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군의 공격에 파괴된 러시아군 전차. [GETTYIMAGES]
한때 파죽지세 러시아군, 모든 전선에서 고전
하지만 예상을 깬 우크라이나의 선전으로 전쟁은 장기화됐고, 군사강국 러시아는 현재 거의 모든 전선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개전 직후 우크라이나 상황은 매우 좋지 못했다. 우크라이나군은 일부 거점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서 방어를 포기할 정도였다. 전력 열세를 우려한 상당수 국민이 일찌감치 국외로 탈출하는 등 사기도 떨어졌다. 하지만 개전 며칠 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급습한 러시아 특수부대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사실이 드러나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여기에 해외 도주설이 나돌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수도에 남아 국민들과 생사를 같이한 것도 우크라이나의 항전 의지에 불을 붙였다. 당시 젤렌스키 대통령은 키이우 모처에서 전쟁을 지휘하던 중 러시아군의 습격으로 절체절명 위기에 처했을 때 직접 총을 들고 대응했다고 한다.
빠른 속도로 우크라이나에 공급된 미국과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무기도 전황을 뒤집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서방 세계는 전차, 전투기 등 운용 교육에 많은 시간이 필요한 장비 대신 소총과 대전차 미사일 같은 보병용 장비를 주로 공급했다. 항전 의지에 불탄 우크라이나군과 국민들은 몇 시간 동안 간단한 장비 조작법만 교육받고 곧장 전장으로 향했다. 청장년 남성은 물론, 여성도 대거 군에 지원했다. 개전 당시 42세 나이에 두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한 테티아나 초르노볼 전 국회의원은 대전차 미사일 운용병으로 자원입대했다. 초르노볼 전 의원은 키이우 북부 방어선에서 여러 대의 러시아군 전차를 파괴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한때 파죽지세였던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에 가로막힌 이유는 무엇일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낼 욕심이 너무 과했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가 쳐 놓은 덫에 정예부대를 모두 밀어 넣는 치명적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침공 전 우크라이나 국경선 곳곳에 집결한 러시아군의 120여 개 대대전술단(BTG)은 분명 대규모 병력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6배가 넘는 광활한 영토를 자랑하는 우크라이나 평원에 12만 명이 분산 배치됐다고 생각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러시아는 병력 집중 운용의 원칙을 무시한 채 우크라이나 북부 키이우·체르니히우, 동부 수미·하르키우, 동남부 도네츠크·루한스크, 남부 헤르손·자포리자 등 8개 방면에서 침공을 감행했다. 12만 대군을 8개 갈래로 나눠 분산 운용한 것이다.
러시아군 부대 구조에도 문제가 있었다. 개전 당시 러시아군은 1000여 명이 1개 작전 단위로 움직이는 BTG 편제를 채택했다. 이런 편제는 저강도 분쟁에서 신속하게 군사력을 투사할 때는 적합하다. 문제는 이번 전쟁은 고강도 전면전이라는 점이다. BTG 편제는 군수지원을 1개 소대가 책임져 장거리 원정에 매우 불리한 데다, 각 단위 부대의 화력도 부족해 견고한 적 방어진지를 뚫기 어렵다.
“러시아군, 전차·장갑차 2만4000대 잃어”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 진영을 향해 곡사포를 발사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군은 대부분 전선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뉴시스]
영국 싱크탱크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가 발간하는 보고서 ‘밀리터리 밸런스’에 따르면 러시아는 전쟁 직전 T-72/80/90 계열 전차 3000여 대와 BMP-1/2/3 계열 보병전투장갑차 4000여 대, BTR 계열 각종 장갑차 5000~6000여 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군 총참모부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전쟁 발발 29개월이 지난 현재 러시아군 장비 피해는 전차 8200여 대, 장갑차 1만5800여 대, 야포 1만5300여 문, 각종 차량 2만500여 대에 달한다. 물론 우크라이나군이 전과(戰果)를 과장했을 개연성도 있지만, 각국 군사 전문가들이 추산한 데이터를 분석해봐도 러시아군의 재래식 전력은 막대한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지상군 핵심 장비라 할 수 있는 전차 사례를 보면 러시아군의 현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국내외 여러 언론이 인용하는 네덜란드 군사 정보 사이트 ‘오릭스(Oryx)’와 ‘공개출처정보(OSINT) 네트워크’에 따르면 러시아군 전차 손실은 올해 1월 들어 이미 전체의 80%를 넘어섰다. 이는 러시아군이 1월 감행한 아우디우카 방면 공세와 5월 시작된 하르키우 방면 공세에서 발생한 피해는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7월 기준 러시아군의 전차 전력은 그야말로 씨가 마른 상태다.
