로마시대 대표적 관상학자인 폴레몬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상학을 실생활과 연결해 나름의 체계를 만들어냈다. 관상에서 눈이 가장 중요하다는 개념도 그로부터 시작됐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황제의 관상을 신화화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서기 122년에 출간된 ‘황제전’은 로마의 폭군 칼리굴라(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외모 자체에서 호감을 주지 않는다고 묘사한 반면, 아우구스투스는 ‘균형 잡힌 골격을 갖고 있다’고 서술했다. 이는 권력을 잡고 있는 황제의 모습을 이상적인 관상에 일치시켜 대중에게 널리 알리려는 시도였다.
중세에는 여러 분야와 결합 친숙한 학문
한편 관상학은 수사학이나 웅변술과도 결합했다. 의학 분야에서는 ‘체질’과 결합해 겉모습으로 건강을 파악하는 또 다른 전통을 만들었다. “웅변가의 표정은 목소리 톤과 부합해야 한다. … 훈계를 할 때는 느린 제스처가 필요하다.” 키케로의 웅변술에서도 관상학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인체를 구성하는 4가지 체액이 기후와 풍토의 영향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해가 뜨는 쪽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색은 다른 지역보다 밝고 붉은색을 띠며, 목소리가 곱고 기질도 우수하다’는 식이었다.
중세에도 관상학은 학문의 한 분야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성서의 구절 가운데 관상학과 관련 있는 부분을 찾아내 하느님이 창조한 것으로 간주하는 방식으로 신학 안에서 재해석됐다. 그러다 보니 사람과 동물을 비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상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란 신의 모습을 본뜬 존재라 믿었으므로 인간을 동물에 비유하는 일이 금지됐던 것이다.
중세에는 예언적 관상학과 분석적 관상학이 결합했으며 점성술, 체질의학이 점차 가미되면서 관상학이 여러 계층에게 친숙한 학문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이 시기의 관상학은 엄격한 신분제를 중심으로 사회적 이동성이 낮은 상황을 반영했다는 특징이 있다. 몸은 정지되고 조각난 부분으로 파악됐으며, 전체적인 조화보다는 개별적이고 특징적인 부분이 부각됐다. 표정이나 행동보다는 고정된 생김새가 도덕적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활용됐다. 중세인은 머리나 피부 색깔이 도덕적 가치를 나타낸다고 믿었고, 어둡고 검은 것에 대해 차별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의 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고정된 생김새에서 표정과 동작으로 관심이 이동하고, 타고난 운명보다 자율적 의지가 더 중요해졌다. ‘관상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란 새로운 인식이 생겨났다. 이런 변화는 신분상승이 활발해진 사회 분위기와 일치한다. 이 시기에는 옷 밖으로 드러난 얼굴과 손이 관상의 중요한 대상으로 부각됐다.
17세기에는 손금을 보는 수상학이 관상학 중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당시 수상학 서적을 살펴보면 이 시기 사람들이 무엇을 궁금해했는지 알 수 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 반면, 질병에 맞서 싸워보려는 태도가 강하게 엿보인다. 또한 수상학 서적의 주요 독자가 남성이었기에,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선도 드러난다. 여성의 성격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고, 있다 해도 부정적이고 타락한 존재로 그려졌다.
기후변화, 경기침체, 혁명과 반란으로 혼란스럽던 17세기에 사람들은 사고나 재난보다 타인의 성격에 더 큰 두려움을 느꼈다. 르네상스 시기의 관상학은 적극적인 인간관계를 전제하고 있었지만, 이 시기에 들어서면 관상학 서적에 부정적이고 방어적인 내용이 훨씬 많이 나타난다. 예전부터 가까이 지내던 가족이나 친지마저 의심하며 적의 성향을 파악해야 했던 17세기의 후퇴한 사회상이 관상학에서 반영된 대목이라고 하겠다.
인종차별 종족주의 비극 초래도
18세기는 과학혁명의 영향으로 관상이 서양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난 시기다. 또 가발, 화장, 가면, 옷 등 몸을 가리는 다양한 도구가 시대를 풍미하면서 꾸미지 않은 외양을 읽어내는 관상이 발붙일 데가 없어졌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겉치레보다는 본질을 중시하는 경향이 떠오르고 스위스의 신학자이자 의사인 라바터(Lavater)의 저서 ‘관상학’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관상의 전성시대가 다시 시작됐다. 라바터는 생리학, 해부학, 동물학 등 당시에는 새로운 과학을 총망라해 관상학을 집대성했다. 라바터 이후 19세기에는 관상학과 결합한 골상학이 등장했다가 쇠퇴하는 과정을 겪었다.
