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박근혜 대통령은 소원을 풀었다. 친박(친박근혜)계 대표를 만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친박계 대표에 친박계 원내대표까지, 완벽한 라인업이다. 비박(비박근혜)계 김무성 대표에 비박계 유승민 원내대표가 있던 시절과 비할 바가 아니다. 이제 거침없이 나아가는 일만 남았다. 잔여 임기 동안 당청관계는 순항할 테고, 여당발(發) 레임덕도 없을 것이다. 지난 총선 당시 논란에도 친박 공천을 강행한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누가 좋을까?
문제는 균형이 깨져도 너무 깨졌다는 점이다. 8월 9일 전당대회에서 친박계 후보 3인의 득표율은 전체의 72.23%에 달했다. 최고위원 선거에서도 친박계 최고위원 후보 5인의 득표율은 전체의 64.47%나 됐다. ‘도로 친박당’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더친박당’이라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새누리당이 더친박당의 길을 택하면서 내년 대통령선거(대선) 당내 경선도 보나 마나 한 게임이 되고 말았다. 친박의, 친박에 의한, 친박을 위한 경선이 될 개연성이 확연히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정현 신임 대표는 경선 과정에서 슈퍼스타K 방식의 대선주자 선출을 공약했다. 당내에는 유력 인사가 없다고 전제하고, 외부 인사까지 참여하는 경연을 국민에게 펼쳐 보이겠다는 것이다.
언뜻 듣기에는 공정한 대선 경선 관리를 약속한 듯하다. 그러나 곱씹어보면 그렇지 않다. 당내 인사보다 외부 인사에 방점을 둔 경선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당내 인사인 김무성 전 대표보다 외부 인사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힘을 실어주겠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벌써 반기문 대망론이 탄력을 받으리란 관측이 넘쳐난다.
더욱이 이 대표는 김 전 대표에게 이미 쓴소리를 여러 번 했다. 특히 총선 직후 김 전 대표 지지율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지적했다. “오늘 아침 여론조사를 보니까 김무성 전 대표가 그동안 1, 2, 3위에 올랐던 대선주자 조사에서 아예 7위로 밀려 있더라. 그게 심판이 아니고 뭐냐.” “이런 감이 안 되는 인간을 ‘대선주자’ 반열에 올려 여론조사해주고, 언론에서는 날마다 등장시킨다.” 김 전 대표는 전당대회 과정에서 비박계 단일후보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래저래 이 대표의 눈 밖에 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대표 경선 막판에 비박계 주호영 후보를 만나 사실상 지지를 선언한 오세훈 전 서울시장 역시 눈 밖에 났다. 당시 이 대표는 따로 기자회견을 갖고 “이런 만남이 언론에 어떻게 보도되고, 당원에게 어떻게 비칠지 판단하지 못했다면 정말 실망스럽다”면서 “대권을 꿈꾸는 유력한 당내 인사인데 정말 중립적인 처지에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며 오 전 시장을 맹비난했다. 이 대표는 이때 오 전 시장을 마음속에서 지운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당내 대선주자인 유승민 전 원내대표에 대한 시선도 곱지 않다. 박 대통령을 ‘보스’로 부르는 그답게, 유 전 원내대표에 대한 인식은 박 대통령과 판박이다. 박 대통령은 유 전 원내대표의 언행을 배신이라 규정짓고 선거에서 심판을 요청했는데, 이 대표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아예 인간 이하로 규정짓는다. 이런 식이다. “아주 나쁘게 본다. 솔직히 그런 인간을 나는 사람으로 안 본다. 자기를 믿어주고 정을 나눈 사람에게 등 돌린다는 것은 아주 독한 심사를 가졌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일도 저지를 수 있다.” 거의 저주 수준이다.
남경필 경기도지사와 원희룡 제주도지사에 대해서는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을까. 과거 ‘남·원·정 트리오’의 인연으로 이번 대표 경선에서 비박계 정병국 의원을 지원한 그들이다. 비박계라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이들은 이 대표의 기준으로 보면 번외일 공산이 크다. 여론조사 지지율이 현저히 낮기 때문이다. 김 전 대표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심판을 받은 것 아니냐는 반응을 보인 그다.
이정현 대표의 대선 경선 다이어리
이 대표는 이미 구체적인 대선 경선 플랜까지 제시한 상태다. 일단 후보군은 최소 10명에서 최대 13명 정도다. 10명인 경우 4명은 당내 인사로, 6명은 외부 인사로 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들을 대상으로 최단 3개월, 최장 5개월 동안 지역 순회 토론회를 개최하고 열흘에 1명씩 탈락시켜 최종적으로 2명을 남긴 다음 전당대회에서 후보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보 탈락 여론조사 개시 시점을 4월로 적시했다. 대선후보 선출 전당대회를 2017년 9월 초에 개최한다고 전제할 때 역순으로 계산하면 첫 지역 순회 토론회는 이르면 내년 1월 초, 늦어도 3월 초부터는 시작해야 한다. 공교롭게도 내년 1월 초면 반기문 총장이 임기를 마치고 입국해 활동을 개시할 시점이다.이 대표의 구상대로 대선 경선을 끌고 갈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대선주자다. 이 대표의 생각처럼 10명 이상, 특히 외부 인사 6명이 경선에 뛰어드느냐의 문제다. 반 총장이 경선에 참여한다고 전제할 때 외부 인사라면 누구나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반 총장이 상당한 중량급인 데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 친박계의 지지가 확고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부 인사라면 누구나 박 대통령과 친박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 여부를 먼저 타진하려 들 것이다.
