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 되면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다. 시인은 4월을 이르러 잔인한 달이라고 했지만,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잔인한 달은 11월이다. 1987년, 1990년, 그리고 2010년. 뮤지션 3명이 11월 우리 곁을 떠났다. 요절이란 말이 어색하지 않을 너무 이른 나이에. 유재하와 김현식, 그리고 이진원(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 그들이다.
올해 11월 1일은 유재하가 세상을 떠난 지 꼭 25년이 되는 날이었다. 유재하는 한국 대중음악사의 한 지점을 차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다. 조용필의 위대한 탄생, 김현식의 봄여름가을겨울에서 키보디스트로 몸담으면서 곡을 썼던 그가 남긴 유일한 솔로앨범은 한국 대중음악계가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생전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사랑하기 때문에’는 조용필 7집, ‘가리워진 길’은 김현식 3집에 각각 수록됐지만, 최고 보컬리스트로 손꼽히는 이 두 사람도 블루스, 컨트리, 혹은 ‘뽕끼’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감수성의 노래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발라드는 단조여야 한다는 관습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 스스로 앨범을 냈지만 방송국 PD들은 “노래를 못한다” “곡이 이상하다” 등의 이유로 노래를 틀지 않았다. 가요계에서 만만찮은 경력을 쌓았음에도 생전에 그가 출연한 방송 프로그램은 ‘젊음의 행진’ 단 한 번뿐이다.
자신의 앨범 작업에 연주자로 참여한 바이올리니스트 여자친구와 함께 유학을 결심한 어느 날, 유재하는 비운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그의 앨범에서 코러스를 맡았던 이문세가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그의 노래를 자주 내보내면서 새로운 세대의 음악팬들이 유재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유희열, 루시드폴, 고찬용, 이한철 등은 유재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이들로, 유재하를 기리려고 만든 ‘유재하 가요제’ 출신이기도 하다. 이들은 유재하가 만들어놓은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감성을 받아 안은 뒤 각자 자기 방식대로 발전시켰다. 유재하의 솔로앨범 ‘사랑하기 때문에’에는 노래 8곡이 실렸다. 그 8곡으로 유재하는 한국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새로운 감수성, 수컷의 절규
유재하가 비명에 간 지 3년 만에 김현식이 투병 끝에 세상을 떴다. 그가 남긴 정규앨범 5장과 ‘내 사랑 내 곁에’가 담긴 유작앨범을 가만히 듣노라면, 그때는 몰랐던 어떤 흐름이 느껴진다. 디스코그래피에 인생 기승전결이 담겼다. 운명을 거스르지 않고 부침과 파멸을 고스란히 목소리로 그려낸, 한 가객의 짧고 굵은 드라마인 것이다. 1980년 발매한, 그러나 시장에서 참패를 맛본 1집 첫 곡이 ‘봄여름가을겨울’이다. 이 노래에서 스물세 살 김현식은 지금 그 나이 대 보컬리스트들과 비교할 수 없는 원숙한 창법을 구사한다. 패기와 기교가 미성과 샤우팅을 넘나들면서 괴물 보컬리스트가 나타났음을 선언한다.
언더그라운드 시절 그가 주로 활동했던 곳은 이태원이다. 당시 이태원을 주름잡은 두 보컬리스트가 있었으니, 김현식과 전인권이다. 라이벌 의식을 지녔던 탓에 두 사람은 각자 공연이 끝나면 서로의 공연을 보러 다니곤 했다. 두 사람의 기량이 절정이던 1980년대 중반 레코딩을 보면 과연 그들이 느꼈을 경쟁의식이 어땠을지 짐작된다. 전인권은 들국화 데뷔 앨범, 김현식은 생전 최대 히트곡이었던 ‘비처럼 음악처럼’이 담긴 3집을 남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즈음 김현식은 술과 대마초로 몸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비처럼 음악처럼’ 이후 4년, 그는 의사로부터 “술을 한 방울이라도 마시면 죽는다”는 최후통첩을 받는다. 그리고 5집 앨범을 내놨다. 한국 대중음악사상 가장 처절한 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넋두리’는 앨범의 백미다. 절정부에서 갈라지는 그의 성대는 파괴를 하나의 숙명으로 받아들인 남자의 목소리다. 갈 날이 머지않았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수컷의 절규다. ‘비처럼 음악처럼’에서의 애수 따위는 진작에 내팽개친, 이 망가진 사내는 결국 ‘내 사랑 내 곁에’를 유언처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봄여름가을겨울’에서부터 ‘내 사랑 내 곁에’까지, 성대의 부침이 고스란히 담긴 김현식이라는 ‘책’은 서장과 종장을 완벽하게 갖췄다. 그 종장을 읽은 우리는 매년 11월이면 그를 추모하지 않을 수 없다.
