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해 자신을 망치는 일명 ‘자폭(自暴)’ 주당들. 도로 한복판을 내달리고 달리는 택시나 버스에서 뛰어내리는가 하면 집에 불을 지르고, 산과 빌딩에서 실족하거나 자해와 자살을 시도하는 이도 있다. 술이 뇌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자폭’이라는 무의식의 괴물이 출현하고 죽음의 ‘블랙아웃’이 시작된다. 과연 당신은 어제 ‘필름이 끊겨’ 한 짓을 되돌려볼 용기가 있는가. 누구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지만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야기하는 폭음 실태와 이를 막을 건전 음주법을 소개한다.
1월 22일 오전 1시 20분 서울의 대표 ‘음주 타운’인 홍대 앞 거리. 만취한 듯 갈 지(之) 자 걸음을 하던 어느 취객이 줄줄이 늘어선 택시 한 대에 부딪혔다. 40대 직장인이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온갖 토사물을 쏟아내더니 갑자기 8차선 도로 한가운데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달리던 차들이 그를 들이받기 직전 멈출 정도로 아찔한 상황이 연출됐다. 결국 차선 하나를 점령하고 300m 이상을 허우적거리던 그는 가까스로 택시 한 대를 잡아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언뜻 그는 술에 취해 주변 사람을 괴롭히는 ‘주폭(酒暴)’처럼 보였다. 주폭이란 만취 상태에서 상습적으로 상가, 주택가 등에서 인근 주민 등 선량한 시민에게 폭력과 협박을 가하는 사회적 위해범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는 폭력이나 협박을 가하지 않아 주폭 딱지를 붙이기도 애매했다.
오히려 ‘자폭(自暴)’ 주당에 가까웠다. 자폭 주당은 자기가 가진 폭발물을 스스로 터뜨리듯, 만취해 자신을 망치는 사람을 뜻한다. 음주에 의한 자폭 사례는 도처에 널렸다. 술에 취해 ‘필름이 끊겨’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심각한 신체 부상을 확인하는 이, 택시나 버스에서 갑자기 뛰어내리다 죽을 뻔한 이, 도로 위를 내달리는 이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종류도 다양하다.
‘블랙아웃’이라는 악마
문제는 누구나 한 번쯤 이런 경험을 했을 정도로 자폭 주당이 많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가볍게 여기는 사회적 인식이다. 그로 인해 치러야 하는 사회적 비용이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자폭 주당이고 어떻게 하면 자폭 음주를 줄이거나 막을 수 있을까. ‘주간동아’는 다양한 자폭 주당 사례를 소개하고, 자폭 음주를 막는 방법에 대해 알아봤다.
서울에서 자그마한 무역회사를 경영하는 김재한(47) 씨는 설 이튿날인 2월 1일 아침 고향 대구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잠을 깼다. 팔과 다리에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고 벗어놓은 옷에는 핏자국이 선명했다. 전날 형과 술을 마시며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누가 모시느냐는 문제로 심하게 말다툼한 것 외에는 전혀 기억나는 게 없었다. 일명 ‘필름이 끊긴’ 것이다. 부인이 되돌려준 끊어진 시간은 끔찍했다. “네가 아버지에게 한 게 뭐 있느냐”는 형 말에 술에 취한 김씨가 갑자기 술상을 뒤엎고 TV를 발로 찬 후 “내가 죽어야 한다”며 베란다 유리창으로 뛰어들었다는 것.
그뿐 아니었다. 김씨는 깨진 유리를 집어 들어 자기 팔과 손을 찌르고 벴다. 김씨 가족의 비명과 고함소리에 놀란 주민이 몰려왔고, 경찰이 출동해 수갑을 채운 뒤에야 병원 응급실로 향할 수 있었다. 병원 응급실에서도 김씨의 난동은 끝나지 않았다. “죽어버리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그는 의료진이 강제로 진정제와 수면제를 투여한 뒤에야 잠이 들었다. 평소 술을 무척 좋아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병원 치료를 권유받던 김씨는 대학병원 검진 결과, 중증 알코올중독으로 진단받았다. 결국 그는 설이 지난 후 곧바로 서울 인근 알코올중독 치료 병원에 강제 입원 조치됐다.
