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의철(37·사진) 변호사를 만난 건 7월 9일 오전 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세월호 사고 희생자·실종자·생존자 및 가족대책위원회’(가족대책위) 법률대리인인 그는 5월부터 실종자 가족과 함께 진도실내체육관에 머물고 있다. 이날은 관련 회의 참석차 두 달 만에 서울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아침 일찍 출발해 왕복 10시간 넘게 운전한 끝에 막 진도에 도착한 그와 진도군청 옆 한 해장국집에서 마주앉았다. 배 변호사는 그때까지 저녁도 거른 상태였다. 김치와 나물 몇 가지가 전부인 찬에도 밥이 푹푹 줄었다. 까칠하던 얼굴에 그나마 생기가 돌았다.
요즘 배 변호사의 일정은 말 그대로 살인적이다. 매일 아침 9시 진도군청에서 열리는 범정부사고대책본부 회의에 참석하고, 10시엔 수색구조실무자 회의, 오후 2시엔 격일로 수색구조장비 기술연구 태스크포스(TF)팀 회의 또는 유실방지 TF 회의가 그를 기다린다. 오후 5시엔 해양경찰(해경)이 하는 수색브리핑에 동석하고, 이후에도 오후 6시 실종자가족 회의, 오후 9시 세월호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상황본부 회의가 줄줄이 이어진다. 그사이 틈이 나면 세월호 사고 현장 바지선에 들러 수색상황과 유실물을 점검하고, 각종 회의자료와 기자 브리핑 내용을 만들며, 가족 면담도 한다. 오전 2~3시가 돼야 비로소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진도체육관 바닥 한쪽, 그의 잠자리에 몸을 누일 수 있다. 주말도, 휴일도 없는 강행군이다. 그는 이날도 진도행 ‘귀가’를 서두르느라 정작 서울에 있는 집엔 들르지도 못했다고 했다.
“서울에 다녀오지 않았더라도 이 시간에는 원래 깨어 있어요. 항상 긴장하고 있어서 그런지 졸리지도 않아요.”
주말·휴일도 없는 강행군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국물을 후루룩 마시던 그가 내놓은 답이다. “보세요, 아직 쌩쌩하잖아요” 하며 오른쪽 가슴을 ‘탕탕’ 두드려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반팔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팔뚝에는 주사바늘 자국이 선명했다. 낮 시간 진도체육관에서 만난 의료진은 배 변호사가 그사이 탈진해 몇 차례 링거를 맞았다고 귀띔했다.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하자 그는 “아유, 서너 번 맞긴 했는데…” 하며 민망해했다.
“가끔은 ‘몸이 부서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죠. 하지만 전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짜 걱정되는 건 하루하루 지쳐가는 가족들이에요.”
배 변호사는 “지금도 급성폐렴으로 쓰러져 목포한국병원에 입원한 실종자 가족한테 들렀다 오는 길”이라며 “그분들 앞에서 힘든 티를 낼 수가 없다. 그분들과 비교하면 사실 힘들지도 않다”고 힘주어 말했다.
서울에서 비영리 공익법률사무소를 운영하던 배 변호사가 실종자 가족들과 더불어 지내기로 마음먹은 건 세월호 침몰 직후부터. 4월 16일 사고 소식을 접한 뒤 내내 눈물이 쏟아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18일 동료 변호사와 함께 무작정 진도로 내려왔다. 그러나 가족들은 “변호사는 말로만 도와준다고 하지 실은 다 사기꾼 아니냐”며 그를 제대로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건 초기 가족들이 굉장히 힘드셨잖아요. 정부와 언론에 실망하고 모든 사람을 믿지 못할 때였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분들이 필요로 할 때 언제든 손 닿는 곳에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족대책위 사무실이 있는 경기 안산 ‘와스타디움’에 찾아간 건 그 때문이다. ‘변호사인데 도와드리고 싶다, 밖에 있을 테니 무엇이든 물어보시라’ 하고 하루 종일 벤치를 지키기 시작했다. 비가 내려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마침 배 변호사가 앉은 벤치 쪽에 나와 담배를 피우는 가족이 많았다. 그들이 눈물 흘릴 때마다 같이 우는 변호사에게 가족들은 실종된 아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집회 참여 요청이 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특검’은 뭐고 ‘특별법’은 또 뭔지 하나하나 묻기 시작했다. 그렇게 꼬박 닷새가 지나자 비로소 가족대책위로부터 “사무실에 들어와 보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세월호 가족대책위 법률대리인’이자 대한변호사협회 세월호 특별위원회 간사가 된 지금도 배 변호사가 하는 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가족들과 함께 울고, 각종 조언을 해준다. 돌아오지 않은 아이, 누나, 동생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무너지는 그들의 의사를 대리해 각종 회의와 TF에 참여하고, 관련 내용을 정리해 일일이 알려주는 것도 그의 몫이다. 수시로 가족회의를 열어 실종자 수색과 시신 유실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한 뒤 이를 정부 쪽에 전달하기도 한다. 그는 “진도에서 보면 경황없는 가족들이 정부 관계자보다 훨씬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며 최근 열렸던 태풍, 장마 대비 유실방지 TF 회의를 언급했다.