유재하와 김현식이 한 명의 애호가, 그리고 한국 대중음악계 한구석에 숟가락을 얹은 이가 마음에 품은 추모의 대상이라면, 이진원은 개인적으로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2010년 10월 말 이진원은 혼자 살던 집에서 쓰러졌다. 그리고 며칠 후 발견됐다. 병원으로 옮겼을 때는 이미 소생 가능성이 희박했고, 결국 요절했다. 향년 38세. 2010년 11월 5일이 그의 기일이다. ‘스끼다시 내 인생’ ‘나는 행운아’ 같은, 변두리 인생을 대변하는 노래를 주로 불렀기에 그를 아는 많은 사람이 그의 때 이른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죽은 자에 대한 예의
그는 나의 학교 선배였다. 학교 다닐 때는 잘 몰랐지만, 내가 막 평론가 타이틀을 달고 활동하기 시작했을 무렵 어느 술자리에서 인사를 나눴다. 그 후로도 친하게 지낸 건 아니다. 나는 평론가로서 경력을 쌓고, 그는 꾸준히 앨범을 냈다. 이진원의 성격은 좋게 말하면 호쾌하고, 나쁘게 말하면 지나치게 직설적이었다.
어느 술자리에서 그가 말했다. “야, 넌 왜 내 앨범 리뷰 안 쓰냐?” 장난으로 받아넘기기에는 그도 나도 너무 취해 있었다. 듣고 보니 좀 불쾌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꽤 직설적인 사람이었다. 호불호가 강하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 농으로 넘길 수만은 없었다. ‘내가 듣는 모든 음반에 대해 리뷰를 써야 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는 반발심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평론가가 뮤지션과 그런 문제로 얼굴 붉히며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더군다나 학교 선배기도 해서 돌려 말했다. “형 노래는 가사가 곧 음악이라 거기에 보탤 말이 없소.”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진심을 말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음악에도 결점이 있었고, 내게는 그 결점이 장점만큼 크게 보였다. 앨범에 담을 수 있는 곡이 한정되어 있으니 장점이 많은 음악을 선택하는 게 낫지 않겠나. 이런 속마음을 다 풀어놓을 수 없어 한 말이었다. 그런 생각 끝에 한 마디 더했다. “그래도 언젠가 내가 이때다 싶으면 꼭 리뷰 쓸게. 깠다고 나중에 화나 내지 말고.” 그가 맞받아쳤다. “너, 약속이다?” 우리는 술잔을 부딪쳤다.
그 약속을 지키기도 전에 이진원은 먼 길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을 치르기 직전, 한 일간지로부터 부고기사 청탁을 받았다. 그것이 내가 매체에 쓴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에 관한 첫 글이었다. 그 후 그의 유고집 ‘행운아’에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음악론을 썼다. 정성 들여 썼지만, 그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2주기를 맞아 그의 유작 앨범 ‘너클볼 콤플렉스’가 나왔다. 그의 하드디스크에 담긴 미발표 곡들을 유족이 발굴하고, 함께 밴드를 했던 동료가 손을 봐서 내놓았다. 노래 5곡과 연주곡 2곡을 담은 ‘너클볼 콤플렉스’는 염세와 비관에서 벗어나 희망을 그렸다. 서정적인 트랙도 여느 앨범보다 많은 편이다. 그가 이 노래들을 어떤 시기에 썼는지는 알 수 없다. 진작 썼으나 발표하지 않고 하드디스크에 보관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의 앨범을 들으면 담배를 피워 물게 된다. 발인 날 아침, 거리를 노랗게 물들였던 은행잎이 떠오른다. 올해도 11월 은행잎은 노랗다. 지금 내가 지난 세대의 뮤지션이었던 유재하와 김현식을 추모하듯, 다음 세대 평론가들이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유작을 들으며 그를 추모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것이야말로, 간 자에 대한 산 자의 예의일 테니까.
