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2일 경기 안산시 단원고 교문 앞에 시민들의 안타까움이 담긴 편지와 꽃들이 놓여 있다.
4월 22일 경기 안산시 고려대 안산병원 장례식장 지하 1층 복도. 교복을 입은 20명 아이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국화꽃에 둘러싸인 친구 얼굴이 거짓말 같았다. 학생들이 있어서는 안 될 공간을 가득하게도 채웠다. 그들을 둘러싼 자원봉사자도, 일반인도 볼에 힘을 가득 주고 모두 숨죽여 바라봤다. 계단 위까지 아이들의 울음이 닿아 건물 전체를 울렸다.
고인을 위해 기도하는 소리가 울음에 섞여 잘 들리지 않았다. “죄 없는 우리 영혼에 새 생명 주옵시며, 주 안에 영원한 안식 누리게 하옵소서….” 성수를 뿌리는 사람들 뒤로 고인의 어머니는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까만색 옷과 넥타이를 어색하게 입은 어린 동생의 볼에는 솜털이 보송했다.
149.39km2. 안산시는 경기도의 1%에 해당하는 작은 넓이에 안산·시화스마트허브(옛 반월·시화산업단지)와 주거 지역이 밀집해 유독 시민 공동체 문화가 발달한 도시다. 규모가 작다 보니 주민끼리도 가깝다. 2014년 3월 말 기준 안산시 인구 현황에 따르면 단원구에 18세 인구는 총 5469명. 아이들은 두세 명만 건너면 내 언니, 내 동생, 내 가족이 되는 사이다. 그러니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로 학생 248여 명(사망 134명, 실종 114명, 4월 24일 기준)을 잃은 안산 시민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먹는 것도 죄스러운 마음
4월 22일 오후 4시 단원구 적금로 고잔초교 앞 횡단보도. 아파트와 빌라가 20여 단지 모여 있는 이 길에는 스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단원 구민 김은숙(가명·58) 씨는 장을 보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이웃 주민을 만났다.
“친구 아들도 실종됐다네. 남편은 쓰러졌다니께. 지금 고대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서 거기 가봐야 돼야.”
김씨는 이웃들의 좋지 않은 소식을 접하자 심장에 뜨끈한 물을 뿌린 듯 섬뜩했다. 하지만 워낙 큰일이다 보니 아는 주민에게 안부 묻기가 두려웠다. 김씨는 요즘 매일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글쎄, 밤에도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잠이 안 와요. 또 무슨 일이 내 주변에서 일어날까 무섭고 속상하고…. 아이들이 물도 안 닿고 음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곳에 반드시 살아 있을 것 같아요.”
가슴이 먹먹 뭐라 이야기해야…
4월 22일 경기 안산시의 분위기는 차분하다 못해 침통했다. 위부터 홈플러스 안산고잔점, 단원고 앞, 올림픽기념관 실내체육관 내부.
사고 후 안산 시민은 노는 것, 먹는 것 모두 아프고 죄스러운 마음이다. 단원구청 옆 화랑유원지도 평소와 달리 조용했다. 네 살배기 아이를 데리고 나들이를 나온 엄마는 이웃들과 이야기하다 종종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화랑유원지 내 경기도미술관은 한 달 정도 휴관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경기도미술관 정승희 대리는 “평소 하루 400명에서 500명, 주말에는 1000명 가까이 방문한다. 이번 주에는 100명이 안 된다. 추모 의식에 동참하려고 휴관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4월 21일 저녁 8시 30분 NC백화점 안산 고잔점 모습도 안산 시민의 슬픈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청소년이 좋아할 만한 캐주얼 매장은 드문드문 보이는 점원 외에 사람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한 매장 점원은 “체감하기에도 사람이 너무 없다. 심각한 편”이라고 했다. 비슷한 시각 영화관 CGV 안산을 방문해 번호표를 뽑아보니 ‘90’이라는 숫자가 찍혀 나왔다. 이날 하루 동안 현장 예매를 한 사람이 90명도 안 된다는 얘기였다.