“실종자 가족들이 시신 유실을 막을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달라고 요청하자 정부는 사고해점을 둘러싸고 저자망(底刺網·해저에 치는 긴 띠 모양 그물)을 25km 둘러싸겠다고 밝히더군요. 그런데 그 구역의 전체 길이는 약 35km입니다. 나머지 10km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자 비용 문제를 언급하여 25km만 하려고 했다는 거예요. 시신 유실을 막겠다고 그물을 치면서 공백을 남겨둔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까. 펄쩍 뛰니 결국 정부가 35km를 모두 둘러싸기로 결정했지요.”
배 변호사는 “이런 일이 반복되니 가족들이 사고 현장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라며 사고 초기부터 시신 유실방지 대책 마련을 주문했는데 아직까지 이런 상황”이라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정부가 태풍이 지나간 뒤 실종자 수색을 재개하는 시점부터 사용하기로 한 수색장비 리브리더(수중재호흡기)와 대형 바지선 투입, 잠수인력 충원 등도 가족들의 오랜 요구 끝에 받아들여진 것들이다. 가족들의 고통을 이야기하며 목이 메던 그는 “세월호 침몰 후 86일이 지나도록 정부는 가족만 쳐다보고 있다. 가족이 나서지 않으면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아직 배 안에 아이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다 잠시 말을 멈췄다.
지금도 미안한 것은 마찬가지
“아직 아이들이 배 안에 있어요.”
인터뷰 동안 그가 여러 번 되풀이한 말이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많은 사람이 ‘어른이라 미안하다’고 했죠. 구해주지 못해서, ‘그대로 있으라’고 해서, 이런 나라를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했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석 달이 지나도록 내부 격실조차 다 수색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우리 아이들이 배 안에 갇혀 있어요. 그래서 참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수십 차례나 수색했다고 장담한 격실과 복도에서 이제야 시신이 떠오르는데, 그 근처 부유물 사이에 여전히 있을지 모를 다른 시신은 언제 찾아낼 수 있을지 짐작조차 안 갑니다.”
그는 또 눈물이 솟구치는 듯했다. 그 미안함으로, 그리고 책임감으로 그는 “세월호 사건이 끝날 때까지 가족들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실종자 수색을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진도 현장 수색이 종료되면 그때부터 이 사건은 새롭게 시작될 겁니다.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대책이 마련돼야 할 테고, 유가족의 트라우마 치유도 필요하겠죠. 진도에 두 달 넘게 머문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해난 구조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책을 마련하는 것도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밤은 더욱 깊었고, 그때까지 기다리던 해장국집 주인은 가게를 정리해야 하니 이제 그만 나가달라고 했다. 그가 “몇 시지?” 하며 휴대전화 액정을 들여다보는데, 첫 화면 가득 귀여운 여자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도에 내려온 뒤부터 두 달째 만나지 못한 배 변호사의 여섯 살배기 외동딸이 그 안에서 아빠를 향해 웃고 있었다.
요즘 배 변호사의 일정은 말 그대로 살인적이다. 매일 아침 9시 진도군청에서 열리는 범정부사고대책본부 회의에 참석하고, 10시엔 수색구조실무자 회의, 오후 2시엔 격일로 수색구조장비 기술연구 태스크포스(TF)팀 회의 또는 유실방지 TF 회의가 그를 기다린다. 오후 5시엔 해양경찰(해경)이 하는 수색브리핑에 동석하고, 이후에도 오후 6시 실종자가족 회의, 오후 9시 세월호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상황본부 회의가 줄줄이 이어진다. 그사이 틈이 나면 세월호 사고 현장 바지선에 들러 수색상황과 유실물을 점검하고, 각종 회의자료와 기자 브리핑 내용을 만들며, 가족 면담도 한다. 오전 2~3시가 돼야 비로소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진도체육관 바닥 한쪽, 그의 잠자리에 몸을 누일 수 있다. 주말도, 휴일도 없는 강행군이다. 그는 이날도 진도행 ‘귀가’를 서두르느라 정작 서울에 있는 집엔 들르지도 못했다고 했다.
“서울에 다녀오지 않았더라도 이 시간에는 원래 깨어 있어요. 항상 긴장하고 있어서 그런지 졸리지도 않아요.”
주말·휴일도 없는 강행군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국물을 후루룩 마시던 그가 내놓은 답이다. “보세요, 아직 쌩쌩하잖아요” 하며 오른쪽 가슴을 ‘탕탕’ 두드려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반팔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팔뚝에는 주사바늘 자국이 선명했다. 낮 시간 진도체육관에서 만난 의료진은 배 변호사가 그사이 탈진해 몇 차례 링거를 맞았다고 귀띔했다.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하자 그는 “아유, 서너 번 맞긴 했는데…” 하며 민망해했다.
