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싸이.
다음 날 ‘강남스타일’은 아이튠즈 뮤직비디오 차트 1위에 올랐다. 2위가 저스틴 비버, 3위가 케이티 페리임을 감안하면 싸이는 현재 미국을 대표하는 남녀 팝스타를 제치고 정상에 등극한 셈이다. LA 다저스타디움 이벤트는 저스틴 비버 측의 요청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싸이가 아이튠즈 차트 1위에 오르자 케이티 페리는 트위터에 자신도 싸이 팬임을 밝혔다. 한국 가수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성공, 어떤 한국 노래도 이뤄내지 못한 신드롬을 싸이와 ‘강남스타일’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강남스타일’ 신드롬은 그동안의 한류와 모든 면에서 다르다. 아이돌을 중심으로 한 케이팝(K-pop) 성공은 아시아에서 출발해 서양으로 확산됐다. 그 확산의 중심엔 일본 시장이 있다. 망가, 아니메라는 일본식 조어를 유럽에서도 그대로 사용할 만큼 유럽의 일본 대중문화 수요는 탄탄하다. 인기 만화 ‘나루토’가 몇 년째 프랑스 만화 차트 1위 자리를 내놓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걸그룹이 일본 시장에서 약진하기 시작했다. 일본 가요계가 AKB48, 퍼퓸 정도를 제외하고 ‘대세’에 오를 만한 걸그룹을 내놓지 못한 상황에서 한국 걸그룹이 그 공백을 메운 것이다. 일본 시장을 탐색하는 서구의 일본 대중문화 팬들이 이를 포착했고, 부지런히 유튜브를 검색해 한국 아이돌의 열성팬이 됐다. 케이팝은 이렇게 세계로 알려졌다.
그러나 거기엔 한계가 있었다. 케이팝은 일본 대중문화 마니아를 기초로 한 서브 시장이지, 일반 대중에게까지 한국 아이돌 이름이나 노래가 폭넓게 알려지지는 않은 것이다. 실제로 해외 음악 서비스 사이트에서 케이팝을 청취한 사용자는 대부분 일본 애니메이션 주제곡이나 다른 일본 가수 음악을 함께 듣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인기 바로미터인 차트에서도 별다른 성과가 없고, 영향력 있는 음악계 인사들이 한국 아이돌을 직접 언급하면서 문화적 영향력을 인정한 경우도 없다. 그래서 ‘한류 마케팅’이 몇몇 연예기획사의 주가를 올리기 위한 수단이 아니냐는 비아냥거림도 들린다.
‘강남스타일’ 패러디 영상 봇물
반면 ‘강남스타일’의 인기는 일본을 거치지 않고 미국에서 시작해 세계로 퍼졌다. 7월 중순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가 유튜브에 올라왔을 때, 싸이가 데뷔한 2000년대 초반의 키치적 정서를 전면에 내세운 영상이 눈길을 끌었다. 이 뮤직비디오를 그룹 2NE1 산다라박의 외국인 팬이 자기 트위터에 링크하면서 해외 네티즌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확산됐다. 그러다 세계 음악계 거물들 눈에까지 든 것이다. 7월 말 저스틴 비버를 발굴한 스쿠터 브라운을 시작으로, 8월 1일에는 힙합 가수 티패인이 자기 트위터에 ‘Oppa GANGNAM style!’이라는 글을 남겼다(이 트위트는 7323회 리트위트됐다.)
