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 기행’은 와인에 대한 천편일률적 지식이나 이론 혹은 까다로운 예법을 따지는 기존 와인 이야기와는 다르다. 호주의 유명 와인 산지를 직접 찾아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그들의 인생과 와인 이야기를 담았다. 전직이 판사, 의사, 신문기자, 화가, 항공기 조종사, 철학 교수인 양조장 주인으로부터 포도농장을 하게 된 동기, 그리고 와인에 대한 독특한 인생철학과 애환, 사랑 이야기를 직접 듣고 채록했다.
헌터밸리에서 가장 유명한 포도원인 레이크스 폴리 와이너리를 창업한 맥스 레이크는 저명한 외과전문의로 평일에는 시드니에서 환자를 돌보고, 주말이면 헌터밸리로 달려가 포도밭에 묻혀 살았다. 나중에는 그것도 성에 안 찼는지 아예 병원을 폐업하고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에만 매달렸다. 그렇게 와인에 미쳐 한평생을 살다 2009년 남반구가 가을로 접어드는 4월, 시드니 부촌 롱그빌에 있는 자택에서 84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흰색 요트가 수련처럼 떠 있는 시드니만과 낭창낭창한 여인의 허리선을 닮은 레인코브 강물이 한눈에 들어오는 그의 거실. 푹신한 소파 옆 탁자에는 마시다 만 크리스털 와인잔이 놓여 있었다. 그는 세상과 작별하는 순간에도 와인을 마셨던 것이다.
“최고의 와인을 찾아다니면서 맛보고 즐기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와인을 창조하라.”
레이크가 남긴 말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죽기 전에 마셨던 와인도 레이크스 폴리 와이너리 것이 아닌, 2004년산 프랑스 본 로마네(Vosne Romane´e)였다. 훌륭한 와인을 찾아 맛보되, 그것은 새로운 와인을 창조하기 위한 과정이자 노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는 결코 남의 양조법을 흉내 내거나 다른 와이너리의 와인 맛을 모방하지 않았다. 그는 호주 와인산업의 창시자이자 리더였다. 아울러 고품질 와인을 소량 생산하는 부티크 와이너리를 처음으로 호주에 도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부티크 와인은 대량 생산 와인에 비해 와인메이커의 개성과 취향이 강하게 드러나며, 제조 비법이 집안 대대로 전수돼온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까다로운 맛과 희소성을 찾는 고객에게 인기가 높다.
역사야말로 가장 위대한 스승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레이크. 그의 와인제조 창고는 아직도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투박하지만 곳곳에 당당한 전통이 스며 있다. 녹이 슨 수도꼭지와 손때 묻은 개수통, 힘깨나 쓰는 사람이 매달려야 할 무지막지한 압착기가 눈에 들어왔다.
와인은 살아 숨 쉬는 생명체
레이크스 폴리 와이너리를 오랜만에 찾아 레이크에 대한 얘기를 듣노라니 그가 만든 와인을 먹고 싶다는 욕망이 끓어올랐다. 레이크 밑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피터에게 와이너리 역사를 길게 듣고 있는데도 아침나절이라 그런지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동안 여러 곳을 찾아다녔지만 처음으로 느껴보는 호젓한 분위기. 처마 밑에서 왕거미 한 마리가 유유자적 줄을 타고 내려왔다.
때마침 열어놓은 창문으로 봄바람이 수선화 향을 가득 물어왔다. 바삭바삭 부서지는 햇빛을 받아가며 노랑나비 한 마리가 창고 앞으로 툭하고 나타났다. 나비는 민들레가 지천으로 핀 언덕으로 서툰 날갯짓을 하며 나풀나풀 날아갔다. 어설프지만 자연 어디에선가 또 하나의 생명이 탄생했다는 증거이리라. 그런데 이어지는 피터의 말을 들으니 생명의 신비는 처마 밑이나 찬연한 햇빛이 쏟아지는 민들레 들판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두컴컴한 지하창고에도 생명은 오도카니 둥지를 틀고 있었다.
“사실 와인은 공장에서 병에 담아 내오는 청량음료와는 달라요. 살아 숨 쉬죠. 그래서 열을 가해 만든 증류주인 위스키와 크게 달라요. 와인은 살아 숨 쉬며 인간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생명체라는 얘기예요. 이른 새벽, 안개와 이슬에 바짓가랑이를 적셔가며 풀밭을 지나 마당을 가로질러 와인창고로 다가가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쿵쾅거리는 걸 느껴요. 마치 애인이 잠들어 있는 침실 창으로 다가가는 기분이죠. 드르륵 문을 열고 와인창고에 들어서면 저 오크통에 든 와인들이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며 내게 찰랑찰랑 말을 걸어와요. 그럼 나도 맞장구를 치죠. ‘내가 너무 일찍 깨운 건 아닌가’라는 말로 시작해 ‘지난밤 너무 덥거나 춥지는 않았나’ ‘간밤에 비가 온 것 같던데 잠자리가 축축하진 않았나’ ‘바람이 잘 통하라고 들창을 활짝 열어놓았는데 그리로 혹시 다람쥐가 드나들며 잠을 방해하진 않았나’….”
