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잉주 전 대만 총통(가운데)이 3월 28일 중국 장쑤성 난징에 있는 쑨원의 묘 ‘중산릉’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뉴시스]
쑨원은 1919년 국민당을 창당했다. 쑨원의 뒤를 이은 후계자는 대만 초대 총통인 국민당 장제스다. 장제스는 1948년 당시 수도 난징에서 중화민국 총통이 된다. 하지만 공산당과 내전에서 패한 그는 1949년 12월 난징에서 대만으로 천도(국부천대·國府遷臺)한 후 ‘중화민국’이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했다. 반면 중국 공산당은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면서 중화민국은 멸망했다고 선포했다. 국제사회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으로, 중화민국을 대만이라고 각각 부른다.
마잉주 전 총통의 ‘중화민국’ 표현 묵인
마잉주 전 대만 총통(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5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양안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대만 총통실]
그런데 이번 마 전 총통의 중국 방문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주목받는다. 첫째, 방문지들이 과거 국민당과 밀접하게 관련 있는 곳과 항일 유적지라는 점이다. 난징은 국민당 정부의 수도, 충칭은 임시 수도였다. 우한은 청조를 붕괴시킨 신해혁명의 시발점이 된 ‘우창 봉기’(1911)가 일어났던 곳이다. 또 마 전 총통은 국민당의 중화민국 정부가 1942년 후난성 헝양에 조성한 중일전쟁 순국자 묘소인 남악충렬사, 난징대학살기념관, 충칭 항전유적박물관 등도 방문했다. 이 때문에 마 전 총통의 중국 방문을 ‘항일전쟁 역사 여행’으로도 부른다.
둘째, 마 전 총통이 가는 곳마다 ‘중화민국’ ‘중화민족’ ‘평화’를 강조했다는 점이다. ‘중화민국’이라는 단어는 중국에서 금기시되고 있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앞세워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국은 마 전 총통이 ‘중화민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는 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마 전 총통은 4월 1일 후난성 샹탄(湘潭)시의 조부 묘소를 찾은 자리에서도 자신이 살아온 이력을 담은 제문에서 “민국 97년(2008)과 101년(2012)에 두 차례 중화민국 총통에 당선됐다”고 고하기도 했다. 1950년 홍콩에서 태어나 1952년 대만으로 이주한 마 전 총통의 본관은 후난성 샹탄이다. 마 씨 조상의 묘소에는 그의 할아버지 마리안도 잠들어 있다.
그렇다면 중국이 마 전 총통의 ‘중화민국’이라는 국호 언급을 용인한 이유는 무엇일까. 마 전 총통은 차이 총통과 달리 ‘92공식(九二共識)’을 인정해왔기 때문이다. 양안 민간기구인 중국 해협양안관계협회와 대만 해협교류기금회가 1992년 합의한 공통인식이라는 뜻의 ‘92공식’은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그 표현은 각자 편의대로 한다는 것이다. 차이 총통의 민진당은 ‘92공식’을 부정하지만 국민당은 이를 인정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중국은 마 전 총통이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는 만큼 ‘중화민국’을 언급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하나의 중국’ 인정하는 대만 국민당
마잉주 전 대만 총통(왼쪽)과 쑹타오 중국 공산당 대만판공실 주임이 3월 30일 중국 우한에서 만나 대화하고 있다. [뉴시스]
마 전 총통도 중국의 이런 전략에 어느 정도 호응했다. 마 전 총통이 항일전쟁 유적지들을 둘러보고, 중화민족과 평화를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실제로 마 전 총통은 3월 30일 우한에서 중국의 대만 정책 실무 책임자인 쑹타오 공산당 대만판공실 주임(장관급)을 만나 “양안 동포는 모두 중화민족이기에 서로 손잡고 협력해야 한다”며 “92공식의 정치적 기초 위에서 양안의 항구적인 평화와 번영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쑹 주임도 “대만 독립의 분열 활동과 외부 세력의 간섭에 결연히 반대하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기 위해 단결·분투해야 한다”고 화답했다.
현재 중국의 대만 정책은 왕후닝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주석이 총괄하고 있다. 공산당 권력 서열 4위인 왕 정협 주석은 시 주석은 물론 장쩌민, 후진타오 전 주석 등 3대에 걸쳐 중국 최고지도자의 통치 이론 등을 만든 책사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이라는 말을 들어온 왕 정협 주석은 시 주석의 지시에 따라 새로운 대만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그동안 대만에 대해 홍콩처럼 ‘일국양제’(一國兩制: 1국가 2체제) 전략을 시도해왔지만 국가보안법 제정과 민주세력 구금 등 홍콩에 대한 탄압으로 사실상 실패하면서 왕 정협 주석은 대만 국민을 설득해 중국과의 통일에 동의할 수 있는 방안을 고심해왔다.
전쟁에 공포 느끼지만 中과 통일은 반대
마잉주 전 대만 총통이 3월 27일 중국으로 출발하기 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특히 왕 정협 주석은 국민당과 협력을 최우선 순위에 놓고 있다. 그는 “국공 양당은 92공식을 한층 더 공고히 하고 대만 독립을 반대하는 공통의 정치적 토대에서 교류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말 그대로 ‘신(新)국공합작’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왕 정협 주석이 4월 5일 청명절을 맞아 마 전 총통 측에 조상의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는 이번 방문을 제시했다는 설까지 나오고 있다. 중국에는 “청명절엔 성묘를 하고, 단오엔 쫑즈를 빚고, 추석엔 월병을 먹고, 섣달그믐날 밤엔 만두를 빚는다”는 말이 있다. 1년 중 봄이 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조상의 묘를 찾는 것이다.
국민당은 지난해 11월 지방선거에서 21개 현·시 가운데 타이베이를 비롯한 13곳에서 압승을 거뒀다. 또 여세를 몰아 내년 1월 1일 총통과 입법원(의회) 선거에서 승리해 8년 만에 정권교체를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국민당은 중국과 경제협력은 물론, 평화협정까지 맺을 경우 전쟁에 공포를 느끼는 대만 국민의 표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전망한다. 마 전 총통과 국민당의 의도는 중국과의 협력을 지렛대 삼아 정권을 차지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정권교체 여부가 대만 국민의 민심에 달렸다는 점이다. 대만의 ‘21세기 기금회’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의 82%가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대만 국민은 중국과 대화를 통한 평화 유지를 희망한다. 반면 자신의 정체성을 중국인이 아닌 대만인이라고 생각하는 국민 대다수는 중국과 통일을 반대한다. 실제로 대만 국민의 85%가 대만 출신인 본성인(本省人: 1945년 일본 패전 전 대만에 건너온 한족과 그들의 후손)이고, 대륙(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외성인(1945년 일본 패전 이후부터 1949년 국부천대까지 건너온 이들)은 14%에 불과하다. 게다가 대만 국민은 미국과 일본을 매우 우호적으로 보고 있다. 중국 공산당과 대만 제1야당 국민당의 ‘신국공합작’ 추진이 과연 대만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