이번 설 명절 술에 의한 자폭 피해는 엄청났다. 술에 취한 10대 소년이 자신을 꾸짖는 어머니를 밀친 뒤 집에 불을 질러 어머니가 끝내 숨졌는가 하면, 만취한 40대 남성이 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었다는 이유로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는 일도 있었다.
외국에서 자폭 주당 경험을 한 사례도 있다. 서정우(28·가명) 씨는 지난해 5월 덴마크 코펜하겐 하숙집에서 황당한 경험을 했다. 자다가 일어난 서씨는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눈이 퉁퉁 부었고 앞니가 깨진 상태였다. 책상에는 선홍빛 핏자국이 선명했다. 하지만 그는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한국인 친구들과 보드카 2병을 마신 것만 생각날 뿐이었다. 동석한 친구들도 취했기 때문에 그의 행적을 알지 못했다. 한국에 돌아와 병원을 찾은 그는 ‘안와골절’이라는 의사의 진단 결과를 듣고 아연실색했다.
안와골절은 안구를 감싼 뼈가 부서진 상태로, 주먹이나 야구공으로 눈 주변에 외상을 입었을 때 주로 발생한다. 다시 말해 누군가에게 맞지 않고는 생길 수 없는 상처다. 그렇다면 그 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날 길거리를 뛰어다녔던 장면이 어렴풋이 머릿속을 스쳤다. 서씨는 “내가 사람을 죽였어도 모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두렵고 무서웠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6개월 동안 금주를 결심했다.
서씨가 겪은 일을 의학적으로 풀이하면 알코올 섭취로 기억이 단기 상실되는 현상, 즉 ‘블랙아웃’이다. 서씨의 눈 주위 뼈가 부서지고 피까지 흘렸지만 그 이유를 명확히 아는 주위 사람은 없었다. 대한보건협회 분석에 따르면, 대학생 2000명의 음주실태를 조사한 결과 3명 중 1명은 술을 마신 후 필름이 끊기는 현상을 경험했다고 한다.
블랙아웃으로 죽을 뻔한 사람도 무척 많고, 실제 사고를 당해 죽은 사람도 적지 않다. 김상은(29·가명) 씨는 2005년 겨울 경험한 블랙아웃을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흐른다. 그는 모 대학 학회 모임에서 큰 양푼에 소주 3병을 따라 한번에 마시는 일명 ‘사발식’을 했다. 취기가 돌고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선배들을 따라 2차 회식 장소로 이동하던 중 김씨는 자기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여학생이 떠올라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죽어버리겠다”고 소리치며 서울 어린이대공원역 앞 8차선 도로 중앙선을 향해 뛰어갔다.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차들이 멈춰 섰다. 그는 차에 치이진 않았지만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바람에 얼굴이 피투성이가 됐다. 김씨는 “내가 도로 한가운데로 달려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더 황당했던 것은 사건 정황을 친구들 말을 통해 확인해야 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은 음주공화국
2012년 질병관리본부의 ‘우리나라 성인 음주 현황’ 보고서를 보면 19세 이상 성인 625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7.7%가 최근 1년간 한 잔 이상 술을 마신 경험(연간 음주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9.3%는 매달 1회 이상 음주를 했다(월간 음주율). 성별로는 연간 및 월간 음주율 모두 남성이 각각 87.7%, 77.7%로 여성(67.8%, 41.3%)을 웃돌았다.
특히 우려스러운 사실은 남성 음주자의 43%가 매주 1회 이상 폭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는 세계 평균의 3배를 웃도는 수준이다. 음주자의 17.6%는 ‘고위험’ 음주자였고, 71.4%가 폭음 경험이 있었다. 하루에 술을 마시는 사람이 598만7000여 명, 맥주와 소주 소비량은 각각 958만 병과 896만 병. 대한민국을 가히 음주공화국으로 정의할 수 있을 정도다.
이 보고서에서 알 수 있듯 많은 음주자에게 폭음은 일상화된 일이다. 폭음은 블랙아웃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다. 그렇다면 블랙아웃은 왜 일어날까. 블랙아웃은 알코올이 뇌로 들어가 단기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 부위를 억제할 때 나타난다. 블랙아웃이 생기면 두 가지 어려움에 처한다. 첫 번째로 장기적으로 뇌 손상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중 하나가 알코올성 치매다. 필름이 자주 끊긴다는 사실은 그만큼 뇌손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일종의 ‘주사(酒邪)’다. 알코올은 각종 뇌 기능을 억제해 타인에 대한 공격 성향을 드러내게 할 뿐 아니라, 무단 횡단 같은 충동적 행동을 하게 만든다.
