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때 갑자기 영어시험이 어려워졌다고 아우성인 것은 비단 이 학교의 일만은 아니다. 학부모들이 주로 활동하는 한 인터넷 카페에는 모 중학교 3학년 1학기 영어시험 평균 점수가 50점 미만이고, 만점자가 전교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다는 소식도 올라와 있다. 결론은 어려워진 시험에 대비해 사교육이 필요하다는 광고성 글이다.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지역 학원들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학교별 영어시험 유형 및 난이도 분석과 함께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곤 한다. ‘중학교 3학년 1학기 영어시험은 외고, 국제고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지원 여부를 결정짓는 시험이다.’
내신 부담 경감은커녕 선행 기회로 악용
중학교 1, 2학년까지만 해도 평이하던 영어시험이 3학년 때 갑자기 어려워지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해부터 중학교 내신 평가 방식이 전 학년 성취평가제(절대평가)로 전환됐지만, 외국어고(외고)와 국제고 입시전형이 2학년 영어 성적은 절대평가, 3학년 영어 성적은 9등급제 상대평가의 혼합방식을 채택하면서 영어 시험 난이도가 뜨거운 감자가 됐다. 특히 외고, 국제고 지원자가 많은 일부 중학교에서 변별력을 확보하고자 3학년 영어시험의 난도를 크게 높이는 경향이 있다. 특성화고도 석차백분율을 내는 등 상대평가로 학생들을 선발해, 중학교에 절대평가를 도입한 취지에 역행하고 있다.한편 자기소개서(자소서)와 면접으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자율형사립고(자사고) 역시 중학교 교육을 파행으로 몰아가는 원인이 되고 있다. 올해부터 학생의 진로탐색을 위해 전면 시행 중인 중학교 자유학기제가 자사고 진학에 필요한 ‘스펙 쌓기’ 시간으로 변질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 교육부의 취지는 중학교 1학년 때 자유학기제를 시행하고, 전 학년 절대평가를 실시함으로써 학생들의 학업 스트레스와 학부모의 사교육 부담을 줄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방침은 외고, 국제고, 특성화고, 자사고 등 고교 입시요강과 충돌하면서 고교 진학을 준비하는 학생에게 혼선을 불러왔고, 특히 일반계 고교 진학자에게는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주고 있다.
중학교 내신 평가 방식이 성취평가제로 전환된 것은 2015년부터. 성취평가제란 기존 상대평가와 달리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에 석차를 쓰지 않고 A부터 E까지 성취도 수준만 기록하는 방식이다. 성적표에는 필기시험 점수와 등급만 적히고 석차는 나오지 않는다. 이처럼 중학교에 절대평가를 도입한 것은 상대평가로 과열된 내신 경쟁을 완화하고, 학생들의 학업 부담을 줄여 사교육비를 낮추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외고와 국제고는 변별력 확보를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3학년 영어시험 성적을 9등급제 상대평가 방식으로 반영하고 있다. 현재 국제고 합격권은 2학년 A, A등급, 3학년 1, 1~2등급으로 거의 매 학기 영어에서 최고 등급을 유지해야 한다. 이에 일부 중학교가 외고나 국제고를 준비하는 소수의 학생이 1등급을 받을 수 있도록 3학년 영어시험을 어렵게 출제하고 있는 것이다. 9등급제 상대평가에서는 시험이 너무 쉽게 출제돼 만점자 수가 전교생의 4%를 넘으면 만점을 받고도 1등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고, 한 문제만 틀려도 2, 3등급으로 밀릴 수 있어 외고·국제고 지원자에게는 치명적인 결과가 된다. 그래서 자녀의 외고·국제고 진학을 염두에 둔 학부모는 ‘학교알리미’ 사이트에서 각 중학교 3학년의 내신 영어 A등급 비율을 살펴보고 특목고 진학에 유리한 학교인지 아닌지를 구별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중학교 3학년 영어시험 난이도 논란의 피해는 일반계 고교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에게 돌아간다. 서울 한 중학교 영어교사는 “3학년 때 영어시험이 갑자기 어려워져 성적이 떨어지면 일반계 고교에 진학할 계획인 학생 가운데 일부는 영어 과목 자체에 흥미를 잃어 영포자(영어 포기자)가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특성화고도 입시전형에서 내신을 절대평가 기준이 아닌 석차백분율로 반영하고 있다. 특성화고는 도입 당시부터 신입생 전형 방법 가운데 가장 비중이 큰 일반전형에서 석차백분율을 활용해왔다. 석차백분율이란 학생의 내신을 상대적으로 평가해 백분율로 환산한 수치다. 사실상 외고, 국제고, 특성화고 진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교육부의 절대평가정책이 거의 무의미한 셈이다.
