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동명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다. 번역본 500쪽이 넘는 장대한 이야기는 한 세기에 걸친 노인의 삶을 다루고 있다. 1900년대, 즉 20세기 100년이라면 바야흐로 격동의 세기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요양원에서 100세 생일을 맞는 노인에게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겠나 싶지만, 작가는 이 뻔한 관습적 상상을 전복한다. 너무나 평범하지만 의외로 특별한 인생을 살아온 할아버지 이야기,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핵심은 바로 여기 있다.
이런 식이다. 정규 교육 경험은 만 9세까지가 전부인 알란이지만 그가 만난 사람들을 따져보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저리 가라다. 스페인 내전 때 프랑코를 만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트루먼과 레이건을 만났으며, 스탈린에게 납치되기도 했다. 게다가 냉전시대엔 미국과 러시아의 이중 스파이로 활약하기도 했다. 요양원에서 마지막 생애를 보내는 노인치고는 정말 화려하고 드라마틱한 인생이다.

이 과장법은 비약과 능청에 뿌리를 둔다. 그리고 그 능청 밑바닥에는 우리가 유머라고 부르는 웃음의 미학이 자리 잡고 있다. “인생 뭐 있어?”라고 눈을 찡긋하며, 이 지긋지긋하게 비극적인 삶에 휴양림이 돼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돈가방을 들고 도망 다니는 노인 일당이나 그들을 쫓는 악당 중 진짜 ‘악’은 없다. 선량한 범죄와 도덕적 반칙은 일상에서 결코 얻을 수 없는, 달콤한 일탈의 선물로 그려진다.
굳이 소설과 비교해 우열을 가려보자면 대답은 유보적이다. 이는 모든 소설 원작 영화가 갖는 숙명이기도 할 테지만, 아무래도 작가 요나스 요나손이 행간마다 뿌려놓은 뻔뻔한 웃음을 모두 살려내기엔 역부족인 게 사실이다. 소설 속 100년을 제한된 러닝타임 안에서 재현하려면 선택과 배제가 필수적이니 말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북유럽 영화의 이채로운 질감은 매력적이다. 억만 달러 수준의 기술적 완성도가 주는 시각적 즐거움과는 다른 여유와 즐거움이 있다. 얼렁뚱땅한 매력을 지닌 배우들의 연기와 어딘가 성긴 듯한 이야기, 간혹 다르다는 것은 매력과 동의어가 된다. 엉뚱한 유머도 넉넉히 즐길 수 있는 여유, 그런 여유가 바로 행복의 지름길일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