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차세대반도체연구소 소장. [지호영 기자]
김형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차세대반도체연구소 소장은 2월 7일 ‘주간동아’와 인터뷰에서 “K-반도체가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위주의 구조를 정부와 기업, 학계, 연구소가 협력하는 구조로 바꿔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한국 산업을 이끌어온 K-반도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지난해 4분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실적 발표 이후 커지고 있다. 지난해 4분기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은 경기침체 압박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수요가 급감해 매출액 20조700억 원, 영업이익 2700억 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액은 22.83%, 영업이익은 96.95% 감소한 수치다. SK하이닉스도 영업손실 1조7012억 원을 나타냈다. 반면 삼성전자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경쟁사인 대만 TSMC는 지난해 4분기 역대 최대 실적을 냈다. TSMC는 지난해 4분기 매출액 6255억 대만달러(약 26조2400억 원), 영업이익 3250억 대만달러(약 13조6300억 원)를 기록했다. 전통적으로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 경쟁력을 키워온 한국 반도체산업이 점점 코너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 사업 다각화 필요
김 소장은 “한국 반도체산업은 메모리 반도체에 편중된 구조인데, 메모리 반도체는 시스템 반도체에 비해 사이클 업 앤드 다운이 심하다”며 “경기가 안 좋을 때마다 한국 반도체 위기론이 계속 나오는데, 반도체 분야에서 포지셔닝을 다양화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주력 분야인 메모리 반도체는 D램과 낸드플래시 두 품종을 대량생산하는 구조라 경기가 안 좋을 때는 재고가 쌓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일각에서는 한국 반도체산업이 메모리 반도체에서 벗어나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 진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삼성전자가 전체 시장에서 33%를 차지하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1등이지만 시스템 반도체 분야가 엄청나게 커지고 있어서다. 이에 대해 김 소장은 “시스템 반도체는 품종이 많고 소량생산이라 한국처럼 작은 경제 규모에선 성장이 쉽지 않다”며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에 집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는 “반도체는 IP(지식저작권) 특허가 있어 한국이 시스템 반도체 GPU(그래픽처리장치) 강자인 엔디비아나 CPU(중앙처리장치) 강자인 인텔을 단기간에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모한 도전”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김 소장은 “경기침체 시마다 대두되는 K-반도체 위기론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팹리스(반도체 설계·개발), 장비, 파운드리 등을 다각화하는 중장기 플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 반도체는 중장기적 플랜이 없다는 말인가.
“한국은 중장기 플랜을 세우기 어려운 환경이다. 과거에는 좋은 기술만 있으면 반도체 시장점유율을 높일 수 있었지만 최근 들어 기술 패권, 자국 우선주의, 지정학적 위치, 정치 안보 등의 영향이 커졌다. 한국은 지금 경쟁국처럼 기술 로드맵을 세우는 것보다 이런 요인을 극복할 수 있는 역량 강화 로드맵이 더 필요하다. 과거 삼성전자가 3㎚(나노미터) 공정 기술을 개발하면 시장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지금은 경쟁국들의 견제로 기술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이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 차원의 로드맵이 필요해 보이는데.
“안타깝지만 한국 반도체 생태계는 정부 차원의 로드맵도 쉽지 않다. 미국 반도체산업은 팹리스, 제조, 메모리 반도체뿐 아니라 장비까지 거의 다 포진해 있어 이를 종합적으로 보면서 로드맵을 만들 수 있다. 즉 반도체 생태계의 A-B-C-D가 잘 갖춰져 있어 로드맵을 만들면 효과적이다. 반면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를 제외한 부분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효과적인 로드맵을 만들려면 다양한 반도체 사업이 공존하는 생태계부터 구축해야 한다.”
반도체 선순환 생태계 구축해야
한국은 왜 메모리 반도체를 제외한 다른 반도체 사업이 성장하지 못했나.“팹리스 중소기업에서 칩을 설계하면 파운드리에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애플이나 퀄컴 같은 대기업 제품만 만든다. 한국 팹리스 기업이 퀄컴처럼 성장하기 위해서는 한 단계 한 단계 밟아야 하는데, 국내에는 그런 환경이 조성돼 있지 않다. 15년 전쯤 정부가 팹리스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 팹리스 기업이 200개 정도까지 증가했지만 현재는 20~30개로 줄었다. 팹리스 기업이 성장할 수 없는 환경이다 보니 도산하거나 중국으로 넘어간 것이다.”
