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따뜻해지면 상큼한 화이트 와인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을 찾는 사람이 많아진다. 우리에게 익숙한 소비뇽 블랑은 뉴질랜드나 칠레산이지만, 가장 고급스럽고 클래식한 스타일을 생산하는 곳은 프랑스 중부 내륙에 위치한 푸이 퓌메(Pouilly-Fumé) 다. 이 지역에는 15세기부터 한 가문이 600년 동안 운영해온 와이너리, 샤토 드 트라시(Château de Tracy)가 있다.
이 와이너리의 탄생 배경에는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 백년전쟁(1337~1453)이 있다. 당시 잉글랜드와 전쟁 중이던 스코틀랜드는 적의 적을 돕고자 대규모 군대를 프랑스에 파견했다. 이 파견 군대를 이끈 스코틀랜드 귀족 헨리 스텃(Henry Stutt)은 백년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로 귀화해 성을 데스튀트(Destutt)로 바꾸고 푸이 퓌메에 정착했다. 그가 바로 샤토 드 트라시의 시조다.
데스튀트 가문은 프랑스와 세계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유명한 인물로는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학문적으로 처음 사용한 철학자 앙투안(Antoine) 데스튀트가 있다. 과학자 뉴턴의 조카사위이기도 한 앙투안은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과 오랜 우정을 나눴다. 제퍼슨이 프랑스 대사로 일하던 시절 알게 된 두 사람은 정치적 견해가 같아 자연스레 가까워졌고 샤토 드 트라시 와인을 함께 즐겼다.
이후 제퍼슨은 앙투안의 저서를 미국에서 발간할 수 있도록 힘썼으며, 앙투안은 제퍼슨이 미국 대통령에 출마하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와인은 제퍼슨이 대통령이 된 뒤에도 큰 사랑을 받았는데, ‘대통령의 화이트 와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그 때문이다.
와이너리 이름을 그대로 딴 샤토 드 트라시 와인은 600년간 트라시가 생산해온 맛 그대로를 담고 있다. 고목에서 수확한 소비뇽 블랑으로 만든 이 와인에는 신선한 허브, 잘 익은 자몽과 복숭아, 은은한 들꽃 등 다양한 향이 어우러져 있다. 와인을 마신 뒤에는 견과류의 쌉쌀함과 짭짤함이 입안을 맴돈다. 마드무아젤 드 테(Mademoiselle de T)는 어린 나무가 생산한 포도로 만든 대중적인 와인이다. 샤토 드 트라시보다 복합미는 적지만 과일향이 풍부해 마시기 편하다.
샤토 드 트라시 와인이 600여 년 동안 그 맛을 유지한 비밀은 포도를 키운 땅에 있다. 푸이 퓌메 흙에 많이 섞인 부싯돌 석회질 토양이 와인에 복합미를 부여한 것. 푸이 퓌메라는 지명도 이런 특징에서 기인했다. 프랑스어로 푸이는 단맛이 없는 화이트 와인을, 퓌메는 부싯돌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뜻한다.
트라시는 토양을 건강하게 유지하고자 화학비료나 농약을 전혀 쓰지 않는다. 대신 1m2의 땅속에 서식하는 벌레 수를 따진다. 벌레는 흙에 공기를 넣고, 영양분을 섞어주며, 죽어서는 거름이 되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트라시는 포도 알마다 맛과 향이 농축되도록 그루당 생산량을 세 송이로 제한한다. 포도 세 송이는 딱 와인 한 잔을 만들 수 있는 양이다.
트라시는 포도를 한번에 수확하지 않는다. 충분히 익은 송이만 골라 따려고 같은 밭을 몇 번씩 방문한다. 트라시 와인의 견고함과 고급스러움은 바로 이런 노력에서 나온다. 그들의 집념을 말해주듯 트라시 고성은 오늘도 루아르(Loire) 강을 내려다보며 묵묵히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