제국주의와 인종주의 속에서 관상학은 유전학과 우생학에 영향을 끼치면서 엄청나게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나치의 인종차별주의는 서양의 오랜 관상학적 전통에 기반을 둔 신체적 종족주의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유대인은 열등 인종의 전형으로 정의된 반면 아리안 인종의 뛰어난 내적 자질은 출중한 외모를 통해 증명된다는 학설이 전파됐다. 나치에 동원된 학자들은 관상, 골상, 수상과 홍채에 대한 집중적인 차별담론을 생산했다.
과학적 합리주의로 뭉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서양도 관상을 통해 계층 간 차별과 다른 문명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해왔다. 그러나 사실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타인에 대한 판단을 돕는 관상은 인간의 본능적 행위에 가깝다고 하겠다. 과학과 미신은 시대에 따라 기준이 달라질 뿐이다. 관상은 동양이나 서양, 둘 중 한 곳의 고유한 문화현상이 아니다. 관상은 모든 문명에서 오랜 역사에 걸쳐 나타나는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관습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능에 기대 관상학이 휘둘러온 차별과 배타의 그림자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걷어내야 할 필요성 역시 모든 문명에 있다.
다소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이 글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관상학’이라는 책에 쓴 내용이다. ‘몸은 영혼을 드러내는 표지(標識)’라는 믿음을 근거로 한 관상의 전통은 동양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뿌리가 깊다.
관상은 문명이 발생한 시기와 비슷한 때에 생겨났다. 기원전 2000년 메소포타미아 유적에선 ‘어깨에 곱슬곱슬한 털이 난 남자에게는 여자들이 따를 것이다’라는 식의 내용이 적힌 관상학 핸드북이 발견되기도 했다. 고대에는 자연현상을 인간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었기에 비정상적인 신체 특징이나 움직임에서 그 원인을 찾고 인간의 미래를 읽고자 했다. 이 시기에는 이처럼 어떤 일이 생긴 이유를 신체에 새겨진 운명 탓으로 돌리는 ‘예언적 관상’이 주를 이뤘다.
기원전 2000년 관상 핸드북 발견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생김새를 유형별로 나눠 인간의 성격을 해석하는 ‘분석적 관상’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관상은 종교나 신비적 성격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과학으로 자리잡아갔다. 타고난 신체가 성격을 말해주지만, 이러한 성격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인식도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과 닮은 동물의 대표적인 특질로 관상을 해석했다. ‘이마가 좁은 것은 돼지에서 보듯 멍청함을 나타내고, 사각으로 균형 잡힌 이마는 사자처럼 자존심이 강하다’는 식이다.
잠시 주춤하는 듯했던 예언적 관상학은 로마시대 들어 다시 힘을 얻었다. 이때는 정치와 관상이 결합했으며, 신의 뜻을 계시하는 점성학이 관상학에 영향을 끼쳤다. 로마시대 대표적 관상학자인 폴레몬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상학을 실생활과 연결해 나름의 체계를 만들어냈다. 관상에서 눈이 가장 중요하다는 개념도 그로부터 시작됐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황제의 관상을 신화화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서기 122년에 출간된 ‘황제전’은 로마의 폭군 칼리굴라(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외모 자체에서 호감을 주지 않는다고 묘사한 반면, 아우구스투스는 ‘균형 잡힌 골격을 갖고 있다’고 서술했다. 이는 권력을 잡고 있는 황제의 모습을 이상적인 관상에 일치시켜 대중에게 널리 알리려는 시도였다.
중세에는 여러 분야와 결합 친숙한 학문
한편 관상학은 수사학이나 웅변술과도 결합했다. 의학 분야에서는 ‘체질’과 결합해 겉모습으로 건강을 파악하는 또 다른 전통을 만들었다. “웅변가의 표정은 목소리 톤과 부합해야 한다. … 훈계를 할 때는 느린 제스처가 필요하다.” 키케로의 웅변술에서도 관상학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인체를 구성하는 4가지 체액이 기후와 풍토의 영향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해가 뜨는 쪽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색은 다른 지역보다 밝고 붉은색을 띠며, 목소리가 곱고 기질도 우수하다’는 식이었다.