4월 21, 22일 이틀 동안 찾은 단원고 앞은 통곡의 바다였다. 단원고는 사고 직후 휴교했다. 24일부터 다시 등교할 학생들을 위해 교직원, 학부모, 필수 인력 외에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경찰 5명, 학교 관계자 2명이 학교 앞을 막았다. 교문 옆에는 1학년 6반 학생의 이름표가 붙은 책상 하나, 그 위에 접착 메모지 한 덩어리, 볼펜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담장에는 누군가 갖다 놓았는지 모를 향초 11개가 피어올랐다. ‘어서 돌아오라’는 편지는 학교 담장 두 칸을 가득 메웠다. 한 중년 여자는 쪽지를 붙이며 한 손으론 입을 가리고 한 손으로 아이 볼을 쓰다듬듯 교문을 어루만졌다.
촬영용 카메라를 들고 있던 어떤 기자의 얼굴은 눈물이 마르다 못해 눈, 코, 입이 붕어처럼 퉁퉁 부어 감각이 없을 것 같았다. 테이프가 돌아가는 녹음기를 들고 교문 앞에서 인터뷰를 하는 일본 기자도 보였다. 어떤 외국인은 가슴 아픈 메시지를 담은 편지와 촛불, 기도하는 사람들을 촬영했다. 일주일 전 일상과는 너무도 다른 낯선 풍경이었다.
술 취한 노인이 한 손에 국화를 꼭 쥔 채 교문 앞 경찰에게 다가와 아이들을 살려달라며 실랑이를 벌였다. 파란 옷을 입고 교문을 바라보던 한 중년 남자는 한참 교문을 바라보다 거친 욕설을 토해냈다. “·#51932;·#51932;·#51932;들. 전부 다 사형시켜버려야 해. ·#51932;·#51932; ·#51932;·#51932;들.” 지켜보던 사람들은 말을 아꼈다. 정적을 깨고 중학생 4명이 자전거를 탄 채 교문 앞을 깔깔거리며 지나가자 등산복을 입은 아주머니가 그들을 나무랐다. “너희 단원중 학생들 아냐? 지금 이렇게 떠들면 되니?” 학생들은 “우리 단원중 안 다녀요!”라며 멀찍이 도망갔다.
기자에게 한 할머니가 다가와 말했다. “멀리 사는 사람들은 TV으로 봐서 (슬픔이) 덜한가 봐. 우리 손주가 강서(고) 다니거든. 고3인데 ‘할머니, 나 어떡해요’ 하고 운다고. 후배들이라고. 이거 이 일은 뭐로도 수습 못 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야.”
그러자 옆에 있던 주민도 같이 울먹이며 분노를 토해냈다. “내가 죽으면 괜찮다고. 난 70 가까이 살았으니까 살 만큼 살았지. (학생들은) 펴보지도 못한 꽃들이야. 남의 새끼 내 새끼 할 것 없어. 세상천지에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느냐고. 어떻게 그 아이들에게 고물덩어리를 태워 그래. 천하의 벌 받을 것들.” 길 건너 작은 정자엔 파란 마스크를 쓴 백발 할머니 4명이 앉아 망연하게 학교를 바라봤다.
4월 22일 7시 30분 단원로 끝에 위치한 올림픽기념관. 땅거미가 어스름해지자 쨍한 전구가 기념관을 밝혔다. 대한적십자사 봉사자들이 시끌벅적하게 구호물품 수량을 확인했다. “음료수는 몇 개 나갔어요? 아메리카노, 티(차)까지 두 박스인가. 오렌지주스는 7개죠. 우리가 왔을 때 있던 그대로네요. 더는 안 갖고 왔으니까.”