전쟁 전 러시아는 1만 대 넘는 전차를 치장물자로 보유했다고 주장했다. 모델별로 살펴보면 T-72 계열 전차 7000여 대, T-80 계열 전차 3000여 대, T-90 계열 전차 200여 대 등이다. 이 같은 주장이 사실이라면 현역 전차 3000여 대를 모두 잃었어도 T-72나 T-80 같은 전차를 복원해 전력 공백을 메울 여력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러시아는 지난해부터 사실상 전시 경제체제로 전환해 군수산업을 풀가동하고 있다고 여러 차례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현실은 러시아 정부의 선전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최근 전장에선 러시아군 T-72나 T-80 전차를 찾아보기 어려워졌다고 한다. 그 대신 북한군에서나 주력 전차로 쓰는 T-62 계열, 심지어 옛 소련군에서도 50년 전 자취를 감춘 T-55가 등장할 정도다. 이런 고철 전차라도 받는 부대는 운이 좋은 편이다. 대부분 전선에서 러시아군은 전차가 없어 중국제 레저용 ATV(4륜구동 오토바이) 등을 타고 돌격할 정도다.
나토 관계자 “러시아군 복원 가능 장비 다 썼다”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러시아의 ‘야르스’ 대륙간탄도미사일. [위키피디아]
러시아가 오늘날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T-55, T-62를 전선에 투입하는 이유는 또 있다. 자동장전장치와 사격통제장치처럼 복잡한 부품을 고쳐야 쓸 수 있는 T-72나 T-80과 달리, 구형 전차는 구조가 단순해 당장 끌어다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는 7월 초 “러시아는 치장된 T-72 전차의 단 9%만 복원했고, 이는 보관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차라리 새로 만드는 게 더 싸기 때문”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현재 러시아 방위산업의 현실을 고려하면 새 전차를 만드는 것도 여의치 않다. 나토는 러시아 방위산업 종사자가 기존 200여만 명에서 전쟁 발발 후 350여만 명으로 1.5배 증가했다고 추산한다. 현재 러시아의 주요 군수공장은 원칙적으로 24시간 연중무휴로 가동되고 있기에 대규모 일손이 증원된 것이다. 하지만 현재 러시아의 한 달 전차 생산량은 나토 추산 기준 125여 대에 불과하다. 심지어 그중 100여 대는 ‘복원 전차’다. 따라서 T-55나 T-62처럼 현대전에 부적합한 구식 전차가 대거 포함돼 있다. 신규 생산되는 전차 물량만 따져보면 한 달 20~30여 대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러시아는 거의 모든 군사 장비를 자체 개발·생산하는 군사기술 강국이다. 게다가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무기를 생산하는 나라로도 유명하다. 러시아 방위산업에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러시아의 군수 산업 시스템을 놓고 군사 전문가 사이엔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러시아 정부가 전차를 1대 구입하려고 100만 루블을 지불하면 국방부 관료들이 50만 루블을 횡령한 뒤 생산업체에 50만 루블만 준다. 업체 임원이 다시 30만 루블을 횡령하고 일선 관리자와 노동자가 또다시 10만 루블을 빼돌린다. 전차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실제 예산은 10만 루블이다.” 이런 우스갯소리는 러시아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러시아가 자랑하는 T-14 아르마타 전차는 2020년까지 2300여 대가 양산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제작사인 우랄바곤자보드가 개발비와 생산라인 건설비를 횡령한 탓에 공장 자체가 지어지지 못했다. 차세대 장갑차 쿠르가네츠-25도 제작사 쿠르간마쉬자보드가 정부로부터 받은 공장 건설비를 자사 부채를 갚는 데 쓰는 바람에 양산 계획이 무기한 연기됐다. 5월 세르게이 쇼이구 당시 국방장관을 비롯한 러시아군 최고위 간부의 대규모 숙청 및 좌천도 이 같은 부정부패가 적발된 결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