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도 문화가 꿈이고 이상이요?”
이어령(82)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바로 이 한 문장을 말하고자 그는 기자와 함께 두 시간을 달려온 참이었다. 그사이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 갈등이 화제에 올랐고, 산업자본주의의 위기와 한국 청년을 짓누르고 있는 깊은 절망감에 대한 얘기도 이어졌다.
정치와 경제, 역사와 문명, 대륙과 해양을 가로지르는 논의의 폭과 깊이는 명불허전, 혀를 내두를 만했다. 복잡한 대화의 갈래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그의 관심의 배는 광활한 대양을 항해했지만, 늘 문화라는 항구에 정박했다.
돌아보면 60년 전에도 그랬다. 이 이사장은 국문과 재학 시절이던 1956년, 당대 문단의 거장들을 공개 비판하는 칼럼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며 명성을 얻었다. 스물두 살 이어령의 붓끝은 문단을 향해 있었지만, ‘권위 앞에 무릎 꿇지 말자’는 그의 패기 어린 외침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독재정치 등을 거치며 침묵에 익숙해 있던 청년 세대가 사회 전면에 부상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을 듣는다. 하지만 그는 결코 현실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문화를 통해 사회를 보고, 문화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그의 의지는 이 이사장의 최근 작 ‘지(知)의 최전선’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이사장은 1월 펴낸 이 책에서 스스로를 ‘곳곳에서 포성이 터지고 하늘을 가르는 미사일 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 지의 전투가 격렬하게 진행되는 최전선’에 선 ‘전사’로 규정했다. 그리고 전투 한복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앎(知)이라는 무기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지난 60년간 이어온 대외 활동을 대부분 정리한 그는 현재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 일에 전념하며 이 ‘전장’에서 분투하고 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내일을 전망한다. 그를 만난 건 바로 이 얘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최근 한반도는 전례 없는 위기 상황에 놓인 듯 보인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개성공단 폐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배치 추진과 중국의 반발 등이 숨 가쁘게 이어지면서 우리 국토가 패권국들의 전장이 되는 것 아니냐는 두려움이 커지고 있다. 과연 이 위기도 ‘문화’와 ‘지성’의 힘으로 돌파할 수 있을까. 한국의 미래를 위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에 대해 이 이사장은 “이런 때일수록 진영 논리에서 자유로운 지식인의 구실이 중요하다. 현재의 위기를 좀 더 거시적 안목으로 통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가 내놓은 키워드는 ‘지정학’이다. 이 이사장은 “지금 한반도에 닥친 위기는 남과 북, 혹은 미국과 중국의 갈등으로 발생한 게 아니다”라며 “수천 년간 이어져온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충돌”이라고 진단했다.
정의의 사도 배트맨
“지정학적으로 미국·영국·일본은 해양세력이고, 중국·러시아는 대륙세력이에요. 반도 한국은 그 사이에서 때로는 대륙세력에, 때로는 해양세력에 더 큰 영향을 받으며 생존해왔죠.”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중국·러시아의 대륙세력과 긴밀히 연결돼 있었지만, 남북이 분단된 뒤 미국·일본으로 이어지는 해양문명을 따라 경제발전을 이뤘다는 게 이 이사장의 설명이다. 반면 북한은 중국의 대륙세력에 사실상 포함돼 있다. 그는 “이렇게 북한이 대륙의 일부가 되고, 우리가 인공적인 섬이 돼 반도가 사라진 것이 지금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위기의 본질”이라고 밝혔다.
“지금까지 한반도에 평화가 가능했던 건 중국이 ‘도광양회(韜光養晦)’를 표방하며 힘을 감춰왔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제 중국이 미국 앞에서 더는 숨죽이고 있지 않잖습니까. 팽창하는 양대 패권은 필연적으로 한반도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양자 가운데 하나를 택하면, 결과는 나머지 하나가 절멸할 때까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고통이죠. 한반도는 세계의 화약고가 되고 말 겁니다.”
이 이사장은 ‘이솝우화’의 박쥐 얘기를 꺼냈다. 어린 시절 우리는 그 동화를 통해 ‘여기서는 들짐승이라 하고, 저기서는 새라고 하는’ 기회주의자의 파멸을 보지 않았나. 어쩌면 지금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혹은 해양과 대륙 사이에서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여기는 건 뇌리 깊이 박힌 이 가르침의 영향 때문인지 모른다.