“가끔은 ‘몸이 부서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죠. 하지만 전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짜 걱정되는 건 하루하루 지쳐가는 가족들이에요.”
배 변호사는 “지금도 급성폐렴으로 쓰러져 목포한국병원에 입원한 실종자 가족한테 들렀다 오는 길”이라며 “그분들 앞에서 힘든 티를 낼 수가 없다. 그분들과 비교하면 사실 힘들지도 않다”고 힘주어 말했다.
서울에서 비영리 공익법률사무소를 운영하던 배 변호사가 실종자 가족들과 더불어 지내기로 마음먹은 건 세월호 침몰 직후부터. 4월 16일 사고 소식을 접한 뒤 내내 눈물이 쏟아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18일 동료 변호사와 함께 무작정 진도로 내려왔다. 그러나 가족들은 “변호사는 말로만 도와준다고 하지 실은 다 사기꾼 아니냐”며 그를 제대로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건 초기 가족들이 굉장히 힘드셨잖아요. 정부와 언론에 실망하고 모든 사람을 믿지 못할 때였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분들이 필요로 할 때 언제든 손 닿는 곳에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족대책위 사무실이 있는 경기 안산 ‘와스타디움’에 찾아간 건 그 때문이다. ‘변호사인데 도와드리고 싶다, 밖에 있을 테니 무엇이든 물어보시라’ 하고 하루 종일 벤치를 지키기 시작했다. 비가 내려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마침 배 변호사가 앉은 벤치 쪽에 나와 담배를 피우는 가족이 많았다. 그들이 눈물 흘릴 때마다 같이 우는 변호사에게 가족들은 실종된 아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집회 참여 요청이 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특검’은 뭐고 ‘특별법’은 또 뭔지 하나하나 묻기 시작했다. 그렇게 꼬박 닷새가 지나자 비로소 가족대책위로부터 “사무실에 들어와 보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진도 팽목항에 설치됐던 천막성당이 태풍으로 철거된 뒤 근처에 마련된 기도처에 나무를 엮어 만든 십자가가 놓여 있다.
“실종자 가족들이 시신 유실을 막을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달라고 요청하자 정부는 사고해점을 둘러싸고 저자망(底刺網·해저에 치는 긴 띠 모양 그물)을 25km 둘러싸겠다고 밝히더군요. 그런데 그 구역의 전체 길이는 약 35km입니다. 나머지 10km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자 비용 문제를 언급하여 25km만 하려고 했다는 거예요. 시신 유실을 막겠다고 그물을 치면서 공백을 남겨둔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까. 펄쩍 뛰니 결국 정부가 35km를 모두 둘러싸기로 결정했지요.”
배 변호사는 “이런 일이 반복되니 가족들이 사고 현장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라며 사고 초기부터 시신 유실방지 대책 마련을 주문했는데 아직까지 이런 상황”이라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정부가 태풍이 지나간 뒤 실종자 수색을 재개하는 시점부터 사용하기로 한 수색장비 리브리더(수중재호흡기)와 대형 바지선 투입, 잠수인력 충원 등도 가족들의 오랜 요구 끝에 받아들여진 것들이다. 가족들의 고통을 이야기하며 목이 메던 그는 “세월호 침몰 후 86일이 지나도록 정부는 가족만 쳐다보고 있다. 가족이 나서지 않으면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아직 배 안에 아이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다 잠시 말을 멈췄다.
지금도 미안한 것은 마찬가지
“아직 아이들이 배 안에 있어요.”
인터뷰 동안 그가 여러 번 되풀이한 말이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많은 사람이 ‘어른이라 미안하다’고 했죠. 구해주지 못해서, ‘그대로 있으라’고 해서, 이런 나라를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했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석 달이 지나도록 내부 격실조차 다 수색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우리 아이들이 배 안에 갇혀 있어요. 그래서 참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수십 차례나 수색했다고 장담한 격실과 복도에서 이제야 시신이 떠오르는데, 그 근처 부유물 사이에 여전히 있을지 모를 다른 시신은 언제 찾아낼 수 있을지 짐작조차 안 갑니다.”
그는 또 눈물이 솟구치는 듯했다. 그 미안함으로, 그리고 책임감으로 그는 “세월호 사건이 끝날 때까지 가족들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실종자 수색을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진도 현장 수색이 종료되면 그때부터 이 사건은 새롭게 시작될 겁니다.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대책이 마련돼야 할 테고, 유가족의 트라우마 치유도 필요하겠죠. 진도에 두 달 넘게 머문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해난 구조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책을 마련하는 것도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밤은 더욱 깊었고, 그때까지 기다리던 해장국집 주인은 가게를 정리해야 하니 이제 그만 나가달라고 했다. 그가 “몇 시지?” 하며 휴대전화 액정을 들여다보는데, 첫 화면 가득 귀여운 여자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도에 내려온 뒤부터 두 달째 만나지 못한 배 변호사의 여섯 살배기 외동딸이 그 안에서 아빠를 향해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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