만취에 의한 블랙아웃은 뇌를 충동적으로 만들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지난해 11월 27일 서울 강남대로 버스전용차로에서 버스에 치여 숨진 김이백(63·가명) 씨가 이런 사례였다. 버스운전사가 만취 상태로 무단 횡단하는 김씨를 미처 보지 못해 사고가 났다. 역시 지난해 12월 5일 경남 창원시 진해구 한 고가도로에서 택시 뒷좌석에 앉아 있던 박명호(45·가명) 씨가 갑자기 차문을 열더니 택시 밖으로 뛰어내렸다. 박씨는 ‘만취 승객을 상대로 인신매매가 이뤄진다’는 괴담을 문자메시지로 전달받고 만취 상태에서 지레 겁을 먹어 뛰어내린 것이다. 당시 달리던 택시 속도는 80km.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자칫 실족사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던 사례다.
음주사고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011년 이후 3년간 국립공원에서 발생한 산악사고 사상자는 1686명, 그중 30% 정도가 음주로 사고를 당했다. 2009년부터 3년간 전국에서 여름철(6∼8월) 발생한 물놀이 안전사고로 인한 사망 및 실종자(446명) 중 술이 원인인 경우가 118건으로 전체의 26%를 차지했다.
강남을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이재원 교수와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계산신경시스템학과 윤경식 박사 공동연구팀은 음주 상태에서 뇌파 변화를 측정했다. 그 결과 알코올이 뇌 속 세타파와 감마파 움직임을 방해해 이성적 사고능력을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술이 뇌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자폭이라는 무의식의 괴물이 출현하고 죽음의 블랙아웃이 시작되는 이유를 여실히 증명하는 연구라 할 수 있다.
정신의학 전문의인 이무혁 다사랑중앙병원 원장은 “알코올은 뇌세포를 포함한 신경세포를 죽이는 물질이라 필요 이상 마시면 필연적으로 뇌 손상을 유발한다. 일단 알코올의존증 상태에 이르면 우울증과 불안장애, 공황장애 등 심리적으로 위축 상태가 동반되면서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힘들어진다. 건강하게 음주를 즐기려면 적정 음주량을 정하고 이 기준을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필수”라고 밝혔다(상자기사 참조).
1월 22일 오전 1시 20분 서울의 대표 ‘음주 타운’인 홍대 앞 거리. 만취한 듯 갈 지(之) 자 걸음을 하던 어느 취객이 줄줄이 늘어선 택시 한 대에 부딪혔다. 40대 직장인이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온갖 토사물을 쏟아내더니 갑자기 8차선 도로 한가운데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달리던 차들이 그를 들이받기 직전 멈출 정도로 아찔한 상황이 연출됐다. 결국 차선 하나를 점령하고 300m 이상을 허우적거리던 그는 가까스로 택시 한 대를 잡아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언뜻 그는 술에 취해 주변 사람을 괴롭히는 ‘주폭(酒暴)’처럼 보였다. 주폭이란 만취 상태에서 상습적으로 상가, 주택가 등에서 인근 주민 등 선량한 시민에게 폭력과 협박을 가하는 사회적 위해범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는 폭력이나 협박을 가하지 않아 주폭 딱지를 붙이기도 애매했다.
오히려 ‘자폭(自暴)’ 주당에 가까웠다. 자폭 주당은 자기가 가진 폭발물을 스스로 터뜨리듯, 만취해 자신을 망치는 사람을 뜻한다. 음주에 의한 자폭 사례는 도처에 널렸다. 술에 취해 ‘필름이 끊겨’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심각한 신체 부상을 확인하는 이, 택시나 버스에서 갑자기 뛰어내리다 죽을 뻔한 이, 도로 위를 내달리는 이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종류도 다양하다.
‘블랙아웃’이라는 악마
문제는 누구나 한 번쯤 이런 경험을 했을 정도로 자폭 주당이 많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가볍게 여기는 사회적 인식이다. 그로 인해 치러야 하는 사회적 비용이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자폭 주당이고 어떻게 하면 자폭 음주를 줄이거나 막을 수 있을까. ‘주간동아’는 다양한 자폭 주당 사례를 소개하고, 자폭 음주를 막는 방법에 대해 알아봤다.
