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는 지워지지 않는 악몽이다. 말하자면 인류의 원죄다. 타자에 대한 비이성의 증오가 어떤 비극을 낳았는지 홀로코스트는 증언하고 있다. 그럼에도 세상은 여전히 증오심을 이용하는 ‘영리한 자’들로 넘친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이 광기가 끝날 것인가. 과거의 비극은 여전히 현재의 불안으로 회귀하고 있다. 20세기 이후 예술이, 특히 영화가 홀로코스트 테마를 놓칠 수 없는 배경이다. ‘쉰들러 리스트’(1993), ‘인생은 아름다워’(1997), ‘피아니스트’(2002) 등 ‘홀로코스트 테마’의 명작들은 역사적 증언이자, 영화사적 보석으로서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네오리얼리즘의 거장 비토리오 데시카의 ‘핀치 콘티니의 정원’(1970)도 홀로코스트 영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이 중요 테마다. 그런데 표현하는 방식은 여느 영화들과 대단히 다르다. 무엇보다 강제수용소의 잔인한 장면이 한순간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홀로코스트의 비극에 대한 기억 때문에 가슴에 멍이 든다. 데시카가 이용하는 방식은 역설법이다. 비극 이전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꿈같았는지 묘사하는 식이다.
배경은 이탈리아 북부 르네상스 도시 페라라다. 흰색 테니스복을 입은 젊은이 10여 명이 무리지어 자전거를 타고 간다. 맑고 높은 여름 하늘과 길옆의 키 큰 푸른 나무들은 청춘의 반려자인 듯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이 ‘핀치 콘티니의 정원’이다. 핀치 콘티니 집안의 저택 안에 있는 넓은 정원으로, 가운데에 반듯한 테니스 코트가 하나 있다. 청년들이 여기서 함께 테니스를 치는 게 영화 도입부다. 그런데 이들이 정원에 온 이유는 페라라의 테니스 클럽에서 추방됐기 때문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영화는 전환점을 맞는다.
시대적 배경은 1938년으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본격적으로 반유대주의 정책을 실시할 때다. 즉 여기 모인 청년은 모두 유대인이며, 정원 소유주인 핀치 콘티니 집안도 유대인이다. 어처구니없는 비극이 눈앞에 다가왔지만, 당대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여전히 대학 논문 쓰기에 바쁘고, 무엇보다 청춘의 특권인 양 순수한 사랑에 몰두하고 있다. 그 사랑의 상징이 자전거와 테니스다. 흰색 옷의 순수함과 자전거가 은유하는 사랑이 강조돼 있다. 자전거를 탄다는 것은 사랑을 나눈다는 뜻일 테다. 주인공인 핀치 콘티니 집안의 딸(도미니크 샌다 분)과 그의 연인(리노 카폴리키오 분)이 함께 자전거를 타는 장면은 ‘청춘예찬’의 절정이다.
데시카는 이 모든 추억을 마치 꿈처럼 찍었다. 특히 플래시백으로 표현한 유년 시절의 기억은 엷은 안개를 통해 보듯 몽롱하게 묘사하고 있다. 영원히 잠자며 꿈속에 머물고 싶은 간절함이 녹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는 자전거를 탈 수 없다는 사실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아는 관객의 가슴에 멍을 남긴다. 독일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 미국 아카데미영화제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