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이코노미쿠스’인 우리는 늘 경제적 활동을 한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합리적인 동기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경제학이 특정 분야의 학문으로 자리매김하기는 어렵다.
경제학은 사회학이나 철학, 혹은 심리학, 때로는 수학에 포섭된 성과물에서 ‘경제’라는 키워드로 따로 추출한 ‘묶음 학문’이라 말해도 그리 틀리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도 경제학이 ‘과학’이라거나 ‘독창적 학문’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인지 ‘노벨상’에도 ‘경제학상’은 없다. 우리가 흔히 ‘노벨 경제학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노벨재단’이 주는 상이 아니다.
스웨덴의 한 은행이 개별적으로 수여하는 것인데 정식 명칭은 ‘앨프레드 노벨을 기념하는 상’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수상자를 선정한다는 점에서 노벨상과 비슷하지만 노벨재단의 생각은 확고하다.
경제학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노벨 경제학상을 따로 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경제학이라는 학문적 ‘정의’ 혹은 ‘명명(命名)’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춘 결과다. 어떤 면에서 경제학은 정치학이나 철학을 선도하고, 다양한 창의성을 바탕으로 학문적 영역과 실용적 중요성을 확장하는 학문이다.
어쩌면 이 점이 바로 경제학의 양면성일 터. 경제학, 특히 거시경제를 다루는 학자는 모두 애덤 스미스와 케인스의 망령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사실 경제란 이 두 가지 축선을 벗어나면 별로 할 말이 없다. ‘시장경제학’은 기본적으로 ‘효율적 시장’이라는 대전제 위에 서 있다. 경제학자들에게 시장은 늘 효율적이고 자율은 복음이다.
특히 냉전 이후 자본주의의 승세가 굳어지고 왕성한 무역이 골딜록스(goldilocks) 호황을 이끌어내면서 경제학자들의 시장에 대한 신앙심은 거의 ‘탈레반’ 수준이다. 하지만 교조적인 신앙에는 늘 ‘불안과 혼돈’이라는 이단의 씨앗이 자란다.
그리고 그 씨앗은 지극히 효율적이라는 시장에 주기적으로 ‘불황’이라는 폭탄을 투하한다. 경제학자들은 그 이유를 찾아 업데이트용 ‘패치(patch)’를 대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둠의 씨앗들은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며 새로운 독성으로 무장한 채 효율성을 공격한다.
경제학자들의 진단은 20세기 초 금융위기에 대응한 방식, 즉 화폐에 대한 불안(혹은 신용 불안)을 종식하는 데 대부분의 노력을 기울였다. 과거 화폐에 대한 불안이 궁극적으로 공황으로 가는 지렛대임을 목격한 경제학자들은 ‘최종 대부자’인 ‘연방은행’을 창설하도록 제안했다.
하지만 중앙은행의 창설은 은행부도에 대한 시스템 불안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됐을 뿐 교묘하게 똬리를 튼 ‘그림자 금융’의 도전을 받았다. 정부 보증 시스템을 벗어나 활개를 친 ‘은행 지주회사, 모기지 회사, 헤지펀드’ 등의 탐욕이 시스템 위기로 전염된 것이다. 결국 ‘최종 대부자’인 중앙은행은 은행뿐 아니라, 책임질 필요가 없는 ‘그림자 금융’의 파산에도 개입할 수밖에 없게 됐다.
경제학자들은 또다시 새로운 소프트웨어 패치를 댈 수밖에 없었다. 중앙은행의 전통적 기능인 ‘공개시장 조작’과 ‘재할인 여신’이라는 두 수단을 좀더 세련되고 과감하게 구사하며 ‘주택대부조합 사태’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 파산’ ‘서브프라임 모기지 파산’ 등에 개입을 시도했다. 그러고는 종종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중앙은행이 나서서 위기를 막으면 위기는 다른 곳에서 다시 똬리를 튼다. 결국 근본구조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오늘 소개할 ‘야성적 충동’(랜덤하우스 펴냄)은 그 내용에서 ‘경제적 동기’와 ‘비경제적 동기’ 그리고 ‘합리적 반응’과 ‘비합리적 반응’이라는 4개의 상자(box)를 가상한다. 그리고 그중 현대 경제학은 ‘경제적 동기’의 상자만을 채우고 있으며 현재의 경제모델은 사람들의 ‘경제적 동기’가 ‘합리적’일 때만 제대로 작동한다고 서술한다.
나머지 3개의 상자는 여전히 빈 채로 남아 있는 것. 그렇다면 만약 ‘비경제적 동기와 합리적 반응’ 혹은 ‘경제적 동기와 비합리적 반응’, 아니면 ‘비경제적 동기와 비합리적 반응’이 결합할 경우 경제는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 이 책은 이 세 가지 칸에 답을 채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답으로 ‘야성적 충동’을 들고 나온다. 케인스가 언급한 개념이다. 하지만 ‘야성적 충동’은 ‘시장 심리’라는 말의 경제학적 ‘레토릭’에 불과하다. 이 책의 한계인 것이다. 결국 이 책은 거시경제학자가 인정하기 싫어하는 ‘심리적 변수’에 대한 인정과 자기 고백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야성적 충동’은 진부한 개념일 뿐, 놀라움의 대상은 되지 못한다. 하지만 탁월한 거시경제학자들의 ‘온건한 경제교과서’라는 점에선 가치가 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경제 현상들을 설명하는 솜씨는 역시 대가는 다르다는 경탄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http://blog.naver.com/donodonsu
경제학은 사회학이나 철학, 혹은 심리학, 때로는 수학에 포섭된 성과물에서 ‘경제’라는 키워드로 따로 추출한 ‘묶음 학문’이라 말해도 그리 틀리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도 경제학이 ‘과학’이라거나 ‘독창적 학문’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인지 ‘노벨상’에도 ‘경제학상’은 없다. 우리가 흔히 ‘노벨 경제학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노벨재단’이 주는 상이 아니다.
