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5일 새벽 당선이 확정된 박원순 새정치민주연합 서울시장 후보(왼쪽에서 세 번째)가 서울 종로5가 선거캠프에서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차기 대선주자로 자리매김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인
박원순 후보의 당선이 유력해 보이던 6월 초, 장안의 외교안보 전문가들이 모인 저녁식사 자리. 최대 관심사는 ‘박원순의 안보 분야 참모는 누구?’였다. 수일 내로 다가온 서울시장 선거의 승패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선거 전부터 이미 화두는 ‘대선주자 박원순의 미래’였다.
정치운동을 표방한 시민단체 모임 ‘희망과 대안’ 창립을 주도하며 현실 정치에 발을 디딘 지 5년,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의 극적인 단일화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지 2년 반. 짧은 정치 이력에도 여당의 차기 유력 대선주자였던 정몽준 후보를 꺾었다는 독보적인 성적표를 감안하면 자못 당연한 일이다.
박 당선인은 경남 창녕 출신으로 서울대 사회계열 1학년 재학 중 학생운동으로 제적당했다. 1980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대구지방검찰청에서 검사로 1년여 재직하다 83년 변호사사무실을 개업했다. 86년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과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 위원으로 시민운동에 뛰어들었고, 영국 연수를 마친 94년 참여연대 창립을 주도하며 시민운동진영의 얼굴로 떠올랐다. 2003년 참여연대를 떠난 이후에는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를 맡아 ‘소셜디자이너’ 작업에 몰두했다.
참여연대 사무처장 시절 간사들에게 ‘박변’으로 불리던 그의 고집과 워커홀릭에 가까운 일 욕심은 정평이 나 있었다. 당시 참여연대는 386 출신 젊은 운동가들과 박 처장을 중심으로 한 법조인 그룹의 연합체에 가까웠던 구조. 상하관계로 정리할 수 없는 이들과 함께 일하면서도 본인의 소신이나 시각을 쉽게 양보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실무 성과 못지않게 산뜻한 디자인, 감성적 홍보문구 등 ‘젊은 감각의 이미지 전략’에도 관심을 쏟는 성격 역시 이때부터 유명했다. 당시 참여연대가 비교 대상이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차별화되는 특징 중 하나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이는 서울시장에 취임한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이번 선거캠프 관계자의 설명이다. ‘하드웨어와 랜드마크 대신 소프트웨어와 공동체의 서울시를 만들겠다’는 그간의 시정 방향은 본인의 지론이라는 것. 네거티브 공세를 자제하고 젊은 층에게 어필하는 ‘다른 방식의 선거’를 고수해온 고집도 같은 맥락이다. 상대 후보와 상당한 지지율 격차를 유지했던 이번 선거에서는 부담이 덜했지만, 2011년 보궐선거 당시에는 캠프 내에서도 이러한 전략이 통할지를 두고 적잖은 논쟁이 있었다는 후문.
그러나 두 차례 선거를 통해 ‘박원순식(式) 선거운동’의 유효성은 입증된 셈이다. 기존 여의도 선거공학과는 다른, 세련되면서도 냉소적이지 않은 메시지 전달 방식이 새로운 정치에 갈증을 느끼는 서울의 중산층 유권자들에게 주효했다는 뜻이다.
공교롭게도 참여연대에서 함께 일했던 386 출신 시민운동가 상당수는 지난 총선에서 국회에 진출했다. 새정치민주연합 김기식, 정의당 박원석 의원이 대표적이다. 서울시에서는 2011년 보궐선거부터 결합한 기동민 정무부시장 등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의 보좌진 출신들이 측근으로 분류된다. 두 차례 선거에서 모두 기획과 전략을 맡았던 김윤재 미국변호사(법무법인 원) 등 해외 정치 경험을 지닌 전문가도 포진해 있다. ‘대선주자 박원순’이라는 그림이 본격화할 경우 자산이 될 수 있는 인맥이다.
기자는 2002년 박 당선인 인터뷰를 위해 서울 압구정동의 자택을 방문한 적이 있다. 집이 무너지지 않을까 염려스러울 정도로 쌓아올린 책과 서류더미들이 인상적이었다. 인터넷 시대에도 칼로 오리고 붙이는 ‘구닥다리 신문 스크랩’ 습관을 버리지 못했던 것 역시 특이했다. “남들 눈에는 난장판에 불과할 기사들 속 질서와 체계는 혼자 간직한 소년 시절 비밀처럼 짜릿하다.” 캐릭터를 한눈에 보여주는 당시 그의 말이다.
5선 내려놓고 낮은 행보
새 바람이 위력적
남경필 경기도지사 당선인
6월 2일 남경필 경기도지사 후보가 경기 수원 팔달구 지동 시장에서 열린 새누리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가 끝난 후 취재진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남 당선인을 설명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은 부친인 고(故) 남평우 의원이다. 운송회사와 지역 언론사를 경영하며 1980년대부터 경기 수원 일대에서 탄탄한 기반을 쌓은 그는 재선에 성공하고 2년 만인 9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장남인 남 당선인은 그해 열린 보궐선거에서 지역구(수원 팔달)를 물려받아 국회에 진출한다. 해외유학 중에 갑자기 귀국해 뜻하지 않게 정치에 뛰어든 당시 선거를 그는 인생의 가장 결정적인 터닝포인트로 꼽아왔다.