서울에서 자그마한 무역회사를 경영하는 김재한(47) 씨는 설 이튿날인 2월 1일 아침 고향 대구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잠을 깼다. 팔과 다리에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고 벗어놓은 옷에는 핏자국이 선명했다. 전날 형과 술을 마시며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누가 모시느냐는 문제로 심하게 말다툼한 것 외에는 전혀 기억나는 게 없었다. 일명 ‘필름이 끊긴’ 것이다. 부인이 되돌려준 끊어진 시간은 끔찍했다. “네가 아버지에게 한 게 뭐 있느냐”는 형 말에 술에 취한 김씨가 갑자기 술상을 뒤엎고 TV를 발로 찬 후 “내가 죽어야 한다”며 베란다 유리창으로 뛰어들었다는 것.
그뿐 아니었다. 김씨는 깨진 유리를 집어 들어 자기 팔과 손을 찌르고 벴다. 김씨 가족의 비명과 고함소리에 놀란 주민이 몰려왔고, 경찰이 출동해 수갑을 채운 뒤에야 병원 응급실로 향할 수 있었다. 병원 응급실에서도 김씨의 난동은 끝나지 않았다. “죽어버리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그는 의료진이 강제로 진정제와 수면제를 투여한 뒤에야 잠이 들었다. 평소 술을 무척 좋아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병원 치료를 권유받던 김씨는 대학병원 검진 결과, 중증 알코올중독으로 진단받았다. 결국 그는 설이 지난 후 곧바로 서울 인근 알코올중독 치료 병원에 강제 입원 조치됐다.
이번 설 명절 술에 의한 자폭 피해는 엄청났다. 술에 취한 10대 소년이 자신을 꾸짖는 어머니를 밀친 뒤 집에 불을 질러 어머니가 끝내 숨졌는가 하면, 만취한 40대 남성이 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었다는 이유로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는 일도 있었다.
외국에서 자폭 주당 경험을 한 사례도 있다. 서정우(28·가명) 씨는 지난해 5월 덴마크 코펜하겐 하숙집에서 황당한 경험을 했다. 자다가 일어난 서씨는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눈이 퉁퉁 부었고 앞니가 깨진 상태였다. 책상에는 선홍빛 핏자국이 선명했다. 하지만 그는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한국인 친구들과 보드카 2병을 마신 것만 생각날 뿐이었다. 동석한 친구들도 취했기 때문에 그의 행적을 알지 못했다. 한국에 돌아와 병원을 찾은 그는 ‘안와골절’이라는 의사의 진단 결과를 듣고 아연실색했다.
안와골절은 안구를 감싼 뼈가 부서진 상태로, 주먹이나 야구공으로 눈 주변에 외상을 입었을 때 주로 발생한다. 다시 말해 누군가에게 맞지 않고는 생길 수 없는 상처다. 그렇다면 그 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날 길거리를 뛰어다녔던 장면이 어렴풋이 머릿속을 스쳤다. 서씨는 “내가 사람을 죽였어도 모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두렵고 무서웠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6개월 동안 금주를 결심했다.
서씨가 겪은 일을 의학적으로 풀이하면 알코올 섭취로 기억이 단기 상실되는 현상, 즉 ‘블랙아웃’이다. 서씨의 눈 주위 뼈가 부서지고 피까지 흘렸지만 그 이유를 명확히 아는 주위 사람은 없었다. 대한보건협회 분석에 따르면, 대학생 2000명의 음주실태를 조사한 결과 3명 중 1명은 술을 마신 후 필름이 끊기는 현상을 경험했다고 한다.
