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지대! 표현부터 무시무시하다. 단죄부터 떠오르기 때문이다. 단죄가 필요할 것 같긴 하다. 4월 총선에서 유권자가 황금분할을 만든 이유는 하나다. 그만 싸우고 일 좀 하라는 것이다. 엄정한 판결에 놀란 정치권이 내건 구호가 바로 ‘협치’다. 국민이 원한 그대로다. 하지만 잉크가 마르기도 전 벌써부터 싸움박질이다.
문제는 앞으로 더 싸울 것이 분명해 보인다는 점이다.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더민주) 모두 8월 전당대회를 거쳤다. 그 결과가 자못 전투적이다. 새누리당은 친박(친박근혜) 일색으로, 더민주는 친문(친문재인) 일색으로 지도부를 꾸렸다. 두 당 모두 중도온건파가 설 자리가 사라졌다. 심지어 ‘동물국회’로 회귀하려는 조짐까지 나타난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정기국회 개회사에서 우병우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 사퇴와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반대 의사를 간접적으로 내비친 직후 벌어진 새누리당의 의장실 점거 사태가 대표적이다. 이는 시작에 불과할 뿐이라는 불길함조차 훅 느껴진다. 그날, 누구라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다시 대안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제3지대론이 힘을 얻는 이유다.
새누리당과 더민주가 잘한다면 나오지 않을 이야기다. 국민의당이 기대에 부응하더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20대 국회 초반부터 3당 모두 국민의 신뢰를 빠른 속도로 잃어가는 중이다. 20대 총선에서 국민은 이 나라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히 보여줬다. 그런 국민이 내년 대통령선거(대선)를 그냥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명대사처럼 “언제나 그랬듯, 답을 찾을 것이다”. 국민 마음 한편에는 늘 이런 아쉬움이 남아 있다. ‘왜 우리는 대선 때마다 차선 또는 차악을 선택해야만 하는 것일까.’ 물론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래도 흔쾌히 지지할 만한 지도자가 별로 없다는 사실에 국민은 불행하다. 우리 국민은 조금 역량이 떨어지는 대통령 밑에서도 잘해왔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버텨왔다. 이제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너무 오래 정체를 겪어 앞으로 나아가고 싶기도 하다. 정말 간절하다. 그래서 다시 제3지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누군가, 정말 나라를 구할 불세출의 영웅이라도 나와주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누가 점지를 받을 것인가. 경쟁은 이미 시작됐다. 벌써 깃발을 내건 인물도 여럿이다. 깃발 1호는 정의화 전 국회의장이 내걸었다. 휘호는 ‘새한국의 비전’이다. 깃발 2호는 이재오 전 의원이 내걸었다. 휘호는 ‘늘푸른한국당’이다. 깃발 3호는 손학규 전 상임고문이 내걸 예정이다. 휘호는 아직 미정이지만 가칭 ‘국민운동체’로 알려졌다. 이들의 지향점은 무엇일까. 중도다.
깃발 3호 손학규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5월 25일 퇴임 기자회견 당시 정파를 넘어서는 중도세력의 빅텐트를 펼쳐 새로운 정치 질서를 이끌어내는 마중물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새한국의 비전에는 여야를 불문하고 중도개혁 성향의 정치인이 적잖게 참여했다.
9월 6일 창당발기인대회를 가진, 이재오 전 의원이 주도하는 늘푸른한국당은 중도실용 민주정당을 기치로 내걸었다. 진보성향이 강한 친노(친노무현) 세력이 주류인 더민주 내에서 언제나 비주류로서 중도개혁 세력의 아이콘이던 손 전 고문은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한계 때문에라도 이념적 지향을 바꿀 수 없다. 측근들은 다시 그가 중도개혁 세력의 중심으로 설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런 와중에 국민의당도 깃발 4호를 내걸 움직임이다. 손 전 고문과 함께 깃발 3호를 내걸 생각이었지만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가 적극적이다. 손 전 고문을 찾아가 장시간 설득한 끝에 안철수 전 상임공동대표와 회동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8월 28일 만나 3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이 때문에 손 전 고문의 국민의당 입당 임박설까지 불거졌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최근 정당 지지율은 물론, 안 전 대표 지지율까지 떨어져 반등 기미를 보이지 않아 국민의당은 절박하다. 설령 지지율이 높다 해도 현 의석으로는 독자 집권이 불가능하다. 새누리당과 더민주를 흔들어 비주류의 탈당을 유도한 다음 국민의당에 입당케 하는 인위적 정계개편이라도 성사해야 한다. 과반수에 근접하지는 못하더라도 의석을 3등분, 균등분할해서라도 더 차지해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국민의당을 해체해서라도 ‘제2의 창당’으로 나아가야 한다. 안 전 대표가 앞에서 끌어당기고 손 전 고문이 뒤에서 미는 방식이 박 위원장이나 안 전 대표가 바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을 이번에 그려본 것이다. 손 전 고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그림이다. 손 전 고문은 본인이 끌어당기는 지위에 서고 싶어 한다. 안 전 대표는 오히려 뒤에서 미는 여럿 가운데 하나이길 바랄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도, 이재오 전 의원도 그렇게 해주길 바랄 터다. 손 전 고문이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지지율이 상승세를 탄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적어도 안 전 대표의 지지율을 추월하기만 해도 제3지대 내에서 손학규로 천하통일은 더는 꿈이 아니다. 그래서 깃발 3호를 내걸기로 한 것으로 보이고, 국민의당은 깃발 4호를 내걸 듯하다.
