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빠르게 발전한 계기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인프라의 힘’이다.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을 본격화하면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제철소 등을 세운 것이 대표적이다. 2000년대 정보화 시대를 맞이해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초고속 인터넷망을 전국에 깔았다. 튼실한 하드웨어 인프라 덕에 다양한 산업의 싹이 자랄 수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은 10년째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만 달러대에 머물 정도로 저성장이 고착됐다. 주요 원인으로는 신흥개발국의 맹렬한 추격, 인구고령화, 새로운 성장동력 부재가 거론된다. 하지만 근본적 이유는 다른 데 있어 보인다. 세계가 소프트웨어-디지털 혁신을 제조업 등 전 산업에 적용하는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시대로 넘어가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준비가 덜 됐기 때문이다. 즉 소프트웨어 인프라 구축이 늦어지면서 잠재성장률이 정체된 것이다.
소프트웨어 인프라란 무엇일까. 주로 무인자동차, 3D(3차원) 프린터, 가상 현실, 지능형 드론, 사물인터넷, 로봇산업 등이 거론된다. 하지만 이는 나무로 치면 열매에 속하는 것으로,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기술이라는 줄기가 존재해야 맺을 수 있다. 그렇다면 뿌리에 해당하는 기술도 있지 않을까.
다가온 ‘블록체인 금융 시대’
뿌리 기술 가운데 하나가 블록체인이다. 그동안 디지털 사회의 가장 큰 걸림돌은 해킹 위협 탓에 정보를 신뢰성 있게 주고받기가 무척 어렵고 비싸다는 데 있었다. 블록체인은 이 고민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블록체인은 믿지 못하는 당사자가 직접 데이터 또는 신뢰 자산(전자화폐, 주식원장, 보험원장, 부동산계약서, 전자투표지, 지적재산권 등)을 안전하게 전달, 교환, 저장한다. 정보뿐 아니라 자산까지 안전하고 믿을 수 있게 거래할 수 있다. 심지어 거래 비용도 저렴하다. 금융거래까지 블록체인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얘기다.
거래 명세 묶음인 ‘블록’이 쇠사슬(체인)처럼 연결됐기에 ‘블록체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풀어서 쓰면 ‘디지털 공공 거래장부’라고도 한다. 보통 금융거래는 공인된 제삼자인 은행을 통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 이때 은행이 운영하는 컴퓨터 서버가 장부 구실을 한다. 그러나 블록체인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된다. 이전 거래자의 컴퓨터가 일종의 은행이 되고, 각자의 디지털 장부에는 모든 거래 명세가 빠짐없이 동일하게 기록된다. 각 장부는 수시(평균 10분)로 대조해 오류나 조작을 방지한다.
해커 처지에서는 모든 정보가 집중된 중앙서버만 뚫으면 단번에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블록체인은 P2P(peer to peer) 네트워크의 노드를 하나씩 공격해 전체 51%를 장악하지 않으면 해킹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데이터 및 자산거래의 신뢰성을 쉽고 값싸게 제공할 수 있다.
또한 거래 장부인 데이터뿐 아니라, 거래계약도 블록체인에 올려 중간 신뢰 담당자(Trusted Third Party) 없이 거래를 맺을 수 있다. 이를 스마트 계약이라 일컫는다. 즉 자연어로 된 계약서를 프로그램 형태로 전환해 블록체인에 올려 위·변조가 불가능하게 한 뒤 이 계약을 스스로 이행하게 해 중간자 없이 신뢰성을 확보하며 거래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이는 곧 중간자인 증권거래소 없이도 주식거래를 개인 대 개인으로 직접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보험 분야에서 개인 대 개인이 크라우드펀딩처럼 보험금을 모아 블록체인에 저장해놓고 스마트계약으로 보험금을 지급한다. 보험사 등 중간자 없이 안정적으로 보험금을 관리, 지급할 수 있어 관련 비용이 크게 줄어든다. 또한 전체 거래 내용을 모든 노드가 검증할 수 있어 투명성도 높아진다.