‘작고 단순한 아름다움을 향해…’
태어나서 한 번도 헌터밸리를 떠나본 적 없는 피터라서 그런지 그의 말이 더 구수하고 정감 있게 다가왔다. 와인에 대한 그의 철학과 사랑이 말에 오롯이 녹아 있었다. 그는 “와인 맛을 좌우하는 것은 무엇보다 포도”라면서 “사실 와인은 포도밭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질 좋은 최상급의 포도를 생산하려면 아깝더라도 늦가을에 가지를 과감하게 잘라야 한다. 그래야 소량이지만 질 좋은 포도를 따낼 수 있고, 최고 빈티지의 명성을 얻을 수 있단다. 그는 레이크스 폴리 와이너리의 자부심을 작은 것(small)과 단순성(simple)으로 표현했다.
레이크스 폴리 와이너리는 여러 종류의 와인을 만들지 않는다. 레드와 화이트 각각 한 종류뿐이다. 브랜드인 카베르네 소비뇽과 샤도네이 와인만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만들어왔다. 단순한 것이 좋은 거란다. 이미 세상은 너무 복잡하게 변해버렸기에. 피터는 말한다.
“얍삽하게 겉포장만 화려하게 꾸민다거나, 이것저것 조금씩 섞어 종류만 잔뜩 늘려 소비자를 현혹하는 짓을 우리는 안 해요. 작은 것이 아름답습니다(Small is beautiful). 단순한 것은 더 아름답죠(Simple is more beautiful).”
‘작고 단순한 것을 향해….’ 복잡하고 어지럽고 말 많은 세상에 이제 관조의 나이로 들어선 레이크스 폴리 와이너리가 던지는 메시지다.
빈속에 마신 와인 탓인지, 아니면 나른한 봄기운 때문인지 어질어질하다. 와이너리를 나오면서 보니 시루떡 같은 포도밭의 진흙 위로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와인창고에서 봤던 그 나비인가. 연둣빛 포도넝쿨을 타고 넘어온 산들바람이 어린 나비의 어설픈 날갯짓을 돕고 있다. 유칼리나무 사이로 ‘솨아’ 하고 쏟아져 내려오는 푸른 햇살을 받으며 잿빛 토끼 한 마리가 포도밭 가장자리에 앉아 자잘한 방울꽃을 뜯고 있다. 숨 쉬기도 벅찰 정도로 아름다운 헌터밸리의 아침 풍경이다.
헌터밸리에서 가장 유명한 포도원인 레이크스 폴리 와이너리를 창업한 맥스 레이크는 저명한 외과전문의로 평일에는 시드니에서 환자를 돌보고, 주말이면 헌터밸리로 달려가 포도밭에 묻혀 살았다. 나중에는 그것도 성에 안 찼는지 아예 병원을 폐업하고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에만 매달렸다. 그렇게 와인에 미쳐 한평생을 살다 2009년 남반구가 가을로 접어드는 4월, 시드니 부촌 롱그빌에 있는 자택에서 84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흰색 요트가 수련처럼 떠 있는 시드니만과 낭창낭창한 여인의 허리선을 닮은 레인코브 강물이 한눈에 들어오는 그의 거실. 푹신한 소파 옆 탁자에는 마시다 만 크리스털 와인잔이 놓여 있었다. 그는 세상과 작별하는 순간에도 와인을 마셨던 것이다.
“최고의 와인을 찾아다니면서 맛보고 즐기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와인을 창조하라.”
레이크가 남긴 말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죽기 전에 마셨던 와인도 레이크스 폴리 와이너리 것이 아닌, 2004년산 프랑스 본 로마네(Vosne Romane´e)였다. 훌륭한 와인을 찾아 맛보되, 그것은 새로운 와인을 창조하기 위한 과정이자 노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는 결코 남의 양조법을 흉내 내거나 다른 와이너리의 와인 맛을 모방하지 않았다. 그는 호주 와인산업의 창시자이자 리더였다. 아울러 고품질 와인을 소량 생산하는 부티크 와이너리를 처음으로 호주에 도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부티크 와인은 대량 생산 와인에 비해 와인메이커의 개성과 취향이 강하게 드러나며, 제조 비법이 집안 대대로 전수돼온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까다로운 맛과 희소성을 찾는 고객에게 인기가 높다.
역사야말로 가장 위대한 스승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레이크. 그의 와인제조 창고는 아직도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투박하지만 곳곳에 당당한 전통이 스며 있다. 녹이 슨 수도꼭지와 손때 묻은 개수통, 힘깨나 쓰는 사람이 매달려야 할 무지막지한 압착기가 눈에 들어왔다.
