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수영은 한국 저항적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그는 “이만하면 한국에 언론의 자유가 있다고 할 수 있죠”라고 태연스레 말하는 다른 문인에게 극심히 분개했다. 그는 언론의 자유에는 ‘이만하면’이라는 중간사(中間辭)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시인도, 문학자도 아니라고 내뱉었다. 이 일화는 1962년 일이다. 4 · 19혁명으로 자유의 충일이 주는 기쁨을 잠시 즐기다 다시 억압적 통치하에 놓인 시대적 배경이 놓여 있다. 언론의 자유를 향한 그의 애타는 희구가 눈에 선하다.
언론의 자유 혹은 이를 포괄하는 표현의 자유는 우리로 하여금 외부 세계와 정신적 교통을 통해 원만한 인격체계를 만들게 해준다. 언론의 자유가 있어야만 사회 구성원이 올바른 정치적 의지와 견해를 갖추고 선거와 투표를 통해 주권을 행사하며 공동체를 튼튼히 구축해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언론의 자유는 민주정치의 생명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는 어느 시대건 소수 견해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체제에서는 무척 버겁다. 언론의 자유의 신장 정도는 민주화 정도를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
과거에는 총칼로 언론의 자유를 무력화했다. 지금도 무력과 폭력으로 언론의 자유를 껍데기로 만들어버리는 곳이 지구상에 존재한다. 하지만 명색이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에서는 그렇게 노골적으로는 할 수 없다. 총칼 대신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유력한 도구가 되는 것이 명예훼손이다.
명예훼손도 개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제도적 장치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언론의 자유가 워낙 막대한 존재감을 가지는 만큼 명예훼손의 범위가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명예훼손 행위에 대한 처벌의 경우 징역형을 배제하고 벌금형에 그치는 것이 세계적 추세다. 이는 유엔에서 각 나라에 권고하는 사항이기도 하다. 나아가 형사적 책임을 완전히 없애고 오직 민사적 책임만 묻는 경향이 미국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로 점점 확산되고 있다. 미국은 1964년 연방대법원이 ‘뉴욕타임스’ 사건 판결에서 ‘현실적 악의의 이론’을 내세운 이래 피해자가 공인인 경우 민사적 책임에 의한 손해배상마저 거의 봉쇄해버렸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유감스럽게도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명예훼손법제를 취하고 있다. 민형사상 책임은 물론, 징역형 부과까지 가능하다. 최근에는 방송이나 출판이 되기 전 그 내용이 자신의 명예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상영금지 또는 출판금지 가처분신청을 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얼마 전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정권 방향에 찬동하며 다른 견해를 취하는 언론인들을 가혹하게 다뤘다는 내용의 영화 ‘공범자들’에 대해 등장인물들이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을 했는데 법원이 이를 기각했다. 앞서 설명한 세계의 언론법제 경향을 보면 ‘공범자들’에 대한 우리 법원의 태도가 잘 이해될 것이다. 공적 인물(공인)에게 비판과 의문을 던지는 영화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고 명예훼손을 이유로 상영금지를 해달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취지로 판시했다. 타당한 결론이다. 앞으로도 법원이 언론의 자유를 더 확보하는 쪽으로 태도를 견지해주길 바란다. 그것이 현재의 글로벌 프로토콜(global protocol)을 존중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