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 ‘미쉐린 가이드’가 한국에 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리기 시작하자 ‘먹방’ ‘쿡방’은 물론, 수많은 광고에도 출연하는 한 스타 셰프가 “미쉐린이 내가 운영하는 식당에 별점을 주더라도 받지 않겠다. 나만의 스타일이 사라지고 미쉐린 가이드의 기준만 좇게 될 것이 뻔하다”라는 말을 했다.
11월 7일 드디어 ‘미쉐린 가이드 서울’ 편이 공개됐다. 하지만 그 스타 셰프의 우려와 달리 이번에 선정된 서울 식당은 음식 스타일과 창의력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요리사의 고집이 느껴지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또 별 3개를 받은 2곳 모두 강남구 한식당 ‘가온’과 서울신라호텔 한식당 ‘라연’이라는 점이 놀랍다. 별 2개를 받은 곳도 롯데호텔서울 ‘피에르 가니에르’를 빼고는 ‘곳간 by 이종국’ ‘권숙수’ 모두 한식당이다. 별 1개를 받은 19곳에는 사찰음식 전문 ‘발우공양’, 간장게장 전문 ‘큰기와집’을 포함해 한식당 9곳이 들어가 있다.
116년 전통의 권위와 신뢰
이는 한국인 입맛에 잘 맞는 가장 한국적인 맛도 외국인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미쉐린 가이드 서울’ 편을 보면 “전통과 현대를 아우른 한식을 높이 평가했으며, 불고기나 비빔밥 등 한정된 메뉴에서 벗어나 게장이나 사찰음식 등을 새롭게 발굴했다”고 선정 배경을 설명했다. 실제로 이번에 별을 받은 식당 24곳 가운데 한식당은 13곳으로 절반이 넘는다. 3만5000원 이하 합리적인 가격에 훌륭한 음식을 제공하는 이른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비)를 따지는 ‘빕 구르망(Bib Gourmand)’에 선정된 한식당까지 포함하면 이번 ‘미쉐린 가이드 서울’ 편은 ‘한식의 재발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쉐린 가이드는 프랑스 타이어 회사 미쉐린에서 만든다. 타이어 회사가 상업적 이유로 맛집 가이드를 만든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미쉐린 가이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자동차 역사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1769년 프랑스인이 최초로 증기 자동차를 발명하면서 자동차 역사가 시작됐고 1885년 가솔린 자동차, 1886년 휘발유 자동차가 등장했다. 우리나라에는 1911년 조선총독부와 순종의 전용차가 들어오면서 자동차 역사가 시작됐다.
타이어 회사 미쉐린은 1889년 설립됐으며, 미쉐린 가이드는 1900년 처음 발행됐다. 1898년 프랑스에서 자동차 전시회가 열렸을 때 파리-베르사유 구간을 달릴 수 있는 차를 가진 사람에게만 참관이 허용됐다. 그만큼 자동차는 사회적 계급을 상징하는 최고 사치품이었고, 1900년 프랑스에서 차를 소유한 사람은 3000여 명에 불과했다.
차를 가진 부유한 사람에게 여행을 적극 권장하면서(그래야 타이어를 더 많이 팔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지역 어떤 호텔에 묵고, 어떤 식당이 맛있는지, 또 어디에서 타이어를 교체할 수 있는지 등 세세한 여행 정보가 필요했다. 그래서 미쉐린은 이런 정보를 담은 무료 책자를 발행해 고객에게 나눠줬다. 또 평가원을 전국 각지로 파견해 책자 속 정보를 수시로 업데이트하고, 새로 생긴 숙박업소와 식당을 찾아내 소개했다. 유익하고 정확한 정보 덕에 미쉐린 가이드는 금세 신뢰를 얻었다. 그렇게 116년이 흘렀다.
미식계에서 막강한 권위를 누리고 있는 미쉐린 가이드가 올해는 서울 식당들을 평가했다. 서울 편은 세계에서 28번째이며 아시아에서 일본, 중국, 싱가포르에 이어 네 번째다. 식당은 다음과 같이 별 개수로 등급이 나뉜다.