영국 가수 로비 윌리엄스 역시 자기 블로그에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를 링크했다.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 ‘강남스타일’ 패러디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리투아니아 어느 마을의 동네 주민이 아침마다 ‘강남스타일’에 맞춰 체조하는 동영상이 올라오고, 러시아 젊은이들이 단체로 말춤을 추는 동영상도 있었다. 오케스트라 버전도 등장했다. 결국 ‘강남스타일’은 유튜브 조회 수 4000만 회(8월 20일 기준)를 기록하며 유튜브 전체 차트 3위, 인기 동영상 순위 1위에 올랐다. 한류 대명사인 소녀시대의 ‘Oh Boy’가 현재 조회 수 5450만 회 정도인데 두 노래의 발표 시기, 소녀시대와 싸이의 해외 인지도, 홍보 시스템을 감안하면 ‘강남스타일’의 인기가 압도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강남스타일’ 신드롬을 견인한 요소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재미’다. 아이돌의 늘씬한 미모와는 거리가 먼, 제법 덩치 큰 동양 남자가 온몸을 흔들며 요란하게 춤을 춘다. 멋있어 보이려는 가식 같은 건 없다. 인천 지하철, 황량한 송도국제도시, 지하주차장이 춤을 추는 배경이다. 음악 역시 단순한 루프에 인상적인 후크의 반복이다. 트렌드를 선도하는 음악의 뮤직비디오와는 180° 다르다. 영미권 아티스트가 내놓는 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상미나 뮤직비디오 아트와도 거리가 멀다. ‘강남스타일’은 주류 감성에서 동떨어진 B급 문화 코드를 듬뿍 담고 있는 것이다.
로컬 아이디어로 글로벌 성취 가능
이러한 감성은 인터넷에서 종종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2005년 집 뒷마당에서 멤버들이 재미있는 춤을 추는 뮤직비디오로 화제가 됐던 미국 밴드 오케이 고(OK GO)는 이런 발상이 유튜브 시대에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임을 예고한 첫 사례다. 재미를 찾아 웹을 헤매고 커뮤니티까지 만드는 누리꾼에게 유머 코드를 갖춘 뮤직비디오의 힘은 국적을 무력화한다는 것을 ‘강남스타일’이 다시 한 번 입증했다.
그 유머를 완성하는 것은 ‘쓸데없는 고퀄리티’라고 부르는 지금의 하위문화 흐름이다. 미국 인기 토크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의 고정 출연진으로 구성한 론리 아일랜드 노래가 대표적이다. 저스틴 팀버레이크, 마이클 볼튼, 내털리 포트먼 같은 톱스타가 기꺼이 망가지면서 피처링한 그들 음악은 멜로디나 편곡 등 음악적 완성도 면에서 여느 기성 음악에 뒤지지 않는다. 다만 가사와 뮤직비디오가 ‘19금(禁) 개그’로 점철돼 있는데, 그 점이 오히려 호응도를 높인다. 한국에서도 개그맨 유세윤이 만든 UV가 이런 ‘쓸데없는 고퀄리티’를 통한, 음악과 웃음의 결합을 보여준 바 있다.
싸이 역시 마찬가지다.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는 일렉트로닉 사운드, 누가 들어도 중독될 만한 후크 등 완성도 높은 음악적 요소가 얼핏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영상, 안무와 결합해 지금의 인터넷 하위문화에 합류한 것이다. 요컨대 B급 문화로 시각화한 A급 트렌디 뮤직, 이것이 ‘강남스타일’ 신드롬을 견인했다.
하나 더, 20세기 중반 이후 많은 비영어권 음악이 영어문화권에서 인기를 끌었다. 1950년대 브라질 보사노바, 70년대 자메이카 레게, 그리고 2000년대에는 쿠바의 잊힌 가수들이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다. 대부분은 영어문화권 음악 관계자가 발굴해 미국으로 ‘수입’한 경우다. 주앙 지우베르투에게는 스탠 게츠가 있었고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성공은 빔 벤더스와 라이 쿠더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싸이에게는 그런 ‘키다리 아저씨’가 없다. 물론 스쿠터 브라운, 티패인 등 음악계 유력 인사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지원 사격이 있었지만 그뿐이다. 사명감이나 이익, 혹은 비즈니스를 고려하지 않고 그저 재미로 트위트한 것이다.
그 재미가 싸이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우리가 ‘구매’가 아닌 ‘클릭’으로 인기 데이터베이스를 만드는 시대를 살기 때문일 것이다. ‘강남스타일’의 인기가 싸이라는 가수의 본격적인 미국 진출로 이어질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대중문화야말로 가장 ‘로컬’한 아이디어로 ‘글로벌’한 성과를 이뤄낼 수 있음을 ‘강남스타일’이 증명해보인 것은 분명하다. ‘강남스타일’은 ‘글로컬’의 성취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