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초 서울 잠실에서 콘서트를 연 조용필(왼쪽)과 이문세.
이문세와 조용필의 음악 인생은 겹치고 갈리는 부분이 있다. 1980년대 최성기를 누렸고, 음반시장 구조를 바꿔놨다는 게 공통점이다. 83년 4집을 기점으로 조용필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넘어 10대를 커버하기 시작했다. 팝 음반만 구매하던 젊은 층이 가요 앨범을 구매했다. 이 새로운 흐름에 쐐기를 박은 게 이문세다. 85, 87, 88년 발매한 3집부터 5집까지의 폭발적 히트는 음반시장에서 가요와 팝 비율을 5대 5로 바꿔놓았다. 50년생인 조용필이 음반시장 변란을 예고했고, 59년생인 이문세의 시대에 이르러 천하를 양분한 것이다.
다만 두 사람의 활동무대는 달랐다. 조용필은 TV의 황제였고, 이문세는 라디오의 지배자였다. 중국 창장(長江)과 황허(黃河)가 바다로 모이듯, 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전파를 거치지 않고 관객과 직접 만났다. 1987년을 끝으로 조용필은 연말 가수왕 수상 및 TV 출연을 거부한 채 무대로 향했다. 이문세 역시 생소하던 개념인 브랜드 공연 ‘동창회’를 98년부터 시작했다. 이 제목으로 10년간 300회 공연을 열어 관객 총 40만 명을 동원했다. 이후에도 ‘붉은 노을’ ‘옛사랑’ 같은 브랜드 공연을 계속했다. 그들은 그렇게 공연에서도 한국 대중음악 시장의 역사를 바꿔왔다.
올해로 각각 데뷔 45주년과 30주년을 맞는 조용필과 이문세의 2013년 6월 1일은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고 지금은 음악평론가라는 직함을 단 필자에겐 일종의 대회전(大會戰)처럼 느껴졌다.
혁신과 확장. 각각 조용필과 이문세의 이번 공연을 대표하는 키워드다. 조용필의 ‘헬로’ 콘서트는 지난 두 번의 공연에서 느꼈던 아쉬움을 처음부터 깨부쉈다. 관례 역시 극복했다. 멘트를 자제했고, 관객과 합창하는 곡들에서도 화면에 가사를 띄우지 않았다. 관객 1만 명이 당연히 모든 가사를 알 것이라는 자부심이었다. 이 자부심은 당연히 ‘헬로’의 음악적 도전과 성과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28곡 가운데 8곡이 ‘헬로’ 음반 수록곡이었다. 특히 최근 음악 트렌드와 가장 잘 맞닿은 ‘널 만나면’을 ‘단발머리’와 ‘고추잠자리’ 사이에 배치한 건 가히 신의 한 수였다. ‘헬로’가 지나치게 젊은 층에 맞춘 앨범이 아니냐는 비판에 대해 자기 음악은 원래 젊은 음악이라는 침묵의 선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게스트 없이, 자기 음악만으로, 스스로가 단독 주인공이 돼 끌고 가는, 그야말로 가장 록적인 시간이었다.
그간의 공연 중 최다 관객 앞에서 선보인 이문세의 공연 역시 입이 벌어지긴 마찬가지였다. 버라이어티의 정수였다고나 할까. 높이 30m, 너비 100m의 무대는 ‘대한민국 이문세’를 상징하는 스케일이었다. 이 거대한 스케일은 총 700명에 달하는 스태프와 출연진에 의해 메워졌다. 공연장 전체를 커버하는 온갖 특수장치와 뮤지컬, 마임, 스포츠댄스 등 음악 외적인 요소들을 음악적으로 소화해내는 디테일은 10여 년간 관람한 어떤 한국 가수의 공연에서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경지다. 수많은 브랜드 공연을 해오면서 쌓은 시도와 노하우를 한국 최대 공연장에서 불꽃놀이처럼 쏘아올린 것이다.
공연 제목을 ‘헬로’로 정한 조용필, 신곡 ‘땡큐’를 이날 발표한 이문세. 현재 정상의 인기를 누리는 가수 가운데 이런 스케일의 공연을 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몇몇이 떠올랐다. 데뷔 45주년과 30년을 맞을 때도 그럴 수 있는 가수는 누가 있을까. 그중 몇이 추려졌다. 3시간 남짓한 공연을 오직 자신의 히트곡으로만 채울 수 있는 가수는 누굴까. 아무도 생각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