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브로브니크 성벽 위에서 바라본 풍경. 푸른 아드리아 해와 붉은색 지붕들의 조화가 절묘하다.
여행 둘째 날 저녁식사를 마친 뒤 가볍게 와인 한 잔을 마시며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함께 여행을 떠나온 13명의 일행 앞에서 나는 이번 여행의 동기를 그렇게 말했다. 모차르트 음악여행이 테마라는 점도 내가 이 여행을 선택한 요인 중 하나였다.
지난해 11월 회사 창립기념일에 근속휴가증을 받았다. 15일짜리 이 휴가는 다음 해 10월 말까지 한꺼번에 써야 한다. 직장 상사나 동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쓸 수 있는, 흔치 않은 장기 휴가다. 하지만 겨울올림픽, 사이트 개편 작업, 6·4 전국동시지방선거, 월드컵 등 굵직한 이슈가 계속되는 2014년 상반기에 휴가를 내기는 쉽지 않을 성싶었다.
간간이 꽃샘바람이 부는 3월 어느 날, 사무실에서 펼쳐든 신문에 실린 광고 하나가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선착순 20명을 ‘명품 클래식 유럽여행’에 초대한다는 광고였다. 꼼꼼히 일정을 살펴보니 마치 나를 위해 만들어진 여행 같았다.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와 플리트비체,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와 잘츠부르크, 체코의 체스키크룸로프와 프라하 등 여러 도시의 관광명소를 둘러보고 천재 음악가인 모차르트가 쓴 작품의 공연과 오페라를 감상하는 일정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환상적인 두브로브니크 성벽
크고 작은 호수와 호수 사이에 92개 폭포가 형성돼 있는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여름 궁전이었던 쇤브룬 궁전. 모차르트가 8세 때 마리 앙투아네트 공주에게 청혼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가슴 설레는 그날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한 지 10여 시간 만에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공항에 도착했다. 케이블채널 tvN ‘꽃보다 누나’에서 눈여겨봤던 풍경이 내 눈앞에 영화처럼 펼쳐졌다. 역사여행가인 고(故) 권삼윤 씨가 쓴 책의 제목처럼 ‘두브로브니크는 그날도 눈부셨다’. 도시에는 붉은색 지붕과 하얀색 벽돌의 고풍스러운 옛집이 가득했고, 아드리아 해의 에메랄드빛 바다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13~16세기쯤 세웠다는 두브로브니크의 성벽 길도 걸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스르지 산 전망대에 올라 보석처럼 빛나는 아드리아 해의 두브로브니크 전경도 내려다봤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두브로브니크를 뒤로하고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세계자연유산인 이 국립공원은 크로아티아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손꼽힐 만큼 빼어난 절경을 자랑한다. 크고 작은 호수와 호수 사이에 92개의 폭포가 형성돼 있어 보기 드문 장관을 연출한다.
크로아티아 수도인 자그레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오스트리아로 이동했다. 현대식 미술관이 즐비한 그라츠를 둘러본 뒤 마침내 비엔나에 들어섰다. 모차르트와의 인연이 각별하다는 쇤브룬 궁전에도 들렀다. 모차르트는 이 궁전의 주인인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앞에서 종종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가 8세 때 여왕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 공주에게 “공주님, 저와 결혼해주시겠어요?”라며 깜찍하게 청혼했다는 일화도 전해온다.
비엔나에서의 첫날 저녁에는 빈 모차르트 오케스트라의 연주회를 감상했다. 연주회가 열린 무지크페라인 황금홀은 해마다 전 세계에 TV로 중계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가 열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벽과 천장이 온통 화려한 금박으로 치장된 황금홀은 한껏 멋을 낸 관객들로 만원이었다.
‘하프너 교향곡’으로도 부르는 모차르트 교향곡 35번 4악장이 맨 먼저 연주됐다. 춤추듯이 유연하고도 현란한 몸짓으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사람은 뜻밖에도 20대의 젊은 지휘자였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를 열연한 배우 톰 헐스보다 더 모차르트를 닮았다. 마치 진짜 모차르트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오케스트라의 선율은 매우 아름답고 서정적이었다. 번잡한 세상을 벗어나 오래된 성당에 혼자 있는 듯도 하고, 구름 위를 산책하듯 몽환적인 느낌도 들었다. 실타래처럼 엉킨 생각과 어수선한 소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음은 한없이 평온해졌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몰입됐던 그 시간은 더없이 소중했다.
오스트리아에서의 여정은 잘츠부르크로 이어졌다. 모차르트의 고향이자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지로 유명한 도시다. 모차르트 생가 박물관과 그가 세례를 받았던 대성당이 있어 전 세계 음악 애호가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도시 곳곳에 모차르트 동상과 기념품 상점이 즐비하다. 21세기 이 도시 사람들이 먹고사는 것은 순전히 18세기 모차르트 덕분인 듯했다.
잘츠부르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자리한 호엔잘츠부르크 성.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저녁에는 호엔잘츠부르크 성에서 실내악 콘서트를 감상했다. 성은 잘츠부르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위치한다. ‘후니쿨라’라는 모노레일을 타고 5분쯤 올라가야 된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잘츠부르크 시내가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냈다. 안개에 젖은 호엔잘츠부르크 성의 몽환적인 분위기와 모차르트의 음악이 절묘하게 어울렸다. 고색창연한 옛 성에서 식사하고 콘서트를 감상하는 나 자신이 옛 왕조의 귀족이라도 된 듯 괜스레 우쭐해졌다.
