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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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 한 잎, 두릅 한 젓가락의 감동

  • 김광화 flowingsky@naver.com

    입력2009-04-22 14: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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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 한 잎, 두릅 한 젓가락의 감동

    <b>1</b> 간자미찜과 양념장. 어릴 때부터 제철 음식에 익숙해지면 몸이 계절에 반응한다. <br> <b>2</b> 제철 음식으로만 차린 곡우 밥상. 미나리장떡, 시금치된장국, 쑥버무리, 도라지무침, 취, 봄꽃 샐러드.

    아내와 5일장을 보러 갔다. 좌판을 벌여놓은 생선가게 앞에 멈춰 서 훑어본다. 고등어, 갈치, 냉동 오징어. 늘 보던 것이다. 가게 주인에게 묻는다.

    “오늘은 뭐가 좋아요?”

    “간자미가 좋지요.”

    “간자미? 처음 들어보는데?”

    “홍어 새끼예요. 우리 친정 남원에서는 이맘때 이걸 먹지요. 입맛 없는 요즘, 요놈만큼 입맛을 살려주는 게 없어요.”



    “한 번도 안 해 먹어봐서…. 어떻게 해요?”

    “간단해요. 솥에 넣고 찐 다음 양념장이나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돼요.”

    값도 싸다. 한 마리를 샀다. 아주머니 말씀대로 쪄서 뚜껑을 여니 톡 쏘는 냄새가 강렬하다. 삭힌 홍어 맛이다. 톡 쏘면서도 꼬리꼬리한 맛. 유통 과정에서 자연 발효돼 그렇단다. 그 맛에 자꾸 젓가락이 간다. 먹고 나서도 한동안 뒷맛이 남는다. 어려서부터 이걸 먹고 자란 사람은 이맘때 안 먹고는 못 지나가겠구나 싶다. 몸이 부르는 음식. 이게 바로 제철 음식 아닐까.

    곡우(穀雨), 들나물에서 산나물로

    이른 봄부터 즐겨 먹던 냉이는 이제 꽃이 피고, 머위도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 쓴맛이 돌기 시작한다. 쑥도 어릴 때는 날로 먹다가 점차 자라면 쑥버무리와 여러 가지 떡을 해 먹는다. 냇가에는 돌미나리가 향기롭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중부지방을 기준으로 한다면 들나물에서 산나물로 넘어가는 절기가 4월20일 곡우(穀雨)다. 못자리하는 철, 곡식을 살리는 비가 내린다는 때다.

    그런데 날이 무척 가물다. 논밭에서는 먼지가 폴폴 나고 냇물은 졸아들어 겨우 물줄기가 명맥을 잇고 있다. 물이 부족하면 덩달아 불도 문제. 날마다 군 차량이 돌아다니며 산불조심을 외치는데 그냥 조심이 아니라 숫제 ‘산불과의 전쟁’을 선포한 상태다.

    우리는 산골에 살다 보니 둘레가 다 산이다.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산은 가뭄이 덜하다. 그늘진 땅에서는 슬그머니 고개를 내미는 풀이 싱그럽고, 뿌리를 깊게 뻗은 나무들은 하루하루 빛깔이 다르다. 으름덩굴은 어느새 꽃망울을 맺고, 찔레순도 뒤질세라 새순을 펼치며 죽죽 뻗어간다. 찔레순의 상큼하고 떫은 맛은 잠시나마 갈증을 잊게 한다. 화살나무 잎인 훗잎은 데쳐서 나물로 먹거나 비빔밥으로 먹어도 좋다. 다래나무 새순은 데쳐서 먹거나 말렸다가 제사 음식으로도 중요하게 쓰인다.

    하지만 산나물로 인기는 단연 취와 고사리가 최고. 취는 숲 그늘에서 잘 자라며, 나물로 무쳐도 먹지만 날것 그대로가 제맛이다. 아삭아삭 씹다 보면 저절로 침이 괴고 점차 향이 강해진다. 먹고 나서도 입안은 물론 배 속까지 향기가 퍼지는 듯하다. 이렇게 제철 음식을 먹다 보면 많이 먹어야 맛이 아닌 것 같다. 독특한 향미는 제철에 오랜 시간 자연이 저 알아서 담아내는 것이리라.