차라리 대표가 비박계라면 외부 인사가 적극 참여할 개연성이 높다. 그나마 비빌 언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중량급 외부 인사 6명 이상을 영입하겠다는 계획은 달성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경량급은 넘쳐나겠으나 흥행을 일으킬 수 없다는 점에서 본인들이 원해도 만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서겠다는데 무조건 말릴 명분이 없고 스스로 약속한 내용을 번복할 수도 없으니, 어쩌면 이 대표가 이런 일로 더 고충을 겪게 될지도 모르겠다.
외부 인사가 모두 중량급이라도 고민스럽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미 반 총장에게 상당한 언질을 줬다면 더욱더 그렇다. 중간에 악재가 불거져 탈락할 위험성을 고려한다면 반 총장 외 대안을 준비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반 총장과 나머지 중량급 외부 인사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지 못하면 불공정 경선 논란에 휩싸이면서 본선에 가기도 전 내부적으로 붕괴되고 마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반 총장을 비롯한 중량급 외부 인사를 밀 경우 친박계와 관계 설정도 예민한 문제다. 계약서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구두로, 또는 이심전심 교감으로 집권 이후 권력 배분이나 관리에 대해 합의를 이뤄야 하는데, 서로가 기대 차이가 클 경우 분란의 여지가 많다. 그나마 외부 인사가 정치 경험자라면 대화가 잘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기 때문에 조율과정에서 잡음이 날 수밖에 없고 합의가 순식간에 깨질 확률도 매우 높아진다.
외부 인사와 관계 설정을 좀 더 단단하고 확실하게 하는 차원에서 나올 수 있는 대안이 바로 이원집정부제 개헌이다. 한때 설로 나돌던 ‘반기문 대통령 더하기 최경환 국무총리’ 구도가 바로 그것이다. 국민이 직선으로 선출하는 대통령은 중량급 외부 인사로 하고, 국회가 선출하는 실세 총리는 친박계 인사로 하는 그림이다. 무엇보다 제2의 친박정권 수립에 부정적일 여론을 비켜 갈 수 있다는 점에서도 박 대통령이나 친박계에게는 매력적인 대안일 것이다.
이정현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
이 대표는 당내 친박계 단일후보 만들기도 동시에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이원집정부제 개헌이 어려워졌을 때의 대안이다. 반 총장 또는 다른 외부 인사를 친박계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당연히 그 정권을 제2의 친박정권으로 가져가기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대선 이후 친박계가 계속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오히려 신임 대통령에게 되치기를 당할 수도 있다. 신임 대통령이 아예 친박계를 배제하고 신당을 창당하려 들 수도 있다.이런 경우에 대비하려면 유력 친박 대선주자를 키우는 것도 필요하다. 새누리당 당내 인사 가운데 유력 대선주자는 김무성, 유승민, 오세훈, 남경필, 원희룡 정도다. 모두 비박계다. 이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친박계 중 몇 사람을 유력 대선주자로 만들어야만 한다. 일단 최경환 의원과 정우택 의원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기대만큼 뜨지 않으면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 필요하면 당 내외 친박계 총동원령을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 경우 이 대표는 비박계가 주장하던 당권과 대권 분리 규정 폐지를 추진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본인도 대권에 도전하는 길을 열어놓는 것이다. 이 대표는 새누리당의 노무현을 꿈꾼다. 노 전 대통령이 야당 출신으로 적지인 영남에 지속적으로 출마해 인지도를 높였듯이, 본인도 여당 출신으로 적지인 호남에 출마해 당선까지 이룬 제 나름의 신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미 친박계가 분리 규정을 유지하기로 했고 혁신위원회가 확정한 사안이다 보니 다시 뒤집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대표에 대한 호남의 반응이 대표직 선출을 계기로 거의 폭발 수준으로 간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호남을 공략하는 서진(西進)전략을 주도해 정권 재창출 꿈을 달성하겠다는 데 반대할 새누리당 지지세력은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를 추진했던 것은 정치권에서는 더는 비밀이 아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이 이정현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를 추진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다. 물론 아직은 실현 가능성이 별로 없는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그래도 그 나름 신화를 만들어온 이 대표이기에 끝까지 꿈을 버리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