블랙아웃으로 죽을 뻔한 사람도 무척 많고, 실제 사고를 당해 죽은 사람도 적지 않다. 김상은(29·가명) 씨는 2005년 겨울 경험한 블랙아웃을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흐른다. 그는 모 대학 학회 모임에서 큰 양푼에 소주 3병을 따라 한번에 마시는 일명 ‘사발식’을 했다. 취기가 돌고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선배들을 따라 2차 회식 장소로 이동하던 중 김씨는 자기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여학생이 떠올라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죽어버리겠다”고 소리치며 서울 어린이대공원역 앞 8차선 도로 중앙선을 향해 뛰어갔다.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차들이 멈춰 섰다. 그는 차에 치이진 않았지만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바람에 얼굴이 피투성이가 됐다. 김씨는 “내가 도로 한가운데로 달려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더 황당했던 것은 사건 정황을 친구들 말을 통해 확인해야 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은 음주공화국
2012년 질병관리본부의 ‘우리나라 성인 음주 현황’ 보고서를 보면 19세 이상 성인 625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7.7%가 최근 1년간 한 잔 이상 술을 마신 경험(연간 음주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9.3%는 매달 1회 이상 음주를 했다(월간 음주율). 성별로는 연간 및 월간 음주율 모두 남성이 각각 87.7%, 77.7%로 여성(67.8%, 41.3%)을 웃돌았다.
특히 우려스러운 사실은 남성 음주자의 43%가 매주 1회 이상 폭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는 세계 평균의 3배를 웃도는 수준이다. 음주자의 17.6%는 ‘고위험’ 음주자였고, 71.4%가 폭음 경험이 있었다. 하루에 술을 마시는 사람이 598만7000여 명, 맥주와 소주 소비량은 각각 958만 병과 896만 병. 대한민국을 가히 음주공화국으로 정의할 수 있을 정도다.
이 보고서에서 알 수 있듯 많은 음주자에게 폭음은 일상화된 일이다. 폭음은 블랙아웃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다. 그렇다면 블랙아웃은 왜 일어날까. 블랙아웃은 알코올이 뇌로 들어가 단기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 부위를 억제할 때 나타난다. 블랙아웃이 생기면 두 가지 어려움에 처한다. 첫 번째로 장기적으로 뇌 손상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중 하나가 알코올성 치매다. 필름이 자주 끊긴다는 사실은 그만큼 뇌손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일종의 ‘주사(酒邪)’다. 알코올은 각종 뇌 기능을 억제해 타인에 대한 공격 성향을 드러내게 할 뿐 아니라, 무단 횡단 같은 충동적 행동을 하게 만든다.
만취에 의한 블랙아웃은 뇌를 충동적으로 만들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지난해 11월 27일 서울 강남대로 버스전용차로에서 버스에 치여 숨진 김이백(63·가명) 씨가 이런 사례였다. 버스운전사가 만취 상태로 무단 횡단하는 김씨를 미처 보지 못해 사고가 났다. 역시 지난해 12월 5일 경남 창원시 진해구 한 고가도로에서 택시 뒷좌석에 앉아 있던 박명호(45·가명) 씨가 갑자기 차문을 열더니 택시 밖으로 뛰어내렸다. 박씨는 ‘만취 승객을 상대로 인신매매가 이뤄진다’는 괴담을 문자메시지로 전달받고 만취 상태에서 지레 겁을 먹어 뛰어내린 것이다. 당시 달리던 택시 속도는 80km.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자칫 실족사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던 사례다.
음주사고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011년 이후 3년간 국립공원에서 발생한 산악사고 사상자는 1686명, 그중 30% 정도가 음주로 사고를 당했다. 2009년부터 3년간 전국에서 여름철(6∼8월) 발생한 물놀이 안전사고로 인한 사망 및 실종자(446명) 중 술이 원인인 경우가 118건으로 전체의 26%를 차지했다.
강남을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이재원 교수와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계산신경시스템학과 윤경식 박사 공동연구팀은 음주 상태에서 뇌파 변화를 측정했다. 그 결과 알코올이 뇌 속 세타파와 감마파 움직임을 방해해 이성적 사고능력을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술이 뇌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자폭이라는 무의식의 괴물이 출현하고 죽음의 블랙아웃이 시작되는 이유를 여실히 증명하는 연구라 할 수 있다.
정신의학 전문의인 이무혁 다사랑중앙병원 원장은 “알코올은 뇌세포를 포함한 신경세포를 죽이는 물질이라 필요 이상 마시면 필연적으로 뇌 손상을 유발한다. 일단 알코올의존증 상태에 이르면 우울증과 불안장애, 공황장애 등 심리적으로 위축 상태가 동반되면서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힘들어진다. 건강하게 음주를 즐기려면 적정 음주량을 정하고 이 기준을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필수”라고 밝혔다(상자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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