중학교에서 받아 든 성적표에는 절대평가 점수만 나와 있지만, 실제 특성화고 입학전형에서는 점수가 아닌 석차로 평가받는 만큼 학생의 내신 관리 부담은 더욱 커졌다. 중학생 대상 인터넷 강의 사이트 수박씨닷컴이 지난해 3월 중학생 168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9.7%가 ‘내신 부담이 전혀 경감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교사들도 ‘내신 부담이 줄어들지 않았다’에 대다수가 동의했다. 수박씨닷컴이 중학교 교사 81명을 대상으로 같은 질문을 한 결과 응답자의 64.2%가 ‘내신성적 평가 방식이 절대평가로 바뀌었지만 학생들의 내신성적 부담은 여전하다’고 답했다.
입시용 스펙 쌓기로 변질된 진로탐색
교육부가 올해부터 야심차게 추진한 중학교 자유학기제 역시 자사고 입시에 악용되면서 새로운 부작용을 낳고 있다. 현 중학교 1학년생부터 적용되는 자유학기제는 1학년 때 내신 평가가 없는 대신 학교가 준비한 토론 및 실습수업이나 진로탐색 같은 활동을 하게 한 교육정책이다. 이 정책의 취지는 내신 부담을 줄이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학생이 직접 진로를 탐색하는 것이지만, 실제 교육현장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특목고 진학을 준비하는 학생은 자유학기제 기간에 선행학습을 위해 학원을 찾고, 자사고를 준비하는 학생은 자소서에 쓸 경력을 만든다. 일부 학생은 학생부 관리를 위해 컨설팅업체를 찾는 등 진로탐색보다 선행학습과 고교 입시 준비 기간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 강서구에 사는 조모(46·여) 씨의 딸은 올해 중학교에 입학했다. 조씨의 딸은 성적이 상위권으로 일찌감치 특목고나 자사고 진학을 목표로 잡았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 자유학기제가 시작되자 스스로 전공과 직업을 탐색할 기회라는 생각해 아이 나름 기대가 컸지만 이내 불안감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자유학기제 취지대로 진로탐색 기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학원 광고를 보니 이게 아니다 싶었죠. 이 기간에 고교 과정까지 선행학습을 해야 한다는 학원 광고를 보니 ‘우리 아이만 뒤처지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입시 상담을 신청했습니다.”
자사고는 2단계 전형으로 학생을 선발한다. 1단계에서 추첨으로 정원의 1.5~2배수를 뽑은 뒤 자소서 등 서류평가와 면접평가로 최종합격자를 뽑는다. 1단계가 추첨이니 사실상 자소서와 면접이 당락을 결정하는 셈. 이때 경쟁력 있는 자소서를 만들려면 다양한 활동실적이 필요하다. 외고와 국제고도 영어 내신으로 뽑는 1단계를 통과하면 2단계 면접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때 미리 제출한 자소서가 면접의 근거자료가 된다.
이 때문에 자사고와 특목고 입시를 준비하는 상위권 학생과 학부모에게 자유학기제는 선행학습과 자소서용 ‘스펙 쌓기’를 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다. 한 사교육업체 관계자는 “자유학기제로 사교육시장이 위축될 것이라는 전망과 달리 이 기간 특목고 준비생들은 컨설팅 학원부터 찾는다”고 말했다.
무기력한 단속, 속 타는 학부모
그러자 서울시교육청은 자사고 입시에서 자소서 비중을 낮추는 방법을 들고 나왔다. 지난해까지 자사고 지원자는 1단계에서 무조건 자소서를 제출해야 했다. 그러나 서울시교육청이 각 자사고에 추첨 전 자소서 제출 의무를 없애도록 전형 요강 수정을 요청했고, 서울자사고교장연합회는 8월 10일 임시회의를 열어 2017학년도 자사고 입학전형에서 1단계 자소서 제출 여부를 학생 자유 선택에 맡기기로 합의하면서 추후 2단계에서만 자소서를 제출하게 된 것.
그러나 자사고에 지원할 학생들은 여전히 불안하다. 중학생 아들을 둔 서울 양천구의 이모(48·여) 씨는 “어차피 당락을 결정하는 건 자소서와 면접인 만큼 자유학기제 기간에 진로탐색만 하면서 보낼 수는 없다. 자사고 입시를 준비한다면 이 기간에 자소서나 학생부 컨설팅을 해주는 학원을 찾아가고, 외고나 국제고를 준비한다면 3학년 영어 내신 관리를 위해 선행학습을 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학생의 학업 부담을 줄이려는 중학교 교육정책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고등학교 입시제도부터 손대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성천 경기도교육청 장학사는 6월 16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대회의실에서 열린 ‘자유학기제의 올바른 정책방향 모색을 위한 토론회’에서 “특목고나 영재학교, 자사고의 학생 선발권이 존재하는 한 별도의 성적 산출이나 평가 시스템을 요구하게 되고, 변별력을 위한 평가 기제가 작용할 수밖에 없다. 자사고를 일반계 고교로 전환하고 외고나 과학고, 국제고 선발 과정을 일반계 고교와 같이 통합한 후 교육과정 특성화학교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