스웨덴의 한 은행이 개별적으로 수여하는 것인데 정식 명칭은 ‘앨프레드 노벨을 기념하는 상’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수상자를 선정한다는 점에서 노벨상과 비슷하지만 노벨재단의 생각은 확고하다.
경제학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노벨 경제학상을 따로 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경제학이라는 학문적 ‘정의’ 혹은 ‘명명(命名)’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춘 결과다. 어떤 면에서 경제학은 정치학이나 철학을 선도하고, 다양한 창의성을 바탕으로 학문적 영역과 실용적 중요성을 확장하는 학문이다.
어쩌면 이 점이 바로 경제학의 양면성일 터. 경제학, 특히 거시경제를 다루는 학자는 모두 애덤 스미스와 케인스의 망령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사실 경제란 이 두 가지 축선을 벗어나면 별로 할 말이 없다. ‘시장경제학’은 기본적으로 ‘효율적 시장’이라는 대전제 위에 서 있다. 경제학자들에게 시장은 늘 효율적이고 자율은 복음이다.
특히 냉전 이후 자본주의의 승세가 굳어지고 왕성한 무역이 골딜록스(goldilocks) 호황을 이끌어내면서 경제학자들의 시장에 대한 신앙심은 거의 ‘탈레반’ 수준이다. 하지만 교조적인 신앙에는 늘 ‘불안과 혼돈’이라는 이단의 씨앗이 자란다.
그리고 그 씨앗은 지극히 효율적이라는 시장에 주기적으로 ‘불황’이라는 폭탄을 투하한다. 경제학자들은 그 이유를 찾아 업데이트용 ‘패치(patch)’를 대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둠의 씨앗들은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며 새로운 독성으로 무장한 채 효율성을 공격한다.
경제학자들의 진단은 20세기 초 금융위기에 대응한 방식, 즉 화폐에 대한 불안(혹은 신용 불안)을 종식하는 데 대부분의 노력을 기울였다. 과거 화폐에 대한 불안이 궁극적으로 공황으로 가는 지렛대임을 목격한 경제학자들은 ‘최종 대부자’인 ‘연방은행’을 창설하도록 제안했다.
하지만 중앙은행의 창설은 은행부도에 대한 시스템 불안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됐을 뿐 교묘하게 똬리를 튼 ‘그림자 금융’의 도전을 받았다. 정부 보증 시스템을 벗어나 활개를 친 ‘은행 지주회사, 모기지 회사, 헤지펀드’ 등의 탐욕이 시스템 위기로 전염된 것이다. 결국 ‘최종 대부자’인 중앙은행은 은행뿐 아니라, 책임질 필요가 없는 ‘그림자 금융’의 파산에도 개입할 수밖에 없게 됐다.
경제학자들은 또다시 새로운 소프트웨어 패치를 댈 수밖에 없었다. 중앙은행의 전통적 기능인 ‘공개시장 조작’과 ‘재할인 여신’이라는 두 수단을 좀더 세련되고 과감하게 구사하며 ‘주택대부조합 사태’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 파산’ ‘서브프라임 모기지 파산’ 등에 개입을 시도했다. 그러고는 종종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중앙은행이 나서서 위기를 막으면 위기는 다른 곳에서 다시 똬리를 튼다. 결국 근본구조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오늘 소개할 ‘야성적 충동’(랜덤하우스 펴냄)은 그 내용에서 ‘경제적 동기’와 ‘비경제적 동기’ 그리고 ‘합리적 반응’과 ‘비합리적 반응’이라는 4개의 상자(box)를 가상한다. 그리고 그중 현대 경제학은 ‘경제적 동기’의 상자만을 채우고 있으며 현재의 경제모델은 사람들의 ‘경제적 동기’가 ‘합리적’일 때만 제대로 작동한다고 서술한다.
나머지 3개의 상자는 여전히 빈 채로 남아 있는 것. 그렇다면 만약 ‘비경제적 동기와 합리적 반응’ 혹은 ‘경제적 동기와 비합리적 반응’, 아니면 ‘비경제적 동기와 비합리적 반응’이 결합할 경우 경제는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 이 책은 이 세 가지 칸에 답을 채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B>박경철</B><BR>의사
이 책에 나오는 ‘야성적 충동’은 진부한 개념일 뿐, 놀라움의 대상은 되지 못한다. 하지만 탁월한 거시경제학자들의 ‘온건한 경제교과서’라는 점에선 가치가 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경제 현상들을 설명하는 솜씨는 역시 대가는 다르다는 경탄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http://blog.naver.com/donodons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