와인은 살아 숨 쉬는 생명체
레이크스 폴리 와이너리를 오랜만에 찾아 레이크에 대한 얘기를 듣노라니 그가 만든 와인을 먹고 싶다는 욕망이 끓어올랐다. 레이크 밑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피터에게 와이너리 역사를 길게 듣고 있는데도 아침나절이라 그런지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동안 여러 곳을 찾아다녔지만 처음으로 느껴보는 호젓한 분위기. 처마 밑에서 왕거미 한 마리가 유유자적 줄을 타고 내려왔다.
때마침 열어놓은 창문으로 봄바람이 수선화 향을 가득 물어왔다. 바삭바삭 부서지는 햇빛을 받아가며 노랑나비 한 마리가 창고 앞으로 툭하고 나타났다. 나비는 민들레가 지천으로 핀 언덕으로 서툰 날갯짓을 하며 나풀나풀 날아갔다. 어설프지만 자연 어디에선가 또 하나의 생명이 탄생했다는 증거이리라. 그런데 이어지는 피터의 말을 들으니 생명의 신비는 처마 밑이나 찬연한 햇빛이 쏟아지는 민들레 들판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두컴컴한 지하창고에도 생명은 오도카니 둥지를 틀고 있었다.
“사실 와인은 공장에서 병에 담아 내오는 청량음료와는 달라요. 살아 숨 쉬죠. 그래서 열을 가해 만든 증류주인 위스키와 크게 달라요. 와인은 살아 숨 쉬며 인간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생명체라는 얘기예요. 이른 새벽, 안개와 이슬에 바짓가랑이를 적셔가며 풀밭을 지나 마당을 가로질러 와인창고로 다가가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쿵쾅거리는 걸 느껴요. 마치 애인이 잠들어 있는 침실 창으로 다가가는 기분이죠. 드르륵 문을 열고 와인창고에 들어서면 저 오크통에 든 와인들이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며 내게 찰랑찰랑 말을 걸어와요. 그럼 나도 맞장구를 치죠. ‘내가 너무 일찍 깨운 건 아닌가’라는 말로 시작해 ‘지난밤 너무 덥거나 춥지는 않았나’ ‘간밤에 비가 온 것 같던데 잠자리가 축축하진 않았나’ ‘바람이 잘 통하라고 들창을 활짝 열어놓았는데 그리로 혹시 다람쥐가 드나들며 잠을 방해하진 않았나’….”
‘작고 단순한 아름다움을 향해…’
태어나서 한 번도 헌터밸리를 떠나본 적 없는 피터라서 그런지 그의 말이 더 구수하고 정감 있게 다가왔다. 와인에 대한 그의 철학과 사랑이 말에 오롯이 녹아 있었다. 그는 “와인 맛을 좌우하는 것은 무엇보다 포도”라면서 “사실 와인은 포도밭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질 좋은 최상급의 포도를 생산하려면 아깝더라도 늦가을에 가지를 과감하게 잘라야 한다. 그래야 소량이지만 질 좋은 포도를 따낼 수 있고, 최고 빈티지의 명성을 얻을 수 있단다. 그는 레이크스 폴리 와이너리의 자부심을 작은 것(small)과 단순성(simple)으로 표현했다.
레이크스 폴리 와이너리는 여러 종류의 와인을 만들지 않는다. 레드와 화이트 각각 한 종류뿐이다. 브랜드인 카베르네 소비뇽과 샤도네이 와인만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만들어왔다. 단순한 것이 좋은 거란다. 이미 세상은 너무 복잡하게 변해버렸기에. 피터는 말한다.
“얍삽하게 겉포장만 화려하게 꾸민다거나, 이것저것 조금씩 섞어 종류만 잔뜩 늘려 소비자를 현혹하는 짓을 우리는 안 해요. 작은 것이 아름답습니다(Small is beautiful). 단순한 것은 더 아름답죠(Simple is more beautiful).”
‘작고 단순한 것을 향해….’ 복잡하고 어지럽고 말 많은 세상에 이제 관조의 나이로 들어선 레이크스 폴리 와이너리가 던지는 메시지다.
빈속에 마신 와인 탓인지, 아니면 나른한 봄기운 때문인지 어질어질하다. 와이너리를 나오면서 보니 시루떡 같은 포도밭의 진흙 위로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와인창고에서 봤던 그 나비인가. 연둣빛 포도넝쿨을 타고 넘어온 산들바람이 어린 나비의 어설픈 날갯짓을 돕고 있다. 유칼리나무 사이로 ‘솨아’ 하고 쏟아져 내려오는 푸른 햇살을 받으며 잿빛 토끼 한 마리가 포도밭 가장자리에 앉아 자잘한 방울꽃을 뜯고 있다. 숨 쉬기도 벅찰 정도로 아름다운 헌터밸리의 아침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