이후 19대까지 총 다섯 차례 선거에서 승리한 남 당선인은 당내 주류에 도전하는 ‘여당 속 야당’의 이미지를 축적해왔다. 2003년 12월 당내 5, 6공 세력 용퇴론의 선봉에 섰던 것이 그 첫 사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는 이상득 의원의 불출마를 공개적으로 요구하다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로부터 사찰을 당하는 수난을 겪었지만, 거듭되는 선거 승리와 당이 위기에 빠졌을 때마다 대변인, 수석 원내부대표, 최고위원 등으로 활약하며 쌓아온 차세대 이미지는 부친의 그림자를 뛰어넘은 지 오래라는 데 이견이 없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 그가 경기도지사 출마를 내심 반기지 않았음은 잘 알려진 사실. 현역의원 신분을 버리고 ‘수도권 필승카드’로 떠밀리다시피 출마한 그는 선거 기간 내내 ‘낮은 행보’ 전략으로 바닥 민심을 다졌다. 당내 경선이 한창이던 세월호 참사 당일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함께 진도실내체육관을 찾았을 때도 카메라 뒤로 물러선 자세를 지킨 것이 대표적이다. ‘당내에서는 당당하게, 당 밖에서는 겸손하게’라는 전략이야말로 이제부터 구체화될 ‘큰 꿈’의 가장 큰 무기인 셈이다.
튀지 않는 ‘朴의 남자’
파란의 주인공으로
유정복 인천시장 당선인
유정복 인천시장 당선인.
2005년 11월 초선의원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당대표 비서실장에 발탁된 것이 시작이었다. 2007년 경선후보 비서실장, 2012년 대선후보 직능총괄본부장, 2013년 대통령취임준비위원회 부위원장 등 주요 고비마다 박 대통령과 함께 했다. 2010년 ‘친박(親朴) 포용’ 차원에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에 임명됐으나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고,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초대 안전행정부 장관직을 맡았다가 이번 선거 출마를 위해 사임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엘리트 공무원 출신 정치인’의 흠잡을 데 없는 이력이지만, 위기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찾아왔다. 세월호 참사와 안전행정부의 부실 대응이 도마 위에 오르면서 직전까지 장관을 지낸 유 당선인에게도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 이 때문에 경선후보 시절 최대한 선거운동을 자제했던 유 당선인은 5월 9일 후보 확정 이후로는 공세적 자세로 선거에 임했다는 게 중평이다. 중앙정부와의 시정 연계를 강점으로 내세우며 기선 제압에 나섰다는 것. 결과는 재임을 노리는 송영길 인천시장을 꺾고 광역단체장에 당선되는 파란. ‘오차범위 안 열세’라는 선거 기간 지지율 추이를 넘어선 0.8%p 차이 신승이었다.
여의도 정가에서는 그의 공무원 출신다운 성실하고 신중한 태도를 강점으로 꼽는다. 행정자치위원회, 건설교통위원회, 국토해양위원회 등 상임위원회 활동 역시 ‘튀지 않게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로 요약된다. 지방행정 전문성에 모든 초점을 맞춰온 이력이 국제도시 이미지와 엄청난 부채라는 두 얼굴을 지닌 인천시장 직무에서 어떻게 발휘될지가 향후 관심 포인트다.
때 묻지 않은 경력
현장 행정 구체화 과제
윤장현 광주시장 당선인
6월 4일 밤 당선이 확정된 윤장현 새정치민주연합 광주시장 후보가 환한 얼굴로 기뻐하고 있다.
그러나 결과는 강운태 시장을 26.1%p 차로 따돌린 압도적 승리. 짧은 선거 운동 기간 광주를 세 차례 방문한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이어지면서 빠른 속도로 지지율이 상승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지역 민심이 ‘당심’을 외면하지 않은 결과라는 것. 거꾸로 말하자면 오로지 당의 힘만으로 당선됐다는 이미지가 윤 당선인의 한계로 남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조선대 의학과를 졸업해 1983년 안과의원을 개업한 이래 광주·전남 지역 시민운동 진영에서 활동해온 윤 당선인은 자타가 공인하는 ‘광주 토박이’다. 80년 5·18 현장에서 시위대를 치료하기도 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광주·전남환경운동연합, 광주YMCA 등 그간 몸담았던 단체 성향만 놓고 보면 시민운동 진영 내에서는 중도진보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게 활동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정계와는 거리가 멀던 윤 당선인이 현실 정치에 뛰어든 것은 2013년 12월 당시 안철수 의원의 신당창당준비기구였던 새정치추진위원회의 공동위원장을 맡으면서부터. 이후 민주당과의 합당 과정에서 창당준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거쳐 지방선거에 나섰다.
