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어떤 메시지도 전할 것이 없고 그 어떤 것도 증명할 것이 없다. 대상을 보고 느낄 뿐이며, 거기서 얻은 인상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프랑스 출신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itier-Bresson·1908~2004)은 국내에도 팬층이 두터워 거의 매년 열리다시피 하는 그의 사진전을 빼놓지 않고 보는 이가 많다. 대표적인 전시만 꼽아도 2005년 ‘찰나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전(서울 예술의전당), 2012년 ‘결정적 순간’ 전(서울 세종문화회관), 2014~2015년 ‘영원한 풍경’전(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이 있다. 그 밖에 브레송이 1957년 로버트 카파 등과 함께 설립한 보도사진 그룹 ‘매그넘 포토스’의 전시가 열릴 때도 브레송은 빠짐없이 등장한다.
어쩌면 식상할 만큼 익숙한 그의 사진이지만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스크랩북’이란 제목으로 기획된 이 전시는 1946년 작가가 직접 인화한 250여 점의 ‘오리지널 빈티지 프린트’를 볼 수 있다는 기대에 브레송 팬들의 발걸음이 다시 한 번 이어지고 있다.
이 전시에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스크랩북’이란 제목이 붙은 데는 기막힌 사연이 있다. 1933년 미국 뉴욕에서 첫 전시회를 개최하고 동유럽과 멕시코에서 사진 작업을 계속하며, 스페인전쟁 관련 다큐멘터리 3편을 제작하는 등 보도사진 분야에서 이미 상당한 입지를 구축한 브레송은 40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 포로가 됐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뉴욕현대미술관 큐레이터 보몬트 뉴홀은 브레송이 죽었거나 실종됐다고 판단하고, 지인들에게 수소문해 그의 작품들을 모아 회고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1943년 2월 브레송은 세 번의 시도 끝에 탈출에 성공해 기적처럼 돌아왔다. 생환 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브레송은 자신의 사진 중 300여 점을 골라 작은 크기로 직접 인화한 뒤 뉴욕으로 향했다.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브레송은 스크랩북을 한 권 구매해 이 사진들을 연대순으로 붙였는데, 이 가운데 큐레이터와 함께 163점을 골라 47년 2월부터 두 달간 뉴욕에서 첫 회고전을 열어 대성공을 거뒀다.
이 스크랩북에 담긴 선별된 사진들은 브레송이 1932년부터 46년까지 작업한 것으로, 30대 후반에 이른 그가 사진 인생 전반기를 정리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브레송은 90년대 초 불현듯 이 스크랩북 속 작품들의 가치를 깨닫고 접착제 등으로 훼손되는 것을 막고자 사진 대부분을 떼어내 따로 보관해 현재 스크랩북에 남은 원본은 13쪽뿐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스크랩북’전에서는 이러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은 스크랩북 원본과 함께 250여 점의 오리지널 빈티지 프린트 외에도 10여 점의 대형 프린트, 뉴욕현대미술관과 회고전을 준비하며 뉴홀과 주고받은 서신, 친필 다이어리 등 다양한 자료를 함께 볼 수 있다. 특히 스크랩을 하기 위해 8×12cm 엽서 크기로 인화한 사진들은 오히려 사진 앞으로 다가가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평생 결정적인 순간을 찍으려 애썼으나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는 브레송의 말을 음미할 수 있는 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