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자금난에 시달리던 현대그룹이 현대증권 매각으로 급한 불을 껐다. 그룹 전체 자산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하던 현대증권을 처분할 경우 현대그룹의 재계 순위는 열 계단 정도 강등될 전망이다. 그러나 자금난의 주범인 현대상선의 장기적인 실적 개선은 아직까지 불투명한 상태라 현대그룹의 앞날 역시 여전히 ‘요주의’다.
‘증권업계의 마지막 대형 매물’로 불리며 업계의 관심을 모았던 현대증권 인수전은 결국 KB금융지주의 승리로 일단락됐다. 현대상선이 보유하던 것과 기타 주주의 것을 포함한 현대증권 지분 22.56%가 걸린 이번 인수전에서 KB금융지주는 1조 원 넘는 금액을 제시하면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인수 절차를 완료하면 KB금융그룹은 미래에셋(KDB대우증권), NH투자증권(우리투자증권)에 이어 증권업계 3위로 발돋움하게 된다.
매각 후 ‘그룹 리스크’ 저평가 벗을 듯
현대증권의 매각 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현대그룹은 2013년 말 현대증권 매각 의사를 밝히고 2015년 초 일본계 금융자본인 오릭스를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 매각을 추진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 금융당국의 대주주 적격성 심사가 늦어지면서 각종 의혹이 제기됐고, 이로 인한 여론 악화에 부담을 느낀 오릭스 측이 2015년 10월 인수를 포기했다.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현대그룹이 현대증권에 가졌던 애착을 짐작할 수 있다. 현대그룹이 매각 후에도 현대증권에 영향력, 심지어 경영권을 행사하려 했다는 정황이 인수 협상 및 추진과정에서 계속 드러났기 때문이다. 위법 우려로 무산되기 전까지 현대그룹은 오릭스 측에 현대증권의 이사 후보를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했다. 또한 계약서에 오릭츠 측이 지분 매각을 추진할 경우 현대그룹 측이 우선적으로 매수할 수 있는 권한과 현대그룹이 받는 지분 매각 대금 6512억 원 가운데 2008억 원을 오릭스의 특수목적법인(SPC)에 재출자하는 조건 등이 명기돼 있어 사실상 현대그룹이 상당한 재정적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현대증권을 다시 사올 것을 염두에 둔 포석이 아니냐는 지적이 많았다. 이러한 논란으로 금융당국의 심사가 지연된 것.
현대증권이 현대그룹의 품을 벗어나 KB금융그룹에 편입될 개연성이 높아지면서
현대증권에 대한 평가는 개선되고 있다. KB금융지주의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소식에 NICE신용평가와 한국신용평가 모두 현대증권의 무보증사채의 신용등급을 ‘상향검토’ 대상으로 변경한 게 바로 그것. NICE신용평가는 신용등급 상향 검토의 이유에 대해 “신용도가 매우 우수한 KB금융지주의 회사 지원 가능성 증가 및 KB금융그룹 금융 계열사와의 연계영업 등을 통한 시너지 효과 발생 가능성을 반영했다”고 밝혔다.
현대그룹 처지에서는 씁쓸한 일이지만 지금까지 현대증권이 시장에서 저평가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바로 현대그룹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번 인수 건에 대해 상대적으로 냉정한 평가를 내리는 KDB대우증권에서도 “현대증권이 현대그룹 하에서 불필요한 증자와 전략 부재로 영업력 및 수익성 위축이 지속됐다”며 ‘지배구조의 불안정성 해소’ 측면에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현대그룹이 그룹 내 자산총액의 27%가량을 차지하던 현대증권을 떠나보내면 그룹 규모가 크게 줄어 입지가 더 위축될 전망이다(25쪽 그래프 참조). 현재 대기업 집단 가운데 자산 규모 면에서 22위 정도를 차지하는 현대그룹은 현대증권 매각이 완료될 경우 그 순위가 32위로 크게 떨어진다. 그룹 내 상장회사는 현대상선과 현대엘리베이터밖에 남지 않게 된다. 한때 재계를 호령하던 그룹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다.
현대상선 경영난이 그룹 위기 불러
현대그룹의 자금난은 대부분 현대상선의 경영난에서 비롯됐다. 오래전부터 자금난에 시달리던 현대상선은 2013년 말부터 꾸준히 사업부와 자산을 매각하고 유상증자를 실시해 3조 원 넘는 자금을 마련했다. 이로 인해 그룹 지주사 격인 현대엘리베이터가 재정적으로 많은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자체 상황이 양호함에도 여러 차례 유상증자를 실시해 현대상선을 지원했다. 또한 현대상선의 경영권 유지를 위해 우호지분을 확보하면서 현대상선 주가가 떨어질 경우 손실액을 보전해주는 파생 상품 계약을 맺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현대엘리베이터는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꾸준히 성장하고도 계속 적자를 냈다. 현대엘리베이터 2대 주주인 쉰들러 측은 2011년부터 이러한 결정이 투자자에게 입힌 손해를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고, 현재까지 소송이 진행 중이다.
