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 흔히 등장하는 용어로 ‘보호무역’이 있다. 보호무역은 자국 산업과 재화, 생산자를 보호하기 위해 외국 물품의 수입을 불허하거나 높은 관세를 매기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 보호무역은 영국에서 시작됐다. 17세기 영국은 중상주의를 높이 떠받들었고, 이를 통해 국가 번영 기초를 마련했다. 특히 1651년 항해조례를 발표해 네덜란드 중계무역상과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보호무역 뿌리는 생각보다 깊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유사한 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주류를 대상으로 보호무역이 펼쳐졌는데, 이와 관련된 최초 시도는 로마제국에서 이뤄진 와인에 대한 보호무역이다. 당시 이 정책을 추진한 인물은 도미티아누스 로마 황제였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와인을 대상으로 보호무역을 진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79년 나폴리 인근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와인의 수요-공급 체계가 무너진 것이 주된 영향을 미쳤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은 폼페이를 멸망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화산 폭발이 로마인의 와인 생활에 미친 여파는 컸다. 불의의 사고로 로마 사람들이 2년 동안 마실 수 있는 양의 와인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당시 로마와 그 주변 지역에는 100만 명이 생활했다고 한다. 이들이 인당 하루 평균 와인 0.5ℓ를 마셨다고 하니, 단순 계산해도 매년 1억8000만ℓ의 와인이 필요했다. 화산 폭발로 한동안 와인 공급이 부족했으나, 이 문제를 인식한 사람들이 대거 포도 재배와 와인 제조에 뛰어들면서 상황은 역전됐다. 공급이 늘어나면서 이탈리아 와인 가격이 폭락한 것이다.
92년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와인 과잉 생산 문제를 바로잡고자 칙령을 발표했다. 새로운 와이너리 설립을 금지하고, 속주인 프랑스(당시 갈리아 지방) 포도나무의 절반을 뽑도록 한 것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이 같은 칙령을 발표한 데는 여러 고려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로마산 와인을 보호해 프랑스산 와인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프랑스에는 와인이 많이 퍼져 있었다. 로마제국 속주인 프랑스 남부 랑그독 루시옹 지역, 특히 나르보넨시스를 중심으로 마르세유, 아비뇽, 론까지 와인 산업이 발달됐다. 로마의 발전된 도로 교통 시스템도 와인 유통을 용이하게 했다. 알로브로게스족은 갈리아 포도 재배의 선구자로 불린다. 이들이 생산한 와인은 타른강 주변 가이아크, 부르디갈라(보르도)에 수출되기도 했다. 이탈리아 와인이 경쟁에서 밀리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이를 타개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질 낮은 와인을 시장에서 쫓아내기 위해서였다. 폼페이가 사라지면서 와인 부족 현상이 일어나자 와이너리가 급격히 늘었고 신규 제품도 많이 등장했다. 이들 와인은 품질이 좋지 않아 장거리 운송을 할 수 없어 현지에서 소비해야 했다. 저급 와인은 와인 가격 하락을 부채질할 우려가 있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입장에서는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암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조카 줄리아를 임신시켜 아내의 질투를 불렀다. 96년 근위대장 등이 도미티아누스 황제 암살을 계획해 성공했는데, 그의 아내도 여기에 동참했다고 한다. 원로원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죽음을 반겼다. 죽기 3년 전부터 신경과민 등에 시달리던 그가 주변 인물들을 처형하거나 귀향 보내는 등 공포 정치를 자행했기 때문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기독교인 탄압으로도 악명 높다. 그는 자신을 철저히 신격화했기에 기독교인들로부터 반감을 샀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고대 그리스 경기를 본떠 4년마다 1번씩 경기를 주재했다. 이때마다 그는 그리스풍 옷과 금관을 착용했고, 동료 심판들은 여러 신에 둘러싸인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관을 써야 했다. 그는 자신을 ‘주님이자 하느님(Dominus et Deus)’이라고 부르게 했는데, 유일신을 섬기는 이들 입장에서는 이 같은 정책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인들이 왕의 우상화에 반대했고, 결국 탄압받았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 했지만 뜻대로 이뤄진 것은 하나도 없다. 프랑스산 와인을 견제하려 했으나 프랑스산 와인 품질이 더 높아졌고, 그의 생애 역시 유사했다. 세상 일이 맘대로 되지 않기는 로마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
화산 폭발로 2년 치 와인 사라져