대한적십자사 홈페이지에 따르면 4월 16일 이후 단원고와 올림픽기념관에 직원 및 봉사자 747명, 급식 5882인분이 지원됐다. 봉사자 윤선희(54) 씨가 입은 샛노란 조끼 왼쪽 가슴에는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자원봉사회’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경기 시흥에서 왔다는 윤씨는 “마음을 나누고 아픔을 나누고 싶어 왔어요. 자식 키우는 엄마 처지에서 너무 안쓰럽고. 뭐라고 이야기를 할까요. 말을 잃었다고 해야 하나. 어휴, 모르겠네요”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윤씨의 코가 붉어졌다.
올림픽기념관 실내체육관 내부에서는 바스락바스락 풀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 중년 아주머니가 종이 위에 쭈그리고 앉아 솔을 풀에 푹 찍어 꼼꼼히 발랐다. 임시합동분향소 마련이 한창이었다. 장례업자들은 정해진 자리에서 일사불란하게 꽃을 자르고 날랐다. 국화꽃 향기가 아릿하도록 났다.
4월 22일 저녁 8시 적금로에서 광덕대로로 되돌아 나오는 길 위에는 희생자를 추모하고 실종자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수십 장의 현수막이 나붙어 있었다. 경기 안산교육지원청은 결연한 의지를 담은 현수막을 걸었다. ‘우리는 절대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겠습니다. 빠른 치유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안산교육지원청은 사고 이후 고려대 안산병원, 단원고와 함께 통합재난심리지원단을 꾸렸다. 경북대 정신건강센터로부터 도움을 받고, 전문가교육을 받은 전문치료사와 상담치료사를 모았다.
안산의 아픔과 상처 보듬어야
4월 22일 ‘안산시민촛불’ 행사에서 기도하는 시민들.
임승연(19) 군이 나와 실종자인 단원고 교사 박OO 씨에게 띄우는 편지글을 읽었다. 임군은 중학생 때 학생부 교사로 있던 박씨가 축제를 준비할 당시 빵을 사주던 추억을 이야기했다. 목소리가 실처럼 가늘게 떨렸다. 퇴근하자마자 달려온 듯 양복을 입은 남자는 초를 들고 찬 바닥에 앉아 임군의 사연을 들었다. 남자는 두 손으로 잡았던 촛불을 한 손으로 고쳐 쥐고 이마를 벅벅 긁었다. 이내 손이 눈 밑으로 내려갔다.
안산 상록구에 사는 유민선(30) 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초를 들고 기도하는 것이 전부라고 했다. 유씨는 “빨리 돌아오면 좋겠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일손 돕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답답한 마음”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안산문화광장 한쪽에는 실종자 이름이 적힌 편지들이 주인을 간절히 기다렸다. ‘고OO 선생님, 제발 돌아오세요’ ‘OO아, 기다릴 테니 빨리 돌아와!’ ‘OO형 얼른 같이 다시 인라인 타자’….
행사가 끝나고 찾아간 안산문화광장 옆 주점은 썰렁했다. 2층까지 테이블이 놓인 한 치킨가게는 영업이 한창일 밤 9시에도 허전한 바람만 가득했다. 카운터를 지키던 변경희(43) 씨는 “장사를 하고 있으면서도 장사가 안 돼 불편한 것보다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며 마음 아파했다.
“손님들도 술을 먹을 때 ‘우리만 이렇게 먹고 놀아도 되는 건가’ 하며 미안해하죠. 우리 앞집 아들도 거기(단원고) 다니거든요. 요즘에도 TV 보고 많이 울어요. 딸애도 고2여서 아는 애가 있더라고요. 다 이웃이에요. 사장님도 일하다 많이 울었어요.”
‘세월호 침몰사고 문제 해결을 위한 안산시민사회연대’의 한 관계자는 “책임감을 갖고 장기적으로 안산 시민이 일상으로 잘 복귀할 수 있도록 물질적 연대보다 마음의 힘을 모을 것”이라며 “안산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는 일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안산시민촛불’ 행사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동요 ‘고향의 봄’을 부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숙연한 분위기에서 안산 시민은 서로의 마음에 하나 둘 위로의 꽃씨를 심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