잘츠부르크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동화 속 호수마을’로 유명한 할슈타트가 있다. 우리가 찾아간 날에는 비가 내렸지만, 할슈타트의 그림 같은 풍경 속을 걷는 내내 동화 속 주인공처럼 행복했다. 유람선을 타고 모차르트의 외가 마을인 장크트 길겐에 잠시 들른 것을 마지막으로 오스트리아에서의 3박 4일 일정이 마무리됐다.
오스트리아에서 체코로 가는 왕복 2차선 도로에서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낙석이 도로를 막는 바람에 길 한복판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주변을 살펴보니 길 건너편 언덕에 소박한 레스토랑 하나가 눈에 띄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그곳으로 향했다. 현지 사람들이 즐겨 먹는다는 모차렐라 치즈 튀김과 웨지 감자를 안주 삼아 맛좋기로 소문난 체코 맥주를 한 잔씩 마셨다. 돌발 상황 덕에 뜻하지 않게 꿀맛 같은 휴식과 별미를 맛봤다. 바로 이런 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체코에서 첫 경유지인 체스케부데요비체는 순전히 하룻밤 묵기 위해 들렀다. 발랄하고 자유롭던 크로아티아와 오스트리아 도시들과 달리, 왠지 침울한 분위기만 가득 느껴지는 도시였다. 반면 체스키크룸로프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명성답게 생기 있고 화사했다. 어디든 카메라만 들이대면 그림엽서 속 풍경이 찍혔다. 특히 형형색색 카약이 점점이 떠 있는 몰다우 강에 붉은색 지붕의 집들이 반영된 풍경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촬영지로도 알려진 이 도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에 선 필자.
이번 음악여행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프라하 국민극장에서 관람했다. 1000석 규모의 객석과 소박한 외관을 갖춘 이 극장에서는 1787년 모차르트의 오페라 중 하나인 ‘돈조반니’가 초연되기도 했다. 당시 모차르트는 직접 피아노를 치며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그는 고향 잘츠부르크나 오스트리아 수도인 비엔나 못지않게 체코 프라하를 좋아했다. 자신의 후원자가 사는 곳이기도 했지만, 음악적 감수성이 풍부한 프라하 사람들에게 흠뻑 매료됐다. 프라하 시민들도 모차르트에 늘 열광했다. 우리 일행은 본고장 무대의 앞쪽 두 번째 줄에 앉아 가수들의 숨결까지 느끼며 오페라를 감상하는 호사를 누렸다. 공연이 끝나고 호텔까지 걸어가는 동안에도 쓰나미처럼 밀려든 감동의 물결은 좀처럼 스러지지 않았다.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이 방송된 뒤부터 프라하를 찾는 한국인이 폭발적으로 늘었다고 한다. 실제로 프라하 어디에서나 한국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특히 프라하를 가로질러 흐르는 블타바 강과 카를 다리 주변에서는 서울의 어느 거리처럼 곳곳에서 한국말이 들렸다. 수많은 관광객과 거리 악사, 노점상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카를 다리는 프라하의 랜드마크나 다름없다. 길이 520m의 보행 전용교인 이 다리는 프라하 성과 구시가광장 사이의 블타바 강을 가로지른다. 15세기 초 완공한 블타바 강 최고(最古) 다리인데도, 여전히 굳건하게 제구실을 다하고 있다. 이곳을 찾는 연인은 카를 다리의 역사만큼 오랜 사랑을 꿈꾸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다리 위에서 진한 키스를 나누는 연인의 모습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중세도시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체스키크룸로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왼쪽). 프라하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어두운 하늘 아래 빛나는 프라하 성의 야경이 환상적이다.
프라하의 5월은 낮이 아주 길다. 저녁 9시가 넘어야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고풍스러운 구시가지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인터콘티넨탈호텔 9층 식당에서 프라하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를 했다. 식당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우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넓은 통유리창 밖의 풍경 하나하나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이보다 더 완벽하고 훌륭한 실내장식은 없을 성싶었다.
프라하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이 낭만적인 중세도시에서 마지막 밤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우리는 구시가지의 숙소부터 카를 다리까지 이어진 길을 찬찬히 걸었다. 알록달록한 유리공예 상점이 즐비한 구시가지광장을 가로질러 20분쯤 걸리는 거리다. 쉼 없이 볼을 간질이는 밤공기가 풋풋하고 상쾌했다. 다음 날 아침이면 이 멋진 도시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몹시 아쉬웠다. 그러면서도 서울에 두고 온 가족이 문득 그리워졌다. 혼자서만 이 아름다운 도시에 왔다는 생각에 괜히 미안해졌다. 머지않은 날에 가족과 함께 다시 찾겠다는 다짐을 남겨둔 채 프라하를 떠났다.
이제 일상에 복귀한 지 한 달가량 지났다. 지금도 모차르트 음악의 선율과 프라하의 황홀한 야경이 눈앞 현실처럼 선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