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고 있는 전남 진도군 팽목항 전경. 세월호 실종자 가족과 자원봉사자 등이 사용하는 천막이 늘어서 있다.
팽목항 천막에 붙은 응원 메시지를 보고 있는 시민.
4월 22일 밤 8시 반. 전남 진도군 팽목항 부둣가를 한 남자가 중얼대며 걷고 있었다. 이미 해가 져 사위가 컴컴했지만,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로 그가 흐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해양경찰(해경) 관계자가 팽목항 가족대책본부를 찾아 세월호 침몰 현장에서 인양한 시신의 인상착의를 막 설명한 뒤였다.
“여자 150cm가량, 통통한 체격이고요. 얼굴은 계란형입니다. 긴 생머리에 윗니 왼쪽에 덧니가 있습니다.”
키 175cm가량 되는 마른 체격 남자, 학생증으로 신원이 확인된 또 다른 남자…. 차가운 밤바다에서 팽목항으로 들어오고 있는 시신 세 구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그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리고 찬바람 부는 바닷가에서 홀로 울먹이며, 딸이 듣지도 못할 이야기를 계속 건넸다.
2시간 뒤 팽목항 북쪽 끝에선 여자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흰 천막으로 만든 신원확인실에서 아들 시신을 확인한 어머니의 절규였다. “아악” 외마디로 시작한 오열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아이 아버지인 듯한 남자가 온 힘을 다해 감싸 안아도 여자의 경련을 멈출 수 없었다. 끝내 탈진해 의무실로 옮겨진 어머니는 한참을 더 신음처럼 아이 이름을 불렀다.
“그래도 잘 됐어, 잘 된 거야.”
숨도 크게 쉬지 못한 채 여자를 바라보던 이들이 그제야 나지막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팽목항 바닷가를 서성이던 그 남자처럼, 아직 아이를 찾지 못한 부모들이었다. 아이를 바다에서 건진 부모도, 여전히 품에 안지 못한 부모도, 그렇게 통곡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밤이 깊어갔다.
한 아버지는 그 와중에도 남은 자식을 챙겼다. 통곡과 속삭임만 오가던 천막 안에서 도드라지게 씩씩한 목소리로 전화를 건 남자였다.
“그래, 지금 찾았다.”
목소리 마디마디에 힘을 실으며 그는 말했다.
“내가 잘 데려갈 테니, 걱정 말고 푹 자라. 그래, 아버지 운전 조심할게. 얼른 자.”
아들 시신 확인, 끝내 탈진한 어머니
짧게 이어진 통화 사이에 그는 네 번이나 아이에게 ‘자라’고 했다. 막 물에서 건져 올린 아들의 시신을 확인해놓고, 형제 잃은 다른 자식 걱정에 슬픔조차 감춘 것이다. 다른 가족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아버지 혼자 아이를 확인하고, 안산에서 기다리는 또 다른 아이에게 소식을 전한 뒤 시신을 실은 구급차를 따라 안산까지 먼 길을 운전해가려는 듯 보였다.
23일 새벽, 또 한 무리의 실종자 가족이 시신을 확인했다. 또 한 번 팽목항이 눈물로 뒤덮였다.
4월 16일 세월호를 집어삼킨 뒤 거친 물살로 실종자 수색조차 방해하던 맹골수도 해역이 22일부터 24일까지 사흘간 잠잠했다. 소조(小潮)를 맞아 조류 흐름이 느려지고, 잠수부의 선내 진입이 원활해졌다. 시신이 속속 뭍으로 올라와, 24일 마침내 사망자 수가 실종자 수를 넘어섰다. 이제 아이가 살아 돌아오리라고 기대하는 부모는 그리 많지 않은 듯했다. 한동안 신앙처럼 떠돌던 ‘에어포켓’에 대한 기대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래도 시신이 발견되면 어김없이 오열이 터져 나온다.
현재 해경은 시신을 수습하면 현장에서 인상착의를 기록한 뒤 이 정보를 곧바로 실종자 가족이 모여 있는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에 보내고 있다. 가족들은 그 내용을 보고 시신이 자녀로 판단되면 팽목항에 설치된 신원확인실을 찾아 직접 시신을 본다. 시신이 인양된 뒤 신원확인실에 도착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2시간 안팎. 인양 소식이 계속 전해지면서 가족들은 팽목항에 발이 묶였다. 애초 실종자 가족 대기실로 마련한 진도실내체육관까지 왕복 34km 거리가 부담스러운 것이다.
팽목항 남쪽 끝에는 천막 54개를 붙인 뒤 매트를 깔아 만든 임시 숙소가 있다. 비바람을 겨우 가리는 그곳에서 쪽잠을 청하며 인양 소식을 기다리는 이가 수백 명이다. 가족대책본부 옆 천막에서 플라스틱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이도 많다.
전남 진도 바다에서 인양된 시신이 팽목항으로 들어오는 모습(왼쪽)과 진도실내체육관에서 오열하는 실종자 가족.
가족대책본부 위치는 임시 숙소와 신원확인실의 중간쯤. 숙소에서 대책본부까지 보통 걸음으로 1~2분, 그곳에서 신원확인실까지는 또 2~3분이 걸린다. 가족들은 그 거리를 종일 서성대며 아이 소식을 기다린다.
해경 관계자가 새로 인양한 시신 인상착의를 설명하려고 마이크를 집어 들면 순식간에 수십 명이 천막 앞으로 모여들어 애타는 질문을 쏟아낸다.