중세에도 관상학은 학문의 한 분야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성서의 구절 가운데 관상학과 관련 있는 부분을 찾아내 하느님이 창조한 것으로 간주하는 방식으로 신학 안에서 재해석됐다. 그러다 보니 사람과 동물을 비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상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란 신의 모습을 본뜬 존재라 믿었으므로 인간을 동물에 비유하는 일이 금지됐던 것이다.
중세에는 예언적 관상학과 분석적 관상학이 결합했으며 점성술, 체질의학이 점차 가미되면서 관상학이 여러 계층에게 친숙한 학문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이 시기의 관상학은 엄격한 신분제를 중심으로 사회적 이동성이 낮은 상황을 반영했다는 특징이 있다. 몸은 정지되고 조각난 부분으로 파악됐으며, 전체적인 조화보다는 개별적이고 특징적인 부분이 부각됐다. 표정이나 행동보다는 고정된 생김새가 도덕적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활용됐다. 중세인은 머리나 피부 색깔이 도덕적 가치를 나타낸다고 믿었고, 어둡고 검은 것에 대해 차별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의 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고정된 생김새에서 표정과 동작으로 관심이 이동하고, 타고난 운명보다 자율적 의지가 더 중요해졌다. ‘관상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란 새로운 인식이 생겨났다. 이런 변화는 신분상승이 활발해진 사회 분위기와 일치한다. 이 시기에는 옷 밖으로 드러난 얼굴과 손이 관상의 중요한 대상으로 부각됐다.
17세기에는 손금을 보는 수상학이 관상학 중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당시 수상학 서적을 살펴보면 이 시기 사람들이 무엇을 궁금해했는지 알 수 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 반면, 질병에 맞서 싸워보려는 태도가 강하게 엿보인다. 또한 수상학 서적의 주요 독자가 남성이었기에,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선도 드러난다. 여성의 성격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고, 있다 해도 부정적이고 타락한 존재로 그려졌다.
기후변화, 경기침체, 혁명과 반란으로 혼란스럽던 17세기에 사람들은 사고나 재난보다 타인의 성격에 더 큰 두려움을 느꼈다. 르네상스 시기의 관상학은 적극적인 인간관계를 전제하고 있었지만, 이 시기에 들어서면 관상학 서적에 부정적이고 방어적인 내용이 훨씬 많이 나타난다. 예전부터 가까이 지내던 가족이나 친지마저 의심하며 적의 성향을 파악해야 했던 17세기의 후퇴한 사회상이 관상학에서 반영된 대목이라고 하겠다.
인종차별 종족주의 비극 초래도
로마의 황제 칼리굴라(왼쪽)와 아우구스투스의 동상. 폭군 칼리굴라는 못생긴 인물로, 평화를 가져온 아우구스투스는 균형 잡힌 골격을 가진 신화적 인물로 묘사됐다.
제국주의와 인종주의 속에서 관상학은 유전학과 우생학에 영향을 끼치면서 엄청나게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나치의 인종차별주의는 서양의 오랜 관상학적 전통에 기반을 둔 신체적 종족주의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유대인은 열등 인종의 전형으로 정의된 반면 아리안 인종의 뛰어난 내적 자질은 출중한 외모를 통해 증명된다는 학설이 전파됐다. 나치에 동원된 학자들은 관상, 골상, 수상과 홍채에 대한 집중적인 차별담론을 생산했다.
과학적 합리주의로 뭉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서양도 관상을 통해 계층 간 차별과 다른 문명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해왔다. 그러나 사실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타인에 대한 판단을 돕는 관상은 인간의 본능적 행위에 가깝다고 하겠다. 과학과 미신은 시대에 따라 기준이 달라질 뿐이다. 관상은 동양이나 서양, 둘 중 한 곳의 고유한 문화현상이 아니다. 관상은 모든 문명에서 오랜 역사에 걸쳐 나타나는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관습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능에 기대 관상학이 휘둘러온 차별과 배타의 그림자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걷어내야 할 필요성 역시 모든 문명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