올해 11월 1일은 유재하가 세상을 떠난 지 꼭 25년이 되는 날이었다. 유재하는 한국 대중음악사의 한 지점을 차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다. 조용필의 위대한 탄생, 김현식의 봄여름가을겨울에서 키보디스트로 몸담으면서 곡을 썼던 그가 남긴 유일한 솔로앨범은 한국 대중음악계가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생전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사랑하기 때문에’는 조용필 7집, ‘가리워진 길’은 김현식 3집에 각각 수록됐지만, 최고 보컬리스트로 손꼽히는 이 두 사람도 블루스, 컨트리, 혹은 ‘뽕끼’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감수성의 노래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발라드는 단조여야 한다는 관습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 스스로 앨범을 냈지만 방송국 PD들은 “노래를 못한다” “곡이 이상하다” 등의 이유로 노래를 틀지 않았다. 가요계에서 만만찮은 경력을 쌓았음에도 생전에 그가 출연한 방송 프로그램은 ‘젊음의 행진’ 단 한 번뿐이다.
자신의 앨범 작업에 연주자로 참여한 바이올리니스트 여자친구와 함께 유학을 결심한 어느 날, 유재하는 비운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그의 앨범에서 코러스를 맡았던 이문세가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그의 노래를 자주 내보내면서 새로운 세대의 음악팬들이 유재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유희열, 루시드폴, 고찬용, 이한철 등은 유재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이들로, 유재하를 기리려고 만든 ‘유재하 가요제’ 출신이기도 하다. 이들은 유재하가 만들어놓은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감성을 받아 안은 뒤 각자 자기 방식대로 발전시켰다. 유재하의 솔로앨범 ‘사랑하기 때문에’에는 노래 8곡이 실렸다. 그 8곡으로 유재하는 한국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새로운 감수성, 수컷의 절규
유재하가 비명에 간 지 3년 만에 김현식이 투병 끝에 세상을 떴다. 그가 남긴 정규앨범 5장과 ‘내 사랑 내 곁에’가 담긴 유작앨범을 가만히 듣노라면, 그때는 몰랐던 어떤 흐름이 느껴진다. 디스코그래피에 인생 기승전결이 담겼다. 운명을 거스르지 않고 부침과 파멸을 고스란히 목소리로 그려낸, 한 가객의 짧고 굵은 드라마인 것이다. 1980년 발매한, 그러나 시장에서 참패를 맛본 1집 첫 곡이 ‘봄여름가을겨울’이다. 이 노래에서 스물세 살 김현식은 지금 그 나이 대 보컬리스트들과 비교할 수 없는 원숙한 창법을 구사한다. 패기와 기교가 미성과 샤우팅을 넘나들면서 괴물 보컬리스트가 나타났음을 선언한다.
언더그라운드 시절 그가 주로 활동했던 곳은 이태원이다. 당시 이태원을 주름잡은 두 보컬리스트가 있었으니, 김현식과 전인권이다. 라이벌 의식을 지녔던 탓에 두 사람은 각자 공연이 끝나면 서로의 공연을 보러 다니곤 했다. 두 사람의 기량이 절정이던 1980년대 중반 레코딩을 보면 과연 그들이 느꼈을 경쟁의식이 어땠을지 짐작된다. 전인권은 들국화 데뷔 앨범, 김현식은 생전 최대 히트곡이었던 ‘비처럼 음악처럼’이 담긴 3집을 남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즈음 김현식은 술과 대마초로 몸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비처럼 음악처럼’ 이후 4년, 그는 의사로부터 “술을 한 방울이라도 마시면 죽는다”는 최후통첩을 받는다. 그리고 5집 앨범을 내놨다. 한국 대중음악사상 가장 처절한 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넋두리’는 앨범의 백미다. 절정부에서 갈라지는 그의 성대는 파괴를 하나의 숙명으로 받아들인 남자의 목소리다. 갈 날이 머지않았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수컷의 절규다. ‘비처럼 음악처럼’에서의 애수 따위는 진작에 내팽개친, 이 망가진 사내는 결국 ‘내 사랑 내 곁에’를 유언처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봄여름가을겨울’에서부터 ‘내 사랑 내 곁에’까지, 성대의 부침이 고스란히 담긴 김현식이라는 ‘책’은 서장과 종장을 완벽하게 갖췄다. 그 종장을 읽은 우리는 매년 11월이면 그를 추모하지 않을 수 없다.