☆☆☆ 요리가 매우 훌륭해 특별한 여행을 떠날 가치가 있는 레스토랑 ☆☆ 요리가 훌륭해 멀리 찾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레스토랑 ☆ 요리가 훌륭한 레스토랑
음식 맛 외에 인테리어, 서비스, 분위기 등을 평가할 때는 별이 아니라 포크와 스푼 수로 표시한다. 이번에 서울에서 별을 1개라도 받은 식당은 모두 24곳이며, 빕 구르망에 선정된 식당은 36곳이다. 미쉐린 가이드는 빕 구르망에 대해 “합리적인 가격에 훌륭한 음식을 선사하는 친근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빕 구르망은 미쉐린의 마스코트 비벤덤(Bibendum)이 입맛을 다시는 픽토그램으로 표시된다. 비벤덤은 미쉐린이 1889년부터 사용한 로고로, 로마시대 시인 호러스(Horace)의 라틴어 문장 ‘Nunc est bibendum(지금이 마실 때다)’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타이어를 인간 모습으로 만들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은밀하게, 골목 구석구석까지
11월 1일 발표된 서울의 빕 구르망 식당 36곳 중 18곳이 종로구와 중구에 몰려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서울의 오랜 전통 및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많은 것과 맥을 같이한다. 미쉐린 평가원들이 서울 중심지의 깊은 골목골목까지 들어가 한식의 정수를 맛본 모양이다. 추어탕, 칼국수, 족발, 사찰음식, 생태탕, 도가니탕, 삼계탕, 수제비, 육회, 만두, 냉면, 설렁탕은 물론, 간장게장 전문점까지 찾아냈다.
결과적으로 ‘미쉐린 가이드 평가원들이 프랑스적인 미식 척도를 가지고 어떻게 한국 음식을 제대로 이해하고 참맛을 평가할 수 있겠나’라며 미심쩍어하던 일부 음식 비평가의 우려를 일축했다. 상기 두 카테고리에는 들지 못했으나 미쉐린 측이 판단하기에 가이드에 소개돼도 좋을 정도로 훌륭하다고 인정한 식당까지 합하면 총 145곳이 이번에 등재됐다(guide.michelin.co.kr/ko 참조).
그렇다면 미쉐린 가이드의 ‘암행어사’는 어떤 사람들일까. 인스펙터라고 부르는 미쉐린 평가원은 일단 선발되면 6개월 이상 미쉐린 본사에서 엄격한 수련 과정을 거친다. 익명으로 일반인과 똑같이 식사하며 자기가 먹은 음식 값을 다 지불하는 것은 물론이다. 또 공정성과 객관성을 위해 한 지역에만 머물지 않고 다른 지역이나 국가를 순환하며 주어진 평가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국제적 미식 경험이 누구보다 풍부하다.
이번 서울 식당을 평가한 인스펙터의 국적은 다양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문화와 음식을 잘 아는 지역 전문가들을 투입했고, 여기에는 한국인도 포함돼 있다. 2014년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전 세계 미쉐린 평가원은 120여 명이며 인당 연평균 250차례 외식, 160여 일 출장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식당은 대부분 미쉐린 평가원이 다녀간 것을 전혀 모른다. 영화 ‘더 셰프(Burnt)’에 묘사된 미쉐린 평가원은 사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이들의 식당 평가 기준은 5가지다. 요리 재료의 수준, 요리법과 풍미의 완벽성, 요리의 개성과 창의성, 가격에 맞는 가치, 마지막으로 전체 메뉴의 통일성과 언제 방문해도 변함없는 일관성이다.
미쉐린 가이드의 위력은 별을 받은 식당에 손님이 몰려드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니 이번에 별 하나 이상은 받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렇지 못한 식당, 예상보다 별 개수가 적은 식당, 아예 가이드에 등재되지 못한 식당은 평가 결과에 낙담했을 것이다. 어느 매체에 소개된 한 양식당 소믈리에의 인터뷰를 보면 “이전 해외 평가기관 심사에서 우리보다 낮은 등급을 받았던 업장이 이번에 더 나은 평가를 받아 직원들의 상심이 크다”며 “어떤 부분이 모자랐는지 구체적인 원인을 찾기 어려워 총주방장도 혼란스러워하고 있다”고 밝힐 만큼 파장이 적잖다.