“(발견된 시신) 얼굴에 여드름 자국은 없었나요?”
“오른쪽 무릎 아래 압력밥솥에 데인 흔적이 있을 거예요, 그렇죠?”
“제 코를 보세요. 그 아이 코가 이렇게 생기지 않았나요?”
그들 중 상당수는 손바닥만하게 인쇄한 아이 사진을 가슴팍에 걸고 있다. 일반인과 실종자 가족을 구별하기 위해 19일부터 목에 걸기 시작한 명찰에 아이 사진을 붙인 것이다. 22일부터는 가족별로 한 개씩 파란 식별조끼도 지급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팽목항에는 이렇게 하나 둘 질서가 생기고 있다. 실종자 가족과 공무원, 기자가 뒤엉켜 혼란스럽던 광경도 많이 정리됐다. 경찰이 곳곳에 폴리스라인을 치고 실종자 가족을 보호한다. 언론인들도 자발적으로 기준을 세워 사진촬영과 취재를 자제하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도 실종자 가족을 돕는 중이다. 사고 일주일 사이 진도를 찾은 봉사자는 연인원 1만 명이 넘는다. 이들은 끼니때마다 밥을 하고, 각종 식음료와 생필품을 제공하며, 쓰레기를 줍고, 실종자 가족 의류 세탁과 휴대전화 충전을 도맡고 있다. 팽목항 곳곳에 설치한 이동식 화장실 청소도 이들 몫이다. 안산지역 개인택시기사도 상당수가 팽목항에 머물고 있다. 이들은 차량에 ‘세월호 유가족 수송차량’이라는 안내문을 붙이고 아이 시신을 찾은 부모를 팽목항부터 안산까지 무료로 태워주는 봉사를 한다. 사고 후 여러 날을 팽목항에서 뜬눈으로 지새운 가족들이 아이 시신을 실은 구급차를 따라 직접 수백km 거리를 운전하는 건 위험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정작 모두가 애타게 기다리는 실종자를 찾아주지는 못하고 있다. 가족들은 소조가 끝나는 24일까지 생존자 확인과 시신수습을 완벽하게 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했지만, 24일 오후 7시 현재 여전히 131명이 실종 상태다.
기약 없는 시간이 흐르면서 심신이 극도로 약해진 이들이 하나 둘 탈진 증세를 보여 의료진에는 비상이 걸렸다. 진도실내체육관 곳곳에 설치된 간이침대에 누워 수액을 맞는 등 치료를 받은 이가 일주일 사이 700명이 넘는다. 23일에는 한 중년 남자가 체육관을 뛰어다니며 의미 없는 고함을 지르다 병원으로 이송됐다.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한 의사는 “불면증과 불안 증세를 호소하는 이가 많다. 앞으로가 더 큰 문제”라고 했다. 일주일 넘게 차가운 물속에 잠겨 있는 아이들이 올라오지 않는 한, 이 비극이 끝날 리 없기 때문이다.
1993년 292명이 사망한 서해훼리호 사고수습이 끝난 뒤 전북도는 이 사건을 ‘인재’로 규정했다. 추후 같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사전에 구명장비를 정비하고, 승선자 명부를 철저히 작성해야 한다는 내용의 백서도 펴냈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에서 실수는 고스란히 반복됐다. 구명벌(둥근 모양의 구명보트) 46개 중 제대로 펴진 건 1개뿐이고, 승선인원은 수차례 오락가락했다.
팽목항 가족대책본부에 설치된 게시판에서 인양된 시신 정보를 확인하는 실종자 가족들(왼쪽)과 진도실내체육관에서 가족들에게 식사를 전달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
사고 이후 수습 과정도 참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현장 관계자들은 허둥댔고, 구조 장비는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 실종자 가족들이 초기부터 요구한 집어등 달린 어선과 대형 바지선은 한참이 지나서야 투입됐다. 정치인의 실언이 이어졌고, 일부 관료들은 가족들 옆에서 기념사진을 찍거나 컵라면을 먹어 구설에 올랐다. 정부는 구조자 명단을 수차례나 수정하는 등 앞장서 ‘유언비어’를 유포해놓고 ‘유언비어 단속’에만 퍼런 서슬을 드러냈다. 실종자 가족 사이에서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 건 정부와 언론”이라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팽목항에 한 학생이 붙여놓은 게시문 ‘저는 어쩔 수 없는 어른이 되지 않겠습니다’는 이 사건을 바라보는 이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 학생은 ‘재난 사고 어쩔 수 없었다 무능해서 어쩔 수 없었다 기사(기자의 오기로 보임)가 경찰이 직업이라 어떨 수 없었다 아는 게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돈이 많이 들어 어쩔 수 없었다 지위가 높으신 분이라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 나는 이 나라에서 내 소중한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가? 억울하고 분하다’라고 적었다. 또박또박 써내려가던 글씨는 뒤로 갈수록 흐트러지고 크기도 작아진다.
아직 희망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실종자의 무사귀환을 염원하는 노란리본 달기 운동이 펼쳐지고 있고, 팽목항에 마련된 가로 3m, 세로 1.5m 크기의 게시판 2개에도 전국 고교생과 대학생이 보낸 응원글이 가득 나붙었다. ‘꼭 살아서 돌아오라’는 이들의 기원이 끝내 이뤄지지 못할 때 결국 직면해야 할 더 큰 고통을 치유하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까. 팽목항은 대한민국에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