유재하와 김현식이 한 명의 애호가, 그리고 한국 대중음악계 한구석에 숟가락을 얹은 이가 마음에 품은 추모의 대상이라면, 이진원은 개인적으로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2010년 10월 말 이진원은 혼자 살던 집에서 쓰러졌다. 그리고 며칠 후 발견됐다. 병원으로 옮겼을 때는 이미 소생 가능성이 희박했고, 결국 요절했다. 향년 38세. 2010년 11월 5일이 그의 기일이다. ‘스끼다시 내 인생’ ‘나는 행운아’ 같은, 변두리 인생을 대변하는 노래를 주로 불렀기에 그를 아는 많은 사람이 그의 때 이른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죽은 자에 대한 예의
2010년 유명을 달리한 이진원의 생전 모습(오른쪽)과 최근 발매한 유작앨범 재킷 속 이미지.
어느 술자리에서 그가 말했다. “야, 넌 왜 내 앨범 리뷰 안 쓰냐?” 장난으로 받아넘기기에는 그도 나도 너무 취해 있었다. 듣고 보니 좀 불쾌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꽤 직설적인 사람이었다. 호불호가 강하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 농으로 넘길 수만은 없었다. ‘내가 듣는 모든 음반에 대해 리뷰를 써야 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는 반발심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평론가가 뮤지션과 그런 문제로 얼굴 붉히며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더군다나 학교 선배기도 해서 돌려 말했다. “형 노래는 가사가 곧 음악이라 거기에 보탤 말이 없소.”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진심을 말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음악에도 결점이 있었고, 내게는 그 결점이 장점만큼 크게 보였다. 앨범에 담을 수 있는 곡이 한정되어 있으니 장점이 많은 음악을 선택하는 게 낫지 않겠나. 이런 속마음을 다 풀어놓을 수 없어 한 말이었다. 그런 생각 끝에 한 마디 더했다. “그래도 언젠가 내가 이때다 싶으면 꼭 리뷰 쓸게. 깠다고 나중에 화나 내지 말고.” 그가 맞받아쳤다. “너, 약속이다?” 우리는 술잔을 부딪쳤다.
그 약속을 지키기도 전에 이진원은 먼 길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을 치르기 직전, 한 일간지로부터 부고기사 청탁을 받았다. 그것이 내가 매체에 쓴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에 관한 첫 글이었다. 그 후 그의 유고집 ‘행운아’에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음악론을 썼다. 정성 들여 썼지만, 그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2주기를 맞아 그의 유작 앨범 ‘너클볼 콤플렉스’가 나왔다. 그의 하드디스크에 담긴 미발표 곡들을 유족이 발굴하고, 함께 밴드를 했던 동료가 손을 봐서 내놓았다. 노래 5곡과 연주곡 2곡을 담은 ‘너클볼 콤플렉스’는 염세와 비관에서 벗어나 희망을 그렸다. 서정적인 트랙도 여느 앨범보다 많은 편이다. 그가 이 노래들을 어떤 시기에 썼는지는 알 수 없다. 진작 썼으나 발표하지 않고 하드디스크에 보관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의 앨범을 들으면 담배를 피워 물게 된다. 발인 날 아침, 거리를 노랗게 물들였던 은행잎이 떠오른다. 올해도 11월 은행잎은 노랗다. 지금 내가 지난 세대의 뮤지션이었던 유재하와 김현식을 추모하듯, 다음 세대 평론가들이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유작을 들으며 그를 추모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것이야말로, 간 자에 대한 산 자의 예의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