행정고시 출신으로 중앙부처 장관과 3선 의원, 야당 사무총장을 거친 중진 강운태 후보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이력. 광주 현지에서는 이렇듯 ‘때 묻지 않은 경력’이 오히려 참신성이라는 강점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지방선거가 실시된 이래 광주에서 정치인이나 행정가 출신이 아닌 인물이 시장으로 당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긴 시간 이어져온 지역정계 인맥에 대한 불만이 호남을 텃밭으로 여기는 당에 대한 반발을 넘어선 결과라는 분석이다. 박원순과 안철수로 상징되는 ‘새 정치 바람’을 지역에서 현장 행정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이 윤 당선인에게 주어진 임무인 셈이다.
바닥 민심 끌어안기
특유의 친화력 발휘
최문순 강원도지사 당선인
6월 4일 오전 가족과 함께 춘천시 후평1동 제1투표소를 찾은 최문순 새정치민주연합 강원도지사 후보.
1956년 춘천에서 태어나 춘천고와 강원대를 졸업한 최 당선인은 잘 알려졌다시피 MBC 기자 출신이다. 84년 입사해 95년 노조위원장으로 일하다 해직된 뒤 1년 만에 복직했고, 98년부터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을 지냈다. 이때만 해도 속칭 ‘잘나가는 기자’는 아니었다는 게 당시 함께 일했던 MBC 동료들의 평가.
그러나 2003년 보도제작국 2CP(책임프로듀서)를 거쳐 노무현 정부 시기였던 2005년 대표이사에 발탁되기에 이른다. 부장대우에서 사장으로, 사상 최연소 기록을 남긴 파격 인사였다. 2008년 2월 퇴임한 그는 석 달 뒤 치른 18대 총선에서 민주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진출했고, 임기를 1년여 남겨둔 2011년 강원도지사 보궐선거에 뛰어들어 고향 선배이자 MBC 선배인 엄기영 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누르고 이광재 전 도지사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이번 선거 승리는 이러한 이력과는 크게 관계없다는 게 지역 언론들의 평가다. 20, 30대뿐 아니라 중·장년층에서도 상당한 지지를 끌어모은 것은 3년여 지사 재임 동안 발휘한 특유의 친화력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 당초 출신지역인 영서에 비해 열세로 분류되던 영동에서도 선전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 최 당선인이 중앙당 전략전문가의 지원을 거절한 채 스스로 지역 밀착형 공약을 발굴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 두 딸을 둔 화목한 가정의 ‘서민 도지사’라는 이미지 전략도 큰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최 도지사의 향후 행로가 간단치 않을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이번 선거에서 강원도 기초단체장 18곳 중 새정치민주연합은 원주 한 군데만 차지했고, 15곳은 새누리당에게 돌아갔다. 도의회 역시 새누리당이 44석 가운데 36석을 차지해 이전에 비해 여당 강세가 한층 강화됐다. 그의 ‘친화력 리더십’이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불굴의 인생 살아온
‘7전 전승 승부사’
이시종 충북도지사 당선인
6월 5일 새벽 충북도지사 당선이 확정된 이시종 새정치민주연합 후보가 선거사무실에서 지지자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있다.
고교 동창인 두 사람은 2008년 18대 총선에서도 고향인 충주에서 맞붙은 바 있다. 당시에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경합 끝에 현역 국회의원이던 이 당선인이 1582표 차(1.95%)로 승리했다. 이 당선인은 2010년 충북도지사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정우택 후보와 시소게임을 벌이다 근소한 차로 이긴 일이 있다.
1995년 민선 충주시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정치에 뛰어든 이 당선인은 이후 7번의 선거에서 모두 승리한 ‘불패의 정치인’이다. 그러나 앞선 사례에서 보듯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돌아보면 인생 여정도 그렇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중앙부처를 두루 거치다 정계에 진출한 그는 일견 탄탄대로를 걸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곳곳이 험로였다. 1947년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지역 명문 청주고에 입학하고도 집안 형편 탓에 농부, 지게꾼, 광부 등으로 돈을 벌며 학교에 다니느라 고교 과정을 4년 만에 마쳤다. 서울대도 고학으로 졸업했다. 그의 저서 ‘토박이 이시종의 충북생각’에는 행정고시 합격 후 “공직을 떠나면 마치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겨 다른 데는 눈도 돌려보지 못했다”는 대목이 있다. 이런 절박함에서 유래한 성실함은 이 당선인의 가장 강한 경쟁력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의 재선 가도가 순탄할 것 같지만은 않다. 6·4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충북도의회는 31석 가운데 새누리당이 21석을 차지했다. 충북도에서 도지사 소속 정당이 도의회 다수당이 되지 못한 건 20년 만의 일이다. 이 당선인의 정치적 동반자인 한범덕 청주시장의 낙선도 타격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불굴의 승부사’ 이 당선인이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