이 이사장의 생각은 다르다. 우리에게는 정의의 사도 ‘배트맨’이라는 돌파구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해양과 대륙이 맞부딪치는, 그래서 문명의 흐름이 소용돌이칠 수밖에 없는 곳에 자리한 우리의 지정학적 운명을 활용하면, 바로 그 덕분에, 우리가 세계 평화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고 했다.
“독일을 보세요. 한때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나라였지만 지금은 유럽연합(EU)의 중심국이 됐죠. 괴테 같은 문인, 지식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일 문화에 바탕을 두고 세계 문학을 완성한 괴테의 힘이 유럽 전체를 뭉치게 했어요. 한반도에서 대륙과 해양이 상생 공존할 수 있는 방법도 문화 안에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지정학으로 보면 동아시아는 중국과 일본의 패권장이 되지만 지리문화를 보면 한국의 존재감이 커지죠. 지금의 한류처럼요.”
국제정치에서 시작한 얘기는 이렇게 지정학이라는 징검다리를 밟고 문화로 성큼 건너왔다. 이 이사장이 좋아하는 단어로 말하자면 ‘시프트(shift)’다. 이 이사장은 한반도에서 대륙과 해양의 충돌이 본격화하기 전부터 문화를 통한 정치 문제 해법을 꾸준히 모색해왔다. 2013년 중국, 일본의 지식인들과 함께 ‘한·중·일 공용한자 808자’를 선정한 것도 그 노력의 하나다. 그는 3국에서 많이 사용하는 한자 808자를 골라 대중이 널리 익히면 세 나라 시민이 지적, 문화적 소통을 통해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게 될 것이라 믿는다고 했다.
“일부에서는 우리말을 두고 왜 한자를 배우라 하느냐고 해요. 그런데 한자는 결코 중국만의 글자가 아닙니다. 넓게 봐서 한중일은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죠. 미국·영국·독일이 알파벳 문화권에 속하는 것처럼요. 알파벳을 그리스에서 만들었다고 해서 알파벳 쓰는 미국이 그리스의 문화적 속국이 됩니까. 어떤 문자를 배우고 익히는지는 문화적 우월성과 별개 문제로 봐야 해요.”
이 이사장의 말이다. 좋다. 그렇게 소통하면 대륙과 해양세력의 패권 경쟁을 멈출 힘이 생긴다는 얘기인가. 이 이사장은 이 질문에 불쑥 노자 얘기를 꺼냈다.
“노자의 가르침 가운데 ‘상선약수(上善若水)’가 있죠. 물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겁니다.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약한 게 강한 걸 이깁니까’ 하고 물으니 노자가 입을 딱 벌렸어요. 이미 노쇠해 치아가 다 사라진 걸 보여준 겁니다. ‘자, 여기 그 단단하던 이가 어디 갔느냐?’ 이번엔 혀를 싹 내밉니다. ‘그런데 이 부드러운 혀는 어떻게 아직 여기 있느냐?’ 이 얘기를 하면 한중일 3국 사람은 누구나 무슨 말인지 딱 알아들어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강함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이것이 지문화학(geoculture)의 힘이죠. 각국 지식인과 대중이 이런 문화와 사상을 공유한다면 싸움이 벌어지겠어요?”
이 이사장은 자신이 이런 얘기를 하면 ‘뜬구름 잡는 얘기다’ ‘이상론이다’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그럼 그는 다시 묻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신이 말하는 ‘힘의 균형’은 말이 되느냐. 지금 북한이 미국에, 남한이 중국에 맞설 수 있나. 한반도에서 문화의 힘이 아닌 군사력으로 세력 균형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냐.”
가위바위보 상생론
그래서 이 이사장의 ‘지문화학’은 지극히 이상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 된다. 그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헌법 제정 시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5개 원주민 부족 연합체 ‘이로쿼이 연맹(Iroquois Confederacy)’의 헌법을 기초로 했다며 “이로쿼이 연맹에 속한 부족들은 평화헌법을 제정해 전쟁을 끝냈다. 현안이 발생하면 끝장토론을 통해 해법을 찾는 등 수준 높은 민주정치도 펼쳤다. 이들이 미국 건국 후에도 자치권을 인정받고, 여전히 자신들의 정체성을 간직한 채 살고 있는 건 균형과 상생을 통한 평화의 길을 찾아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반면 무력과 전투를 강조하던 원주민 부족은 상당수 명맥이 끊어졌다고 한다. “이래도 ‘힘없는 활’이 현실이고 ‘문화’가 이상인가”라는 게 이 이사장의 질문이다.이 이사장이 ‘가위바위보 문명론’을 제창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서구인은 승부를 가릴 때 흔히 동전을 던진다. 앞면 혹은 뒷면. 단 두 개의 선택지로 승패를 가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달라요. 한중일 3국 모두 가위바위보를 하죠. 도교에서 뱀은 두꺼비를 이기고, 두꺼비는 지네를 이기고, 지네는 뱀을 이기는 걸 상징화한 건데, 이렇게 서로 물고 물리는 순환의 장에서는 누구도 절대 강자로 군림할 수 없습니다. 서양인에게 이러한 관계는 놀라움의 대상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죠.”
