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혼란을 속히 치유하고 새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화합과 단결입니다. 그동안의 갈등은 모두가 국가 앞날을 걱정하는 애국심의 발로였다고 봅니다. 이제 배타적인 생각과 주장을 버리고 화합과 상생의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대한불교천태종 총무원장인 춘광스님(사진)은 오늘날 갈등과 분열의 근원적 원인은 탐욕과 이기심이라고 진단하며 사회구성원 모두 조금씩 내려놓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3월 13일 서울 서초구 우면산 관문사에서 만난 춘광스님은 “상대 존중은 나에 대한 존중이고, 상대 파멸은 나의 파멸”이라며 “가정과 이웃, 국가를 위해서라도 나 자신이 얼마만큼 이바지했는지 반성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 어떤 인연으로 출가했나.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따라다녀 절집에 익숙했다. 어느 날 충북 단양 구인사에서 천태종을 중창한 상월원각 대조사를 친견하고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요즘 말로 한눈에 반한 것이다. 집에 돌아왔는데도 마음은 항상 구인사에 가 있었다. 그러니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출가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공부보다 남이 안 하는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나섰다. 그때가 열여섯 살이었다.”
▼ 행자 시절을 어떻게 보냈나.
“천태종 총본산 구인사는 지금 훌륭한 도량의 모습을 갖췄지만, 내가 출가했을 당시에는 도량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초가집 몇 채가 전부였다. 당시 다 어려웠지만, 특히 먹는 것이 형편없었다. 쌀밥은 일 년에 서너 번 먹을 정도로 자주 못 먹고 보리, 조, 옥수수 등 잡곡밥을 주로 먹었다. 천태종 ‘주경야선(晝耕夜禪)’ 전통에 따라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밤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졸음이 몰려왔지만 내가 가족까지 버리고 왔는데 ‘자는 것이 무엇이냐’고 마음을 다잡곤 했다. 지금 돌아보면 형편은 어려웠지만 발심이 마음속에 가득 차 있고 환희심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 곁에서 본 상월원각 대조사 모습은 어땠나.
“눈빛이 항상 형형했고 얼굴의 기가 매우 밝게 느껴졌다. 당시 연세가 높고 오랫동안 농사일을 많이 했는데도 손과 피부가 깨끗하고 좋으셨다. ‘이것이 성인의 모습이구나’ 생각했다.”
▼ 대조사로부터 들은 말 가운데 평생 간직하고 있는 것이 있는지.
“‘계율이 생명이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수행자는 계율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계율 안 지키고 수행 안 하려면 뭐 하러 절에 들어오나. 상월원각 대조사는 때로는 굉장히 엄하면서도 때로는 따뜻하게 대해준 좋은 스승이었다.”
▼ 수행 중 많은 고비가 있었을 텐데.
“수행자는 마음을 잘 챙겨야 한다. 다리가 아프다는 것도 마음이 다리에 가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수행에 빠져들면 아픈 것도 잊어버린다. 저녁때 잠깐 정진을 하다 ‘한 시간이 지났나’ 싶었는데 날이 훤하게 밝은 때가 많았다. 열심히 수행할 때는 금줄을 쳐 일반인은 못 들어오게 하고, 한 달이든 백일이든 매달렸다. 때때로 우물에 가서 찬물 한 대접 들이켜 수행할 힘을 얻곤 했다. 그때는 죽고 사는 생각조차 없었다.”
▼ 요즘은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요즘은 수행 밥값을 제대로 못 한다. 핑계 같지만 소임을 맡다 보니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스스로 반추해보고 ‘내가 너무 나태했구나’ 생각한다. 소임을 내려놓는다면 다시 수행에 정진할 것이다. 소임을 맡으면 소임을 열심히 하고 수행할 때는 수행을 열심히 할 생각이다.”
▼ 김도용 종정과는 어떤 인연이 있나.
“제가 존경하는 스님이시고 수행력과 원력이 대단하셔서 종도들이 부처님처럼 모시는 분이다. 종단에 들어오신 뒤 지금까지 장좌불와(長坐不臥)를 계속하고 계신다.”
▼ 천태종 사찰은 도심에 있는 경우가 많다.
“천태종은 구인사를 중심으로 전국 160여 직할 사찰을 두고 있다. 비구, 비구니 스님이 500여 명이고 불자는 250여만 명이다. 천태종의 모든 사찰은 도심에 건립한 것이 특징이다. 법당을 24시간 개방해 불자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사찰이 생활권 안에 있어 신행과 포교가 원활히 이뤄지는 것이다. 천태종은 ‘애국불교’ ‘생활불교’ ‘대중불교’를 3대 지표로 삼고 있다.”
▼ 천태종은 ‘재가신도’의 구실이 크다고 들었다.
“승속일체 천태종은 재가신도가 가장 큰 힘이다. 우리 종단은 단위 사찰은 물론, 중앙행정 기관까지 사부대중이 함께 운영한다. 종단 대의기구인 종의회 의원 절반이 재가신도다. 모든 사찰의 재정도 신도회가 직접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 최근 신도 수가 줄고 있어 고민이 큰 것으로 안다.