각국 정부는 발 빠르게 블록체인 관련 규제를 풀어 달려가고, 글로벌 기업은 블록체인 기술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적극적(positive) 규제라는 낡은 틀에 갇혀 새로운 서비스를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해 영국은 사물인터넷(IoT) 지원 규제계획을 수립하고 역량 확대를 위한 ‘IoT UK’ 정책을 개시해 블록체인 기술 개발에 2년간 약 350억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호주는 블록체인을 국가 미래 기반 기술로 선정한 뒤 전용 연구센터를 설립하고 다양한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중국은 위안화를 위한 블록체인 기반 전자화폐를 추진하면서 31개 중국 회사를 묶어 블록체인협의체 ‘차이나 레저 얼라이언스(China Ledger Alliance)’를 발족했다. 일본은 비트코인을 전자화폐로 인정하고 2020 도쿄올림픽을 위해 다양한 시범사업을 진행 중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블록체인 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금융위원회 주도로 은행권 블록체인 컨소시엄과 자본시장 블록체인 컨소시엄이 만들어져 시범사업을 논의 중이다. 하지만 앞에서 지적했듯이 적극적 규제 탓에 새로운 서비스를 시도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기획재정부는 1월 13일 블록체인 기반의 최초 전자화폐 비트코인을 이용한 해외 송금이 외국환관리법에 위반된다고 규정해 핀테크(금융+기술) 송금 서비스업체 대표들이 구속 위기에 처했다.
우리 미래를 위한 기술 투자
블록체인 기술 개발은 우리나라 정보 주권을 지키는 길이다. 대형 메인프레임이 개인용 컴퓨터(PC)로 바뀌는 시기에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윈도라는 운영체계(OS)로 전 세계 컴퓨터 시장을 장악했고, 인터넷과 모바일 시대로 바뀌면서 구글이 안드로이드라는 운영체계로 스마트폰 시장을 장악했다.4차 산업혁명의 운영체계라 할 수 있는 블록체인을 누가 주도하느냐에 따라 세계 경제의 판도가 바뀔 것이다. 우리가 블록체인 기술 개발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이유다. 만약 여기서 뒤처지면 우리나라 금융자산의 저장, 관리, 거래를 외국 기업이 주도하는 블록체인에 의존해야 한다.
블록체인은 고속도로나 인터넷망 같은 국가 핵심 인프라다. 블록체인 육성을 위해 민관 합동으로 로드맵을 작성하고 대규모 투자도 해야 한다. 규제도 네거티브 방식으로 전환하고 규제 프리존을 만들어 새로운 서비스를 끊임없이 시도하면서 생태계를 조정해야 한다. 여기서 축적된 경험과 지식으로 글로벌 표준화를 주도해 현재의 경제난국을 돌파해야 한다.
“10년 뒤엔 세계 GDP 10%가 블록체인에 담길 것”블록체인에 대한 금융권의 관심은 이제 전 세계적 흐름이 됐다. 2015년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은 ‘사회를 뒤바꿀 21개 기술’의 하나로 블록체인을 지목했다. 구체적인 전망도 나왔는데 “2023년부터 각국 정부가 블록체인으로 세금을 거두고, 2027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10%가 블록체인으로 저장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한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할 경우 금융회사는 거래 비용의 30%가량을 절감할 수 있다. 컨설팅업체 맥킨지는 “전 세계 금융기관이 블록체인을 도입할 경우 시스템 운영비가 연간 23조 원 절약된다”고 추산했다. 2022년 기준으로 이는 200억 달러(약 22조70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세계경제포럼은 올해까지 전 세계 은행의 80%가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한다.
이미 2015년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도이체방크, 홍콩상하이은행(HSBC) 등 은행 22곳은 블록체인 연구연합 ‘R3CEV’를 조직해 표준화에 착수했다. 지난해에는 회원사가 43개로 불어났고,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업체 마이크로소프트사도 합류했다. 미국 나스닥은 이미 2015년 10월 블록체인 장외주식 거래소를 만들었다.
국내에서도 서서히 변화를 받아들이는 듯한 조짐이 엿보인다. 올해 하반기부터 16개 시중은행은 외환 지정거래은행 변경 절차에 블록체인을 도입한다. 일각에서는 논란이 많은 공인인증서를 아예 블록체인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