이 이사장은 “3국의 무역수지를 봐도 한국은 중국에서, 중국은 일본에서, 그리고 일본은 한국에서 각각 흑자를 내고 있다”며 “대륙·해양의 이항대립 구조가 한반도에서 삼항순환 구조로 바뀌면 한국은 세계 평화의 수호자, ‘배트맨’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여든을 넘긴 뒤 대외 활동을 대부분 정리한 이 이사장이 오직 하나 전념하는 곳이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다. 문화의 힘으로 한중일이 균형과 상생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이 시대 지식인의 사명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나라 지식인 중 상당수는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고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큰 시각으로 현안을 조망하지 못한다”며 “지식인은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벗어나 자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창조적인 사람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문득 그의 책상 뒤에 걸린 글씨 ‘창(創)’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 서예가 가네다 세키조(金田石城)에게 선물 받았다는 이 글씨는 그 자체로 이 이사장의 삶과 사상을 상징하는 듯 보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 캐치프레이즈 ‘벽을 넘어서’를 만든 인물이 바로 이 이사장 아닌가. 당시 그는 ‘화합과 전진’이라는 딱딱한 슬로건을 창의적으로 재구성해, 분단국가 한국에서 세계 평화의 첫걸음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올림픽 개막식에 굴렁쇠 소년을 등장시킨 것도 이 이사장이었다. 개·폐회식 기획을 맡은 그는 화려한 행사들로 개막식을 가득 채우던 관행을 깨고 드넓게 펼쳐진 경기장 위에 평화로이 굴렁쇠를 굴리는 소년 한 명만 남겨뒀다. 그때까지 서구에 남아 있던 한국의 전쟁고아 이미지를 유쾌하게 전복하면서 동양적 ‘여백의 미’까지 세계에 알린 성공적인 퍼포먼스였다.
한국인 이야기
한국의 위기와 해법에 대해 얘기하는 과정에서도 인상적인 건 이 이사장이 여전히 눈부신 상상력과 창의력을 뿜어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국 사회의 계층 갈등과 청년 세대의 좌절 등에 대해 얘기하다 그가 문득 내놓은 아이디어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내가 서울시장이라면 큰돈 들이지 않고 많은 시민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며 빙긋 웃음을 지었다.“서울시에 가로수가 몇 그루나 있을까요. 약 10만 그루라고 칩시다. 나라면 그걸 시민들에게 무상으로 빌려주겠어요. 모든 가로수에 번호를 붙인 뒤 서울시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나눠주는 거죠. 그럼 10만 명의 시민이 이 도시에 자기 나무를 갖게 돼요. 이름을 붙이고, 물도 주고, 사진도 찍을 수 있죠. 인터넷 공간에서 서로 소통하며 ‘오늘 혜화동 몇 번 길 가로수 주인들 모입시다’ 이렇게 공동체를 만들 수도 있고요. 나무 이웃끼리야 어디 사는지,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 부자인지 가난한지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도시가 달라지는 거예요. 나무와 숲이 살고 도시가 살고 사람이 살아날 겁니다.”
인터뷰 가운데 가장 아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이 이사장이 말했다. 국제정치부터 나무 공동체까지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그의 관심사는 일관되게 평화와 행복이었다. 어린 시절 누이와 나물을 캐러 다니던 ‘채집시대’의 소년이 자라나 식민 시절과 전쟁, 독재를 거치며 오늘에 이르는 동안, 그는 늘 인간의 본성을 탐색했고 특히 한국인의 삶과 정신에 관심을 가졌다. 그동안 써온 글과 방송, 강연은 조만간 ‘한국인 이야기’ 10권으로 정리, 출간할 예정이다.
“최근 N포 세대라는 말이 유행하죠. 돌아보면 과거에도 절망과 고통의 시간은 있었어요. ‘내가 그 힘든 세월을 살았으니 너희도 참고 견디라’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말에 담긴, 그 희망과 가능성을 얘기하고 싶은 거죠. 그게 한국인의 정신이고, 문화입니다. 제 어린 시절부터 한국은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우리는 지금 이렇게 잘 살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