깃발 5호 반기문
이 경우 국민적 관심사는 한 가지로 모아질 것이다. 3호와 4호, 어느 쪽을 밀어줘야 할까. 그래서, 이 지긋지긋한 극한 대결정치를 끝낼 수 있을까. 모든 깃발이 하나의 깃발로 통일된다면 그 확률은 더 높아진다. 당연히 깃발을 내건 이들도 그것을 잘 안다. 제3지대의 파괴력을 높이려면 가야만 하는 길이다.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오합지졸로 전락할 것이다. 간단한 덧셈정치다.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날지 가능성은 아직 반반이다. 부분 통일도 예상할 수 있다. 이때는 얼마나 영향력 있는 집단이 모이는지가 관건이 될 것이다. 영향력이 큰 핵심 집단이나마 모일 수 있다면 나머지는 오히려 변수가 안 될 것이다.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새누리당이 아닌 제3지대를 택할지 여부도 관심사다. 그 또한 제3지대를 택한다면, 대선 판도는 새누리당이나 더민주가 아닌 제3지대 중심으로 급격히 재편될 것이 분명하다. 대선 초반을 흔들 최대 변수다. 이 경우 두 거대 정당에서 이탈하는 자도 크게 늘어날 것이다. 당연히 정계개편을 넘어선 정계빅뱅이 일어날 가능성도 높아진다. 전당대회 결과 새누리당 지도부가 친박 일색으로 구성되면서, 반 총장의 고민도 깊어졌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추가 하락하면서 새누리당 지지율마저 동반 하락한다면, 결단의 시기가 앞당겨질 수 있다. 최근 그런 징후가 일부 나타나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의 9월 첫째 주 정례조사 결과, 박 대통령 지지율은 30%로 나타났다. 2주째 정체 상태다. 리얼미터 정례조사 결과도 비슷하다. 8월 말 기준 박 대통령 지지율은 전주보다 2.5%p 하락한 31.2%였다. 8월 31일 일간 지지율이 전날보다 4%p 급락한 29.4%로 떨어지기도 했다. 취임 후 최초로 30%대가 일시 붕괴된 것이다. 30%는 심리적 마지노선이다.
전당대회가 끝난 직후부터 새누리당 친박계 지도부는 반기문 영입론에 불을 댕기는 중이다. 이정현 대표가 삼고초려해서 모셨다는 나경원 인재영입위원장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내년 대선을 생각하면 반기문 총장부터 모셔 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 대표는 이미 외부 인사를 적극 영입해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 방식으로 대선 경선을 치르겠다고 선언했다. 비박(비박근혜)계는 바로 이 방식이 결국 여론조사에서 상대적 강세를 보이는 반 총장을 배려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다.
반 총장 측 생각은 어떨까. 5월 반 총장이 방한했을 당시, 총선에서 참패한 친박계가 주류를 이루는 새누리당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느냐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게 측근의 전언이다. 새누리당 전당대회 전 반 총장을 만났다는 새누리당 한 중진의원은 반 총장이 친박계의 지도부 장악을 부담스러워했다고 전한다. 친박계 지도부의 등장으로 오히려 반 총장의 출마 상황이 불리해졌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또 다른 측근의 말도 들린다. 반 총장은 이기고도 지는 상황을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회창 전 총재처럼 당대 경선을 압도적으로 통과해도 본선에서 민심과 거리가 멀어져 패배하는 상황이다. 선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불과 3개월 뒤 반 총장이 제3지대를 택한다면, 새누리당발(發) 정계개편이 먼저 일어날지도 모른다.
반 총장의 정치적 판단에 적잖은 영향을 끼치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생각도 무시할 수 없다. 김 전 총리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역시 제3지대와 정계개편을 구상 중인 것으로 보인다. 제3지대가 커지는 것을 전제로, 제3지대 후보자들이 오히려 메이저리그를 형성하는 것을 전제로 그들은 어떻게 통일을 이뤄낼 수 있을까. 결국 개헌밖에 없을 것이다.
개헌 트로이카가 떴다
반 총장의 정치적 후견인인 김 전 총리는 내각제 개헌론의 원조다. 몸은 비록 더민주에 있지만 마음은 제3지대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더민주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도 내각제 개헌을 주장한다. 국민의당에서 정계개편에 누구보다 열심인 박지원 위원장도 내각제 또는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주장한다. 김종인과 박지원이 끌고 김종필이 미는, 정치 9단 3인방의 개헌 트로이카가 뜬 격이다. 제3지대, 깃발 1호 정의화 전 국회의장도 깃발 2호 이재오 전 의원도 개헌에 적극적이다. 깃발 3호 손학규 전 고문도 개헌에 찬성한다. 다만 대선주자들이 개헌을 공약하고 차기 대통령이 취임 직후 추진해야 한다는 조건부 개헌론을 주장한다.깃발 5호가 될지 모르는 반 총장은 개헌에 대해 아직 말이 없다. 그러나 친박계는 개헌을 전제로 반기문 영입을 고려 중이다. ‘반기문 대통령-친박계 총리’ 그림이다. 반 총장도 제3지대로 나오는 순간, 개헌을 주장할 것이 분명하다. 정치적 기반이 약한 만큼 세력을 규합해야 할 필요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개헌은 정계개편의 매개체이자 촉매제다. 촉매제인 이유는 개헌으로 대선주자 간 연대가 가능한 구도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개 대통령-아무개 총리’ 구도 또는 ‘돌아가면서 총리’ 구도가 그것이다. 손학규가 치고 반기문이 받는다면 개헌도, 제3지대도 더는 농담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