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재해(산재)가 잇따르고 있다. 5월 28일 서울메트로 2호선 구의역에서 혼자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젊은 청년이 사망했다. 최근에는 전자서비스센터 소속 에어컨 수리기사가 실외기를 수리하던 중 추락해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하청근로자였다. 규정대로라면 2인 1조로 일해야 하나 혼자 일하다 변을 당했다는 것도 같다.
산재가 하청근로자에게 집중되고 있다. 실제로 고용노동부의 2015년 산재 노동자 현황 통계에 따르면, 산재 노동자 수는 9만129명이고 사망자는 955명으로 나타났다. 특히 전체 산재 사망자 중 40.2%가 하청근로자였다. 2012년 당시 37.7%였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증가한 셈이다. 이 수치는 점점 올라갈 것이 틀림없다. 물어보고 싶다. “왜 하필 하청근로자인가.”
흔히 외주화는 세계적 추세라고 한다. 요즘은 부품 하나부터 최종 생산품까지 전 공정을 한 회사가 수행하는 경우가 드물다. 가히 ‘분업’ 시대다. 기업이 서로 일을 나눠서 한다. 각자 맡은 일만 처리하는 식이다. 가장 흔한 예가 경비와 청소다. 식당도 마찬가지다. 자동차공장이라도 청소는 해야 한다. 구내식당도 둬야 한다. 예전 같으면 원청근로자가 담당했을 일이다. 지금은 다르다. 전부 ‘전문용역업체’라는 하청회사에 맡긴다. 그 덕에 원청회사는 자동차 생산에만 집중할 수 있다. 공정 일부를 하청회사가 떠맡기도 한다. A사는 부품을 만들고 B사는 프레임을 만드는 식이다. 원청회사인 C사는 이것들을 납품받아 조립한 뒤 판매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판매 제품에 대한 애프터서비스도 필수다. 수리업무가 그런 경우다. 이 역시 하청회사에 맡긴다. 이번에 사고가 난 스크린도어 수리작업도, 에어컨 수리작업도 그런 경우다.
외주화의 장점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비용 절감’과 ‘고용 유연성’이다. 우리는 주로 비용 절감에 방점을 찍는다. 그러다 보니 원청회사는 하청회사를 ‘쪼기’ 마련이다. 무슨 수를 쓰든 이 돈으로 맡은 일을 해내라는 식이다. 하지만 요구사항은 줄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아진다. 고객에게 더 친절해야 하고, 더 신속하게 수리를 해내야 하는 것이다. 무모하다 싶을 때도 있지만, 하청회사로서는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하는 카드다. 그야말로 울며 겨자 먹기다. 결국 이 모든 부담은 고스란히 하청근로자에게 지워진다. 하지만 그들에게 열악한 근로환경 운운하는 건 사치다. 부당한 걸 부당하다고 말할 기운도 없거니와 들어줄 이도 없다. 이게 현실이다. 구의역 사고에서 보듯 하청근로자는 2인 1조가 아니어도 혼자 얼른 일하러 나갈 수밖에 없다. 저렴한 비용에 서비스 수준까지 높일 수 있는 외주화라니, 원청회사로서는 나쁠 게 없다. 하지만 그것이 부메랑이 돼 돌아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민의 분노는 원청회사를 향하고 있다.
외주화는 주로 원청근로자들이 꺼리는 위험 작업에 집중돼 있다. 여기에 깔린 심리가 ‘원청의 안전은 중요하고, 하청의 안전은 나 몰라’이기에 괘씸하다. 이런 사고방식이 외주화를 통한 비용 절감 전략과 교묘하게 맞물리면서 위험은 극대화된다. 하청근로자를 대상으로 하는 안전장비 대여나 안전교육은 생략되기 일쑤다. 운이 좋으면 살고, 운이 나쁘면 죽는 구조인 것이다. 이쯤 되면 어느 교육부 관료 말마따나 ‘하청은 개·돼지’고, 노동시장은 이미 ‘신분사회’가 돼버렸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이 구조를 바꿔야 한다.