비교적 최근인 2015년 말과 2016년 초에도 현대상선은 계열사 지분을 매각하고 자금을 차입하는 등 2700억 원이 넘는 자금을 현대엘리베이터로부터 조달했다. 그러나 현대상선의 영업손실이 계속되면서 만기가 임박하는 차입금 상환이 어려워졌으며 결국 현대증권 매각으로까지 이어진 것.
현대상선을 비롯한 선사 부문 기업들이 전 세계적으로 불황을 맞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2015년 내내 저유가 기조가 이어지면서 해운 운임이 역대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다. 해운·조선업계가 모두 격심한 불황을 맞으면서 경쟁사 간 인수합병(M&A)을 통한 업계 통폐합 조짐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모두 감안하더라도 현대상선의 실적은 눈에 띄게 저조하다. 현대상선의 2015년 영업수익성은 동종업계 국내 경쟁사인 한진해운에 비해 크게 뒤떨어진다(26쪽 그래프2 참조). 한국기업평가는 3월 말 발행한 ‘해운, 2차 치킨게임의 서막 : 현대상선, 용선료 인하 이후 생존가능성은?’ 보고서에서 ‘(세계적인 해운업) 시황이 좋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시장 내 선도기업은 꾸준히 우수한 영업실적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세계 컨테이너업계 1위인 머스크(Maersk)를 비롯한 선두그룹 기업들은 불황이 심각하던 2015년 한 해에도 5% 넘는 영업이익률을 자랑했다. 한국기업평가는 보고서에서 ‘시장 선도업체와 이렇게 오랜 기간 수익성 격차가 유지되는 것은 단순히 시황 문제라기보다 구조적 문제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말한다.
현대상선을 비롯한 국내 컨테이너선사들은 선박과 관련한 고정비 비중이 상당히 높은 수준이라는 것이 한국기업평가 측 진단. 특히 현대상선은 2009~2011년 선대를 확충하면서 용선(업체가 보유한 선박이 아닌 대여한 선박)을 중심으로 선박을 대거 도입했는데, 이때 도입한 용선 11척은 대부분 대형선이었다. 이 때문에 용선료(선박 임차료) 부담이 급증한 것.
현대상선 “매각 순조” 현대EL 진가 드러난다
현대그룹이 2월 추가로 발표한 현대상선 자구안에는 현대증권과 벌크전용선사업부, 부산신항만터미널 지분이 포함돼 있었다. 벌크전용선사업부 지분을 에이치라인해운에 5400억 원에 매각하는 계약을 체결했으며, 부산신항만터미널 지분은 40%가량을 800억 원에 싱가포르항만공사에 매각하기로 했다. 현대상선 측은 “셋 다 매각 진행은 순조로운 상황”이라고 ‘주간동아’에 밝혔다.현대증권 매각으로 현대상선의 자구안은 거의 완료됐고, 채권단의 조건부 자율협약이 개시돼 일단 3개월의 채무유예가 합의된 상태. 신한금융투자는 이후 △선주와 용선료 인하 협상을 타결해 선박차입금을 축소시키고 △현대증권 매각대금이 들어오기 전까지 비협약 사채권자와 회사채 만기 연장을 추진하고 △채권단의 출자전환을 통한 자본 확충으로 현대상선 리스크를 잠재울 수 있으리라 전망한다.
결과적으로 그룹 지주사 격인 현대엘리베이터는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현대상선에 충분한 유동성이 공급돼 리스크가 해소되면 9년 연속 국내 승강기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는 현대엘리베이터의 진가가 드러나리라는 것이 시장의 전망. 신한금융투자는 4월 4일 발행한 보고서에서 ‘이젠 현대상선의 유동성 문제가 대주주인 현대엘리베이터로 전이되거나, 현대엘리베이터가 주주가치를 훼손하는 의사결정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는 기우(杞憂)’라면서 ‘현대상선 리스크 해소가 동종업계 내 가장 저평가된 본업 가치의 재평가로 이어지길 기대한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단서가 있다. 현대상선의 유동성 리스크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 현대증권 매각으로 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 업계 내 최악의 상태에 가까운 실적을 개선하지 못하면 또다시 위기에 빠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