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동북쪽 김녕에는 협재 못지않게 아름다운 바다가 있다. 그러나 동네는 이 바다가 아까울 만큼 황량하다. 옆 동네 월정에 비하면 사막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바람 때문이다. 바람 세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모슬포 사람들조차 딸이 김녕으로 시집간다고 하면 눈물을 훔쳤다고 하니 이 지역 바람의 매서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답지만 황량한 김녕에는 낡은 3층 건물이 외로이 서 있다. 제주가 지금처럼 북적거리기 전 지어진 펜션이다. 여기에 허클베리핀 리더 이기용이 산다. 그는 1998년 데뷔해 총 5장의 앨범을 낸 뮤지션이다. 4집은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록 음반상을 받았다. 3집은 음악 웹진 ‘백비트’가 선정한 2000년대 한국 명반 100선에서 상위에 랭크됐다. 그는 솔로 프로젝트 ‘스왈로우’로도 3장의 앨범을 냈다. 이기용이 홀연히 제주로 떠난 건 2013년 여름 협재에서 한 작은 공연 이후다. 그렇잖아도 제주를 좋아해 자주 여행을 다니던 그는 그 공연이 끝난 후 “그래, 이런 데서 살아야지”라고 절박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바로 내려갔다. 허클베리핀 보컬 이소영, 이기용의 오랜 친구이자 밴드에서 건반을 담당하는 정나리도 동행했다. 이들이 낡은 펜션 이름을 ‘샤스테이’로 바꾸고 딸린 건물에서 ‘샤키친’이라는 술집을 운영하며 산 지 벌써 4년째다.
건물에 지하층이 거의 없는 제주에서 특이하게 샤스테이에는 지하가 있다. 층고 3m의 높고 넓은 공간이다. 이기용이 작업실로 쓰는 곳이다. 2월 19일 펜션이자 술집, 그리고 작업실이기도 한 샤스테이를 처음 방문했다. 그와 나는 같은 대학 과 동기다. 20년이 훌쩍 넘은 사이다. 안부를 주고받지 않아도 잘 살고 있으려니 한다. 그가 제주에 내려간 후 처음 김녕을 찾았고 작업실을 봤다. 많은 음악인이 꿈꿀 법한 공간이었다. 파티션을 나눌 필요 없이 한쪽에선 합주를, 다른 한쪽에선 레코딩을 할 수 있는 그런 공간 말이다. 오래된 공간과 꾸밈새가 꼭 뉴욕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에서 볼 수 있는, 버려진 창고를 개조한 아티스트의 작업실처럼 느껴졌다. 그와 이소영, 정나리, 그리고 제주에서 만난 캐나다 사람이자 첼리스트인 하이람이 합주를 하고 있었다. 허클베리핀과 스왈로우의 신곡들이었다.
작업이 끝난 저녁, 김녕 해녀 집에서 사온 광어와 문어, 소라를 안주 삼아 오랜만에 잔을 부딪쳤다. 근 몇 년 만의 술자리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실없는 소리를 쏟아냈고 그는 웃었다. 자연산 광어회는 숙성이 잘돼서 그런지 향긋하기까지 했다. 술이 좀 오른 후 그들은 즉석에서 라이브 공연을 했다. ‘두 사람’ ‘Across The Universe’를 포함해 총 세 곡을 불렀다. 몇 년 만에 본 허클베리핀의 공연이었다.
다음 날 오전 이기용을 다시 만나 성게국수와 회국수를 먹었다. 전망이 끝내주는 식당이었다. 거기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살면서 이런 풍경을 매일 보니까 비트 있는 음악은 잘 안 나와. 곡이 많이 쌓였는데 스왈로우 노래가 많아. 요즘 서울을 오가며 공연하니 다시 허클베리핀 노래가 올라오더라고.”
와인만 하늘과 땅이 만드는 게 아니다. 음악도 그렇다. 올해 나올 예정인 허클베리핀 혹은 스왈로우의 새 앨범에 어떤 소리가 담길까. 예상은 못 하겠다. 하지만 그간 들었던 소리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분명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