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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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읽어주는 남자

소녀의 표정과 손가락의 비밀

이인성의 ‘해당화’

  • 황규성 미술사가·에이치 큐브 대표 andyfather@naver.com

    입력2016-06-20 09: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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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열아홉 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 선생님.’ 어렸을 적 어머니가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 가사입니다. 이인성의 ‘해당화’에는 가사에 나오는 해당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바닷가 근처에서 많이 피는 해당화(海棠化)는 누군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하염없이 기다리다 지쳐 포기하는 애잔한 여인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인성이 바닷가를 배경으로 인물과 자연, 풍경을 그린 이 작품은 높이가 2m 넘는 보기 드문 대작(大作)입니다. 그만큼 작가가 혼신을 다해 그린 것으로, 해방 직전인 1944년 제작돼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마지막으로 출품됐습니다. 뭔가 깊은 사연이 있는 것 같고 풀리지 않는 의문점도 많은 작품으로, 진실은 작가만이 알고 있는 듯합니다.

    화면 중앙 가운데에 붉게 핀 해당화를 중심으로 소녀 2명과 여인 1명이 배치돼 있습니다. 이인성은 꽃과 과일을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아네모네, 칼라, 장미, 들국화, 해바라기 등 다양한 꽃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인성은 직접 마당에 화초를 심고 정원을 가꾸기도 했습니다. 화가는 그림 속 19개의 붉은 꽃송이, 가시 돋친 거친 나뭇가지, 잎이 살짝 벌어진 꽃, 다양한 모양의 잎사귀 등을 아주 자세히 관찰해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림 상단에는 직전까지 천둥 번개가 치다 짙은 먹구름 사이로 빛이 내리쬐는 풍경을 담았습니다. 먹구름, 하늘, 바닷가, 모래사장 순으로 색채를 달리한 수평적인 면 분할을 통해 좁은 공간을 긴장감 있게 표현했습니다. 붉은 언덕과 바닷가 사이에 부드러운 모래사장이 완만하게 펼쳐져 있고, 바다에는 돛단배가 떠 있어 완연한 여름 해변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계절은 분명 여름인데, 화면에 등장한 3명은 겨울옷을 입고 있어 다소 낯선 느낌이 듭니다. 이처럼 이인성의 작품에서는 등장인물이 종종 계절에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발견됩니다. 이인성의 또 다른 걸작 ‘가을 어느 날’의 배경은 가을 들판인데 사람은 여름옷을 입고 있다거나 ‘경주 산곡에서’는 평지 구조물을 언덕 위에 위치시키는 등 불균형한 풍경을 연출함으로써 모순의 시대를 상징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림 가운데에 앉아 정면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여인은 두꺼운 흰색 치마에 분홍색 저고리를 입고 있습니다. 머리에 두른 스카프와 실감 나게 표현된 치마 주름의 각진 의습선을 통해 이인성의 기량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인의 앳되고 애잔한 모습이 작품 제목인 해당화를 연상케 하는데, 이 여인이 누구인지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옆에 있는 두 소녀의 언니로 보입니다. 이인성은 세 번 결혼했으나 부인의 모습은 아닙니다.



    바닥에 덩그러니 굴러다니는 소라들, 의미 없이 놓인 우산도 그러하지만 종교계의 수인(手印)처럼 보이는 소녀들의 손 모습 또한 궁금해집니다. 가운데 앉아 있는 여인은 애잔한 표정과 달리 왼손 검지를 추켜세우고 있습니다. 마치 그림 속에 뭔가 비밀이 있어 관람객에게 은밀하게 신호를 보내는 듯이. 뒤에 서 있는 소녀들도 손을 모으거나 입술에 대고 있어 의문을 자아냅니다. 손가락 방향을 두고 민족 해방에 대한 암시, 조국 독립에 대한 염원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인성이 38세 되던 해인 1950년 6·25전쟁이 터졌고 아들이 태어났는데, 작가는 서울에서 경찰관의 어이없는 총기 오발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박수근, 이중섭, 권진규, 최욱경 등 요절한 작가들보다도 더욱 갑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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