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충만한 밥상. 손수 차리다 보면 모락모락 김까지 식욕을 자극한다. <br> 2 음식축제에서 찹쌀떡을 치고 있다. 참여한 만큼 더 맛난 게 음식이다. <br>3 만두 빚기. 음식을 하다 보면 먹을 준비도 덩달아 된다.
반찬이라고는 주말마다 집에서 어머니들이 싸주시는 밑반찬이 전부.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수요일쯤 되면 대충 떨어지거나 곰팡이가 피거나 쉬어서 먹을 수 없다. 그럼, 고추장이나 간장에 설익은 밥을 비벼 목구멍으로 밀어넣었다. 먹는 게 이러니 공부가 잘될 리 없었다. 자취한 지 한 달쯤 지나 부랴부랴 부모님들의 소환령이 내렸고, 어설픈 자취생활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밥 짓기도 이제는 매뉴얼 시대
디지털 전기압력밥솥. 메뉴얼의 시대인 요즘 삼층밥은 추억이 됐다.
우리 식구는 그동안 가스압력밥솥을 이용하다 얼마 전 ‘디지털 밥 짓기’로 넘어왔다. 이렇게 하니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가스불에 밥을 하면 늘 시간을 가늠해야 한다. 반면 전기압력솥은 솥에 물을 넣고 버튼만 누르면 제가 알아서 밥하고 뜸들이고 한다.
우리가 날마다 먹는 밥. 직접 해보면 아무리 디지털 시대지만 밥 짓기 하나에도 선택의 길은 많다. 백미인가, 현미인가. 무슨 잡곡을 얼마의 비율로 넣을 것인가. 곡식의 싹을 틔운 발아 현미밥도 가능하다. 그 밖에도 쑥을 넣은 쑥밥, 굴을 넣은 굴밥, 김치 넣은 김치밥…. 이렇게 밥 짓기 하나에도 다양한 선택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음식을 손수 하면 더 맛있다는 점이다. 남이 지은 삼층밥을 먹기는 어렵지만 본인이 지은 밥이라면 먹을 만하다. 왜 그럴까.
우리 식구들한테 물었더니 식구마다 대답이 골고루 나왔다. 여기에 내 경험을 덧붙여 정리해봤다. 첫째가 ‘내 것’이니까 하는 자부심. 남이 한 실수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내가 한 실수에 대해서는 관대한 게 사람이다. 손수 했다면 삼층밥도 맛나게 먹는데 다른 요리라면 더 말해 뭘 하겠는가.
다음으로 음식을 손수 마련하는 동안 먹을 준비가 된다. 음식 재료를 다듬고 씻고 버무리고 조리하는 과정에서 우리 몸이 조금씩 반응을 한다. 이제 곧 음식이 몸 안으로 들어온다고…. 먹을 준비가 된 사람과 잠도 덜 깬 상태에서 밥상에 앉은 사람이 같을 수 있겠는가.
마음대로 김밥. 골고루 마련한 김밥 재료를 식구마다 먹고 싶은 대로 싸게 한다. 시간도 절약되고 선택해 먹는 즐거움이 일품이다.
한편으론 자기 입맛이 기준이 된다. 아무리 주부 경력이 오래된 사람이라도 식구들 입맛을 다 맞추기는 어렵다. 나머지 식구들은 손수 음식을 하는 사람의 입맛을 따를 수밖에 없다. 보통 때는 크게 상관이 없지만 입맛이 까다로워지는 때라면 자기만의 입맛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몸이 아픈 뒤나 먼 여행지에서 이따금 몸 깊숙이 솟아나는 입맛. 음식을 손수 하다 보면 길들여진 감각이 아닌 자기만의 고유한 감각을 되살릴 수 있다.
자기가 하면 가장 먹기 좋은 조건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음식의 맛은 온도와도 관계가 깊다. 이를테면 짠맛은 식으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조리한 음식은 밥상에 놓는 순간부터 온도가 계속 바뀐다. 따끈한 국이라면 따끈할 때, 냉국이라면 미지근해지기 전에 먹는 게 맛있다. 손수 한 사람은 이런 맛의 흐름을 가장 잘 즐기게 된다.
원하는 공간에서 편안하게 먹을 수 있다는 점도 작용한다. 밥을 손수 지을 수 있다면 외식과 달리 공간과 시간을 자신이 선택하게 된다. 남이 해주는 서비스가 아무리 좋아도 자기 마음 같지는 않다. 이럴 때 누구에게 기대지 말고 손수 하면 된다. 최상의 서비스란 자신이 자신에게 주는 게 아닐까.
식탐도 한결 줄어든다.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이라면 언제든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과식도 하지 않게 된다. 음식을 손수 하다 보면 이렇게 품위를 지키는 힘도 덩달아 생긴다.
마지막으로 들고 싶은 건 조금 거창하다. ‘밥벌이에 대한 성찰’이다. 우리가 돈을 버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밥벌이. 이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밥을 직접 짓다 보면 밥벌이에 대한 생각도 달라진다. 내가 아는 한 이웃은 4월에 직장에서 희망퇴직이 예정돼 있는데, 회사를 그만둔다고 생각해선지 시간에 여유가 생겨 오랜만에 식구들과 주말을 한가하게 보냈다. 아이와 봄나물을 하러 강둑에 다녀오고, 모자란 건 시장을 봐서 사고. 이렇게 마련한 봄나물을 넣고 아이와 함께 김밥을 말아 먹었단다. 그랬더니 그 집 일곱 살 난 아이가 “아빠는 요리사야!”라며 좋아하더라 했다.
그날 저녁, 부부가 강둑길을 산책하며 ‘이렇게 그냥 밥만 먹고 살아도 행복하겠다’며 웃었단다. 돈을 적게 벌어도 가족과 온전히 소통한다면 밥벌이는 즐거움이자 자기실현의 하나가 될 수 있지 않겠나. 아무리 디지털 시대라지만 보물은 바로 가까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