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3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내 올림픽홀에서 열린 조용필의 신곡 발표회.
조용필 19집 ‘헬로’는 세상에 알려지는 방식부터 기존과는 완전히 달랐다. 대규모 공연을 개최할 때마다 기자회견을 하던 관례를 벗어던지고,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스페셜 페이지를 개설한 뒤 앨범의 티저영상과 신곡 ‘바운스’를 공개했다. 아이돌이나 쓰는 컴백 방식을 60세가 넘은 가수가 시도한 것이다.
‘바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용필이 새 앨범을 준비 중이라는 말을 알음알음 들었을 때 생각했다. ‘이제 그랬으면 좋겠네’나 ‘고독한 러너’로 대표되는, 1990년대 이후 그가 들려줬던 어덜트 컨템퍼러리 성향의 노래들이 주를 이룰 것이라고. 혹은 지난 앨범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에서 시도했듯이, 일반 ‘가요’를 넘어서는 좀 더 웅장하고 예술지향적인 음악들이 될 거라고.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헬로’는 지금까지의 업적으로도 이미 찬란한 금자탑 위에 앉은 가왕이 몸을 날려 동시대 대중음악 위에 연착륙한 앨범이다. 모던 록, 일렉트로니카 같은 현재 음악을 그는 무리 없이 소화해냈다. 트렌드를 억지로 좇는 물리적 이식이 아닌, 트로트부터 오페라에 이르는 그의 광대한 음악세계에 ‘지금 이곳’을 더하는 화학적 흡수다. 몇몇 뮤지션이 시도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던 꿈을 그는 최초로 성공시킨 것이다.
돌이켜보면 조용필의 역사는 ‘최초’의 역사이기도 하다. 1991년 국내 최초로 단일 앨범 100만 장 돌파라는 공식 기록을 세웠으며, 94년에는 역시 국내 최초로 음반 총판매량 1000만 장을 돌파했다.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임은 물론이다. ‘친구여’는 99년 대중음악 최초로 음악 교과서에 수록됐다. 2003년 열린 35주년 기념공연 ‘더 히스토리’는 관객 5만 명을 동원한 한국 최초의 공연이었다.
신곡을 내놓기만 하면 차트 1위는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당시를 대표하던 가요 순위 프로그램 ‘가요톱텐’은 그래서 조용필의 독식을 막으려고 5주 연속 1위를 하면 순위에서 빠져야 하는 골든컵이라는 제도를 내놓았다. 매년 각 방송국의 가수왕 타이틀을 휩쓸었다. 더는 국내에서, 당시 시장에서 이룰 수 있는 게 없었다.
1987년 가수왕 타이틀을 획득한 것을 끝으로 그는 더는 방송국 연말 가요제 수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움직였다. 아직 개척하지 않은 현장, 바로 해외와 공연장이었다. 1990년대 초 케이팝(K-pop)은커녕 한류라는 말도 없을 때 조용필은 이미 일본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30회 이상 리메이크되며 일본 기네스북에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외국 가수 노래’로 기록됐다. 1987년부터 90년까지 NHK 홍백가합전에 연속 출전했다는 사실은 당시 그의 일본 내 인기를 알려주는 아주 작은 데이터다.
그가 방송 대신 공연장을 택했을 때 한국의 공연 문화는 척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체육관의 음향시설은 형편없었고, 서울 세종문화회관이 대중음악인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 건 당연했다. 그런 상황에서 조용필은 단순히 히트곡을 부르는 리사이틀을 연출과 퍼포먼스를 결합한 콘서트로 전환했고, 스타디움 공연을 시도했다. 그리고 성공시켰다. 성공을 보장하던 국내 방송에서 뛰쳐나와,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데뷔 45년 차의 이 가수에게 ‘가왕’이란 칭호가 어색하지 않은 것 또한 바로 그 때문이다. 안주하지 않음으로써, 연연하지 않음으로써, 돌아보지 않음으로써 그는 영원한 개척의 삶을 살아올 수 있었다. 열아홉 번째 앨범인 ‘헬로’는 그런 개척의 45년을 잇는 또 하나의 정류장일 테고. 가왕의 종점은 대체 어디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