첫째, 산업안전에 관한 한 ‘비용 원리’와는 이별해야 한다. 산업안전은 늘 뒷전이었다. 비용을 아껴야 할 때면 하청회사는 제일 먼저 산재 예방 비용부터 줄였다. 하청근로자의 인건비로 돌리기에 급급했다. 산재야 발생하지 않으면 그만이니, 굳이 돈을 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온 것이다. 이른바 ‘설마법칙’이 근로자 안전을 집어삼킨 꼴이다. 이런 현실을 그대로 방치한 채 ‘선진 대한민국’을 운운하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이참에 ‘도급 적정성 평가제도’ 도입을 제안하고 싶다. 외주화를 하고자 하는 경우 산재 예방 비용을 도급계약에 별도로 산정하게 하되, 작업 위험성 등을 고려해 그 비용이 충분하게 설정됐는지를 행정관청이나 전문기관으로부터 사전 심사를 받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산재 예방 비용을 아예 다른 용도로 전용하지 못하도록 원천봉쇄해야 한다. 혹여 산재 예방 비용을 떼고 나면 하도급 공사를 맡아봐야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하소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에겐 확신이 필요하다. 그런 하도급계약이라면 퇴출시키는 게 맞다. 외주화를 반대할 생각은 없다. 반대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하청근로자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셋째, 산재는 근로자 개인의 불행이라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 산재는 가정도 파괴시키고, 회사도 곤란하게 만든다. 업무는 단절되고 노동법 제재도 받아야 한다. 국가도 엄청난 비용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2013년 기준으로 산재에 따른 경제 손실 규모는 18조 원을 넘어섰다. 이쯤 되면 산재는 ‘공공의 적’이다. 산재예방제도를 그저 근로자 보호 규정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의 공존전략이요, 공적 질서규범이다. 예컨대 작업장에서는 안전모를 써야 한다는 규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안전모를 쓰지 않으면 아예 작업이 진행될 수 없도록 시스템화해야 한다. 이는 전적으로 정부의 몫이다.
귀한 아들과 든든한 아빠를 잃은 가족의 심정이 어떨지 감히 짐작조차 어렵다. 피해자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일터를 과연 어떤 곳으로 기억할까. 우울하고 섬뜩한 곳이 아닐까. 단언컨대 일터는 가장 안전한 공간이어야 한다. 그게 행복한 선진 대한민국을 만드는 토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산재가 하청근로자에게 집중되고 있다. 실제로 고용노동부의 2015년 산재 노동자 현황 통계에 따르면, 산재 노동자 수는 9만129명이고 사망자는 955명으로 나타났다. 특히 전체 산재 사망자 중 40.2%가 하청근로자였다. 2012년 당시 37.7%였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증가한 셈이다. 이 수치는 점점 올라갈 것이 틀림없다. 물어보고 싶다. “왜 하필 하청근로자인가.”
흔히 외주화는 세계적 추세라고 한다. 요즘은 부품 하나부터 최종 생산품까지 전 공정을 한 회사가 수행하는 경우가 드물다. 가히 ‘분업’ 시대다. 기업이 서로 일을 나눠서 한다. 각자 맡은 일만 처리하는 식이다. 가장 흔한 예가 경비와 청소다. 식당도 마찬가지다. 자동차공장이라도 청소는 해야 한다. 구내식당도 둬야 한다. 예전 같으면 원청근로자가 담당했을 일이다. 지금은 다르다. 전부 ‘전문용역업체’라는 하청회사에 맡긴다. 그 덕에 원청회사는 자동차 생산에만 집중할 수 있다. 공정 일부를 하청회사가 떠맡기도 한다. A사는 부품을 만들고 B사는 프레임을 만드는 식이다. 원청회사인 C사는 이것들을 납품받아 조립한 뒤 판매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판매 제품에 대한 애프터서비스도 필수다. 수리업무가 그런 경우다. 이 역시 하청회사에 맡긴다. 이번에 사고가 난 스크린도어 수리작업도, 에어컨 수리작업도 그런 경우다.
위험 작업에 주로 깔려 있는 ‘하청’의 덫
외주화 자체를 비난하기는 어렵다. 세상의 변화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그 폭도 크다. 따라가기조차 벅찰 정도다. 변화의 맨 앞에 기업이 서 있다. 기업은 살아남아야 한다. 무슨 수를 쓰든 조직을 ‘슬림화’하려고 애쓰는 이유다. 기업에게 ‘외주화’는 경쟁력 확보를 위한 수단이기에 앞서, 생존전략인 셈이다. 하지만 ‘약’도 잘못 쓰면 ‘독’이 되는 법. 외주화도 마찬가지다. ‘오·남용’이 문제다. ‘위험의 외주화’도 바로 그런 경우다.