도미티아누스 로마 황제 조각상. [위키피디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와인을 대상으로 보호무역을 진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79년 나폴리 인근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와인의 수요-공급 체계가 무너진 것이 주된 영향을 미쳤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은 폼페이를 멸망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화산 폭발이 로마인의 와인 생활에 미친 여파는 컸다. 불의의 사고로 로마 사람들이 2년 동안 마실 수 있는 양의 와인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당시 로마와 그 주변 지역에는 100만 명이 생활했다고 한다. 이들이 인당 하루 평균 와인 0.5ℓ를 마셨다고 하니, 단순 계산해도 매년 1억8000만ℓ의 와인이 필요했다. 화산 폭발로 한동안 와인 공급이 부족했으나, 이 문제를 인식한 사람들이 대거 포도 재배와 와인 제조에 뛰어들면서 상황은 역전됐다. 공급이 늘어나면서 이탈리아 와인 가격이 폭락한 것이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 당시 로마 폼페이 모습을 담은 카를 브률로프의 ‘폼페이 최후의 날’. [위키피디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이 같은 칙령을 발표한 데는 여러 고려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로마산 와인을 보호해 프랑스산 와인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프랑스에는 와인이 많이 퍼져 있었다. 로마제국 속주인 프랑스 남부 랑그독 루시옹 지역, 특히 나르보넨시스를 중심으로 마르세유, 아비뇽, 론까지 와인 산업이 발달됐다. 로마의 발전된 도로 교통 시스템도 와인 유통을 용이하게 했다. 알로브로게스족은 갈리아 포도 재배의 선구자로 불린다. 이들이 생산한 와인은 타른강 주변 가이아크, 부르디갈라(보르도)에 수출되기도 했다. 이탈리아 와인이 경쟁에서 밀리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이를 타개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질 낮은 와인을 시장에서 쫓아내기 위해서였다. 폼페이가 사라지면서 와인 부족 현상이 일어나자 와이너리가 급격히 늘었고 신규 제품도 많이 등장했다. 이들 와인은 품질이 좋지 않아 장거리 운송을 할 수 없어 현지에서 소비해야 했다. 저급 와인은 와인 가격 하락을 부채질할 우려가 있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입장에서는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다.
전화위복 겪은 프랑스 와인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조치가 뜻대로 이뤄졌는지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갈리아 포도밭이 이탈리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관리가 가능했겠느냐”는 의문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경제 저널리스트이자 수필가인 브누아 시마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조치가 도리어 갈리아의 와인 산업을 더욱 발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평가했다. 황제 칙령에 따라 포도나무를 솎아내기 하는 과정에서 기존 포도밭이 밀·보리밭으로 대체됐고, 포도나무는 산기슭으로 옮겨졌는데 이것이 뜻밖의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포도밭이 산기슭에 조성된 덕분에 일조량이 늘어 포도 질이 좋아졌고, 이는 프랑스 내 포도밭 확대로 이어졌다. 결국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금지령은 280년 프로부스 황제에 의해 폐기됐다.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암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조카 줄리아를 임신시켜 아내의 질투를 불렀다. 96년 근위대장 등이 도미티아누스 황제 암살을 계획해 성공했는데, 그의 아내도 여기에 동참했다고 한다. 원로원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죽음을 반겼다. 죽기 3년 전부터 신경과민 등에 시달리던 그가 주변 인물들을 처형하거나 귀향 보내는 등 공포 정치를 자행했기 때문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기독교인 탄압으로도 악명 높다. 그는 자신을 철저히 신격화했기에 기독교인들로부터 반감을 샀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고대 그리스 경기를 본떠 4년마다 1번씩 경기를 주재했다. 이때마다 그는 그리스풍 옷과 금관을 착용했고, 동료 심판들은 여러 신에 둘러싸인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관을 써야 했다. 그는 자신을 ‘주님이자 하느님(Dominus et Deus)’이라고 부르게 했는데, 유일신을 섬기는 이들 입장에서는 이 같은 정책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인들이 왕의 우상화에 반대했고, 결국 탄압받았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 했지만 뜻대로 이뤄진 것은 하나도 없다. 프랑스산 와인을 견제하려 했으나 프랑스산 와인 품질이 더 높아졌고, 그의 생애 역시 유사했다. 세상 일이 맘대로 되지 않기는 로마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