    이제 비가 촉촉이 내리면 고사리가 지천으로 올라올 거다. 고사리는 보통 말렸다가 묵나물로 먹지만, 봄 제철에 데쳐서 양념장에 찍어 회처럼 먹거나, 봄조기와 함께 찜으로도 좋다. 쫄깃쫄깃 야들야들. 그러나 이렇게 가뭄이 계속되면 어쩌다 한두 개씩 올라오니 맛이나 볼 수 있을까.

    천지 기운 깃든 자연의 맛에 감사

    곡우는 나무에 한창 물이 오르는 시기. 밭 둘레나 길가로 넘어오는 나뭇가지를 자르다 보면 나무들이 얼마나 왕성하게 천지 기운을 끌어올리는지 실감한다. 저 깊은 땅속뿌리에서 높은 나무 꼭대기 가지 구석구석까지 물을 끌어올린다. 중력을 거슬러가는 세포의 펌프 작용이 놀랍다.

    보통 수액이라면 고로쇠 수액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봄철에는 나무마다 다양하게 수액을 낸다. 또 맛도, 물이 나오는 모양새도 제각각이다. 이곳은 뽕나무가 흔한데 수액이 하얗고 아주 걸쭉하다. 줄기에 상처가 나면 이를 아물게 하려고 조금씩 천천히 괸다. 입으로 핥으면 단맛이 은은하다.

    신나무는 제법 물이 나오고, 단풍나뭇과라 맛도 달다. 다래나무 수액은 조금 밋밋한 맛이지만 물이 많이 나온다. 그 밖에 으름덩굴과 자작나무도 수액을 낸다. 대나무는 5월 무렵, 새순이 자라고 나면 마디에 수액이 괸다. 참살이 바람을 타고 수액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지만 사람이 그걸 꼭 먹어야 할까? 수액에는 칼슘, 나트륨, 마그네슘 성분이 있다고 하는데, 그 전에 ‘어떤’ 이치를 이해하는 게 순서겠다. 내가 보기에는 천지자연의 기운을 끌어올리는 힘이 아마 사람들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닐까 싶다. 수액은 나무에게는 피다. 다래 수액은 상온에서 하루만 지나면 뿌옇게 바뀌고 2~3일이면 부패한다.

    산나물 가운데 나무순으로 인기가 좋은 것은 두릅과 다래나무순이다. 그런데 이게 점점 사라진다. 기후변화 탓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욕심을 부리기 때문이다. 이 손 저 손이 함부로 뜯을 뿐 아니라, 두릅 같은 나무는 뿌리째 뽑아낸 걸 가끔 보기도 했다.

    취 한 잎, 두릅 한 젓가락의 감동

    <b>3</b> 쑥을 갈아 미숫가루를 탔다. <br><b>4</b> 쑥버무리. <br><b>5</b> 두릅 새순. 천지 기운을 끌어올리는 힘이 느껴진다. <br><b>6</b> 산나물 말리기. 자연에 고마움을 느낀다.

    지난 시절 산나물이 보릿고개를 넘기는 귀한 구황식품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참살이 식품이다. 왜 산나물을 먹으면 참살이가 될까? 사람이 기르는 농작물은 자연물이면서 인공물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문명의 맛이 들어 있어, 자연 자체의 맛과 다르다. 억지가 아닌 저절로 자라고 순환하는 자연의 힘, 그게 바로 꼬이고 비틀린 사람들의 삶을 풀고 치유해주는 게 아닐까. 이런 가뭄에도 산나물이 나온다는 건 생명의 기적이라 할 만하다. 가뭄에는 취 한 잎, 두릅 한 젓가락을 먹더라도 더 감사히 먹어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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