“지금까지는 절로 찾아오는 신도들을 상대했다면 이제는 신도를 찾아가야 한다. 또한 시대 변화에 맞게 종교계도 변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 불교계가 시대 변화에 안이하게 대처한 부분이 있다. 사회와 소통하면서 같이 고민하고 문제를 적극 풀어갈 수 있는 시간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종교계의 새로운 임무가 무엇인지 모색하고 있다. 사찰 따로, 사회 따로가 아니다.”
▼ 신도를 찾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1988년 부산에서 주지를 맡고 있을 때 한글학교를 열었다. 주변에서 절이 무슨 그런 일까지 하느냐고 했지만, 불자 여부와 관계없이 어릴 적 배우지 못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문을 열었다. 600명이나 몰렸다. 당시 한글학교를 졸업한 어느 노모가 미국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까막눈 어머니가 한글을 배워 편지를 보냈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아들은 노모의 편지를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다녔다. 그 아들이 찾아와 고맙다고 몇 번이고 머리를 숙였다. 지금도 한글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 출가자도 줄고 있다고 한다.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 천태종은 3년간 행자 과정을 거쳐야 한다. 계율이 엄해 그 3년이 굉장히 힘들고 어렵다. 그러나 평생 수행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이런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을 출가시키기보다 정말로 수행정진을 할 소수만을 출가시킬 생각이다.”
▼ 자비 실천은 어떻게 하나.
“우리 불자에게만 관심을 쏟는 것이 아니라 국민 복지 실천이 곧 자비 실천이다. 스님과 재가신도가 하나 돼 사회 곳곳을 어루만질 수 있는 그런 복지를 추구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빛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 낮은 자세로 다가가는 것이 진정한 자비다.”
▼ 대중이 쉽게 할 수 있는 수행방법이 있나.
“‘노는 입에 염불하기’라고, 염불은 남녀노소가 언제 어디서든 쉽게 할 수 있다. 대중이 스님처럼 수행하기는 어렵다. 목적지는 하나라도 가는 길이 다르듯, 수행도 근기에 따라 달라야 한다. 틈나는 대로 염불을 하면 쓸데없는 잡생각이 들어오지 못한다. 이는 내 집을 내가 관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 집 관리를 못 하면 번뇌의 노예가 된다. 노예가 별것 아니다. 내 인생을 내 맘대로 하지 못하면 노예인 것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주인 노릇 제대로 하려면 염불 수행이 좋다.”
▼ 일상에서 무엇을 실천하면 좋을까.
“자비와 사랑이다. 모두의 가슴속에 자비와 사랑의 농사를 지었으면 좋겠다. 자비가 충만해야 남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다. 내 가슴이 메마르면 아무리 주고 싶어도 못 준다.”
▼ 요즘 하고 있는 불사로는 어떤 것이 있나.
“11세기 77년에 걸쳐 만들어진 ‘초조대장경’ 목판본 복원사업을 일차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먼저 천태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기본이 되는 경전)인 법화경부터 복원하려 한다. 20년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이번에 ‘시절 인연’이 맞아 시작한다. 일본에 있는 영인본을 가져와 그에 맞게 나무를 깎을 것이다. 이미 건조된 나무 등도 준비해놓았다. 법화경은 내년 완성이 목표다.”
▼ 마지막으로 국민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은.
“나보다 못한 사람을 생각하면서 욕심을 조금씩 내려놓았으면 좋겠다. 돌아보면 세상은 나보다 못한 사람이 수없이 많다. 나보다 잘난 사람과 위만 바라보면 답이 안 나온다. 모든 문제는 자신에게 있다. 지혜가 부족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아닌 남 탓을 한다. 한 생각을 내려놓으면 마음이 열리고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마음의 창에 때가 낀 사람은 세상이 아무리 좋아도 더럽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곧 부처인 셈이다.”
대한불교천태종 총무부장 월도스님이 말하는 춘광스님은…원장 스님은 한 번도 놓치고 가는 부분이 없으시다. 수행도 빠짐없이 하시고, 불교 발전을 위해 필요한 덕목을 두루 갖추셨다. 우리 종단의 염불 의식 부분에서 선구자 구실을 하셨고, 문화장르와 종단박물관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문화에 눈을 뜨고 실행하셨다. 한 번도 누구를 비난하거나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중의 근본은 참고 이해하는 것이므로 화 내지 마라. 화를 내면 업을 짓는다”고 말씀하셨다. 원장 스님이 아니라 보살을 모신다는 마음이 든다.
춘광스님은 1971년 충북 단양 구인사에서 상월원각 대조사를 은사로 출가해 서울 관문사, 부산 삼광사 주지와 총무원 교무부장, 종의회 의원, 감사원장 등을 지냈다. 현재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수석부회장, 학교법인 금강대 부이사장, 천태종복지재단 대표이사, 금강신문 대표이사, 불교TV 이사 등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