또 이번 미쉐린 가이드에서 한식이 주목받자 상대적으로 서양음식 전문식당들의 충격이 컸다. 특히 다른 평가기관에서 늘 높은 점수를 받아온 프랑스 식당이나 이탤리언 식당들이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프렌치나 이탤리언 음식을 한국에서 본토보다 더 잘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반면 한국 식자재로 정성껏 준비한 한식에 외국인은 더 많은 눈길을 준다. 한국이 아니면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흥미로운 음식, 기억에 오롯이 남는 ‘총체적 문화 체험’이기 때문이다.
‘미쉐린 가이드 서울’ 편에는 음식 값이 6000원부터 34만 원에 이르기까지 식당이 골고루 포함돼 있다. 결코 프랑스인의 잣대로 서울 미식문화를 제멋대로 평가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또 프랑스인이든, 러시아인이든 그들의 미식 잣대로 한식을 평가하는 게 무슨 문제인가. 오히려 외국인에게 다양한 평가를 듣는다는 것이 더 흥미롭지 않은가. 여러 잣대로 평가해야 미식문화도 더욱 발전할 수 있다. 덧붙여 ‘블루리본서베이’나 한국판 미쉐린 가이드라 부르는 ‘코릿’에서 선정한 맛집 리스트와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음식으로 고객을 행복하게 하라
이번 미쉐린 가이드의 한국 상륙이 인터넷을 통해 유명해진 수많은 맛집, 신뢰하기 어려운 맛 평가를 일삼으며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던 일부 파워 블로거를 조금은 진정하게 만들지 않을까 기대한다. 요란한 먹방, 쿡방 등으로 준연예인이 된 일부 스타 셰프의 식당이 미쉐린 가이드에 등재되지 않은 사실을 보면서 맛집이란 무엇인지, 진정한 스타 셰프는 어떤 사람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흔히 언급하듯, 미쉐린 가이드는 ‘미식계의 성서’가 아니다. 여러 맛집 가이드 가운데 하나로 보면 된다. 참고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요리사도 별에 연연하지 말기를 바란다. 별을 좇기보다 음식으로 고객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만 신경 쓰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식당에 별이 달릴 것이다.
별이 싫으면 거부하면 된다. 일단 별을 받고 나면 별 개수를 늘리려거나, 반대로 잃지 않으려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뭐든 과도하게 욕심내면 피곤해지기 마련이다. 2013년 영국 유명 셰프인 고든 램지(Gordon Ramsay)는 자신의 미국 뉴욕 식당이 미쉐린 가이드 별 하나를 잃자 “(이런 일을 당한다는 것은) 그 어떤 셰프에게도 감정적으로 매우 동요되는 일이다. 마치 여자친구를 잃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낀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렇게 세계 수많은 셰프에게 미쉐린 가이드의 별은 로망이자 삶 자체다.
개인적으로 해외여행을 하다 맛집을 방문하고 싶을 때 그 지역 미쉐린 가이드부터 살펴보곤 한다. 별을 받은 식당이 있다면 직접 찾아가 식사한다. 아직까지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다. 물론 미쉐린 가이드 별이 달린 식당에 갔다 실망했다는 사람도 많이 만나봤다. 개인의 미식 취향이 다 같을 수는 없다.
‘미쉐린 가이드 서울’ 편에 나온 식당과 관련해 새로운 정보가 있다면 미쉐린으로 직접 보내면 된다. 실제로 미쉐린 본사로 연평균 4만5000여 통의 e메일과 우편물이 온다고 한다. 미쉐린 가이드 제작진은 독자의 어떤 의견도 환영한다. 그중 정보가 흥미롭고 타당하다고 생각하면 그들은 ‘암행어사’를 파견한다. 물론 여행과 식사비용은 미쉐린 본사 측에서 제공한다. 116년에 걸친 맛집 가이드의 전통, 권위, 공신력은 그렇게 얻어지는 것이다(‘미쉐린 가이드 서울’ 편 관련 e메일 주소는 michelinguide.seoul@michel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