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0주년 기념 음반이 나온 너바나의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 ‘인 유테로(In Utero)’.
한 시대가 회고 대상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인간은 대부분 어느 정도 나이가 먹으면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감수성 충만하던 20대 초·중반에 즐겨 소비했던 문화를 평생 갖고 간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시간은 안 좋고 괴로웠던 감정을 거세하고, 좋고 즐거웠던 감정만 남긴다. 그렇게 기억이 추억으로 변했을 때 과거는 비로소 회고로 상품화된다. 그리고 돈 없던 청춘이 소비력을 갖춘 기성세대가 됐으니 경제적 토대도 갖췄다. 그 시간은 보통 20년이다. 너무 아득하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시간이다.
1990년대가 소비되는 양상은 이전 시대와는 좀 다르다. 70년대까지를 회고하는 드라마의 주제는 보통 가난이었다. 80년대를 대상으로 한 작품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민주화투쟁의 풍경이 들어간다. 그 가난과 투쟁의 시대를 거쳐 지금 우리가 있다는 식이다. 이제 명백한 과거 영역으로 들어간 90년대는 마냥 즐겁게 소환된다. 젝스키스와 H.O.T.의 대결을 즐기고, 연대 오빠들과 고대 오빠들의 농구 시합에 목숨을 건다. 가난과 이념 같은 것은 주요 변수가 아니다. 80년대까지의 음악이 감상과 음주합창의 방식으로 재현된다면, 90년대 음악은 술집에서 중년 남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추는 군무로 승화된다.
1980년대는 70년대보다, 90년대는 80년대보다 경제적, 대중문화적으로 발전하는 기간이었다. 70년대에는 가난을 끝냈고, 80년대에는 민주화를 이끌어냈다. 90년대는 그런 토대 위에서 펼쳐졌다. 건국 이래 가장 두텁게 형성된 중산층 자녀들은 공부만 어느 정도 하면 고민 없이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사교육 시장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어느 수준의 학교에만 들어가면 쉽게 과외 자리를 구할 수 있었고, 해외여행 자유 화로 방학이 되면 배낭여행을, 휴학하고 어학연수를 떠났다. 80년대까지의 청춘은 경험하지 못했던 신세계를 아무렇지 않게 누렸던 것이다.
젊음의 바이블이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과 너바나를 비롯한 얼터너티브 록의 물결은 ‘사회’가 아닌 ‘나’를 일상 화두로 이끌어냈다. 편의점의 등장은 심야가 취침 시간에서 소비 무대가 됐음을 말해주는 상징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로 상징되는 1990년대 음악은 라디오에서 TV로 그 주도권을 견인했다. 바야흐로 비디오 시대 그들의 안무와 의상은 역동성과 화려함에서 감히 소방차에 비견될 수준이 아니었다. 정치·사회적으로나 문화·경제적으로나 90년대만큼 그 전 10년과 스스로를 확실히 단절시킨 시기는 없었다.
지금은 그 풍요로웠던 1990년대의 연장선인가. 아니다. 2013년 한국 시스템의 시발점은 97년 외환위기였다. 중산층이 무너지고 양극화가 시작됐으며 종신고용 신화가 깨졌다. 청춘은 안전한 미래가 보장되던 신세대와 달리 ‘88만 원 세대’가 돼 엄청난 스펙을 쌓고도 졸업과 동시에 백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20대를 보내게 됐다. 요컨대 과거에 비해 나을 게 없는 현재가 된 것이다. ‘그때가 좋았지’라는 말이 그 시절을 살아간 사람이 아닌, 지금을 사는 사람의 언어가 된 것이다.
과거를 회고하는 드라마의 주요 시청자는 기성세대였다. 하지만 ‘응답하라’ 시리즈는 그들뿐 아니라 10대, 20대에게도 많은 인기를 누린다고 한다. 올해 대중음악계의 화두였던 ‘전설’의 컴백 역시 과거 팬뿐 아니라, 현 세대의 지지 없이는 큰 반응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현 시대에 대한 만족도, 혹은 행복지수가 형편없음을 말해주는 징후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계급이 완성돼 공부조차 신분 상승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아이돌 또는 스포츠스타가 되지 않고서는 자신의 계급을 넘어설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