외주화의 장점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비용 절감’과 ‘고용 유연성’이다. 우리는 주로 비용 절감에 방점을 찍는다. 그러다 보니 원청회사는 하청회사를 ‘쪼기’ 마련이다. 무슨 수를 쓰든 이 돈으로 맡은 일을 해내라는 식이다. 하지만 요구사항은 줄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아진다. 고객에게 더 친절해야 하고, 더 신속하게 수리를 해내야 하는 것이다. 무모하다 싶을 때도 있지만, 하청회사로서는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하는 카드다. 그야말로 울며 겨자 먹기다. 결국 이 모든 부담은 고스란히 하청근로자에게 지워진다. 하지만 그들에게 열악한 근로환경 운운하는 건 사치다. 부당한 걸 부당하다고 말할 기운도 없거니와 들어줄 이도 없다. 이게 현실이다. 구의역 사고에서 보듯 하청근로자는 2인 1조가 아니어도 혼자 얼른 일하러 나갈 수밖에 없다. 저렴한 비용에 서비스 수준까지 높일 수 있는 외주화라니, 원청회사로서는 나쁠 게 없다. 하지만 그것이 부메랑이 돼 돌아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민의 분노는 원청회사를 향하고 있다.
외주화는 주로 원청근로자들이 꺼리는 위험 작업에 집중돼 있다. 여기에 깔린 심리가 ‘원청의 안전은 중요하고, 하청의 안전은 나 몰라’이기에 괘씸하다. 이런 사고방식이 외주화를 통한 비용 절감 전략과 교묘하게 맞물리면서 위험은 극대화된다. 하청근로자를 대상으로 하는 안전장비 대여나 안전교육은 생략되기 일쑤다. 운이 좋으면 살고, 운이 나쁘면 죽는 구조인 것이다. 이쯤 되면 어느 교육부 관료 말마따나 ‘하청은 개·돼지’고, 노동시장은 이미 ‘신분사회’가 돼버렸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이 구조를 바꿔야 한다.
첫째, 산업안전에 관한 한 ‘비용 원리’와는 이별해야 한다. 산업안전은 늘 뒷전이었다. 비용을 아껴야 할 때면 하청회사는 제일 먼저 산재 예방 비용부터 줄였다. 하청근로자의 인건비로 돌리기에 급급했다. 산재야 발생하지 않으면 그만이니, 굳이 돈을 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온 것이다. 이른바 ‘설마법칙’이 근로자 안전을 집어삼킨 꼴이다. 이런 현실을 그대로 방치한 채 ‘선진 대한민국’을 운운하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이참에 ‘도급 적정성 평가제도’ 도입을 제안하고 싶다. 외주화를 하고자 하는 경우 산재 예방 비용을 도급계약에 별도로 산정하게 하되, 작업 위험성 등을 고려해 그 비용이 충분하게 설정됐는지를 행정관청이나 전문기관으로부터 사전 심사를 받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산재 예방 비용을 아예 다른 용도로 전용하지 못하도록 원천봉쇄해야 한다. 혹여 산재 예방 비용을 떼고 나면 하도급 공사를 맡아봐야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하소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에겐 확신이 필요하다. 그런 하도급계약이라면 퇴출시키는 게 맞다. 외주화를 반대할 생각은 없다. 반대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하청근로자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가정과 사회, 국가 파괴하는 산업재해
둘째, 산업안전영역에 관한 한 근로계약의 틀을 깨야 한다. 소속이 다르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원청과 하청을 구별할 필요가 없다. 적어도 산재와 관련해서는 그렇다. 이유는 간단하다. 하청근로자는 원청근로자가 해야 할 업무를 대신한다. 그 작업의 성과도 결국 원청근로자에게 귀속된다. 원청근로자와 하청근로자는 모두 생산공동체이자 동료인 셈이다. 산업안전에 관한 책임과 의무를 원청회사가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누가 위험한 작업을 하든 신경 쓰고 배려해야 한다. 위험한 작업을 하청회사에게 떠맡기고, 재해는 나 몰라라 한다면 이것은 무책임을 넘어 범죄 행위라 볼 수 있다.셋째, 산재는 근로자 개인의 불행이라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 산재는 가정도 파괴시키고, 회사도 곤란하게 만든다. 업무는 단절되고 노동법 제재도 받아야 한다. 국가도 엄청난 비용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2013년 기준으로 산재에 따른 경제 손실 규모는 18조 원을 넘어섰다. 이쯤 되면 산재는 ‘공공의 적’이다. 산재예방제도를 그저 근로자 보호 규정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의 공존전략이요, 공적 질서규범이다. 예컨대 작업장에서는 안전모를 써야 한다는 규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안전모를 쓰지 않으면 아예 작업이 진행될 수 없도록 시스템화해야 한다. 이는 전적으로 정부의 몫이다.
귀한 아들과 든든한 아빠를 잃은 가족의 심정이 어떨지 감히 짐작조차 어렵다. 피해자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일터를 과연 어떤 곳으로 기억할까. 우울하고 섬뜩한 곳이 아닐까. 단언컨대 일터는 가장 안전한 공간이어야 한다. 그게 행복한 선진 대한민국을 만드는 토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