구체적으로 한국 반도체산업은 어떤 환경인가.
“반도체 생태계가 선순환하려면 정부와 산학이 협력해야 한다. 대학에서 기술을 연구하면 기업은 그 연구 성과를 활용해 상용화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반도체 강국은 이런 생태계가 구축된 반면, 한국은 산학 협력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또한 정부와 기업은 현안을 해결하는 단기적인 성과에 집중돼 있다. 단기 성과에만 매몰돼 있어 지금까지 한국은 미국이나 대만 등 경쟁국을 따라잡기 바빴다.”
한국 정부와 대만 정부의 반도체산업 지원 정책 또한 대조적이다. 최근 대만은 ‘반도체 관련 지원법’을 통과시켜 R&D(연구개발) 비용 세액공제를 확대하고, 관련 기업 법인세를 다른 기업의 절반 이하 수준으로 낮췄다. 반면 한국은 반도체 지원 법안이 국회에서 장기간 표류하고 있다.
“대만 정부는 반도체산업 성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중장기적 정책을 세우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정부는 대만의 반도체 지원 정책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또한 산학이 협력해 기술을 개발하는 생태계도 벤치마킹해야 한다. 반도체는 기술이 개발돼 제품을 완성할 때까지 수백 개 공정을 거친다. TSMC는 그 공정에 사용되는 장비들을 학교에 오픈하는데,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학교나 연구소에 이런 장비를 오픈하지 않는다. 이런 것부터 개선돼야 한국도 대만처럼 선순환 생태계가 구축될 수 있으리라 본다. 단, 대만의 로드맵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어 벤치마킹이 쉽지 않다.”
대만 시장조사 전문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세계 파운드리 시장점유율은 TSMC 56.1%, 삼성전자 15.5%로 나타났다. 40.6%p 차이다. 두 업체는 2021년 4분기 33.8%p에서 지난해 1분기 37.3%p, 2분기 37.0%p, 3분기 40.6%p로 점차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4분기는 삼성전자가 ‘어닝쇼크’를 기록해 격차가 더 벌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와 TSMC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주된 원인은 무엇인가.
“TSMC의 패키징 기술력을 꼽을 수 있다. 반도체업계는 지난 60년 동안 트랜지스터를 작게 만드는 ‘스케일 다운’에 집중했다. 그런데 현재 스케일 다운은 삼성전자에서 3㎚, TSMC에서 2㎚까지 공정이 가능해지면서 한계에 도달했다. 현재는 반도체 칩을 위로 쌓는 패키징으로 스케일 다운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TSMC는 이 패키징 기술을 10년 전부터 갈고닦았다. 반도체산업은 이처럼 미래 기술에 도전해 원천 기술을 확보해야지, 현안을 해결하는 것만으로는 눈에 띄는 성과를 낼 수 없다.”
최근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와 격차를 줄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지금 상황이라면 단기적으로 삼성전자가 TSMC와 격차를 줄이기는 어려워 보인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회사가 파운드리라는 분점을 운영하는 건데, 파운드리만 집중하는 TSMC를 따라잡기 어렵지 않겠나. 무엇보다 TSMC는 고객사가 다양하고 고객사에 맞춰 파운드리 기술도 커스터마이징돼 있다.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라는 모토에 맞게 고객 맞춤형으로 생태계를 구축한 것이다. 반면 삼성전자는 고객사가 애플과 퀄컴 위주다. 삼성전자도 TSMC처럼 고객사를 다양화하고 파운드리는 기술을 계속 개발해야 고객사에 어필할 수 있는데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다면 기술력만 있으면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기술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정부나 정치권에서 풀어야 되는데, 정부와 기업 간 협력이 잘 안 되는 상황이다. 기술적으로는 단기 성과에서 벗어나 미래에 투자해야 한다. 한국 정부의 반도체 연구 과제는 보통 3년짜리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한국 반도체 기업은 10년 후 비전이나 로드맵이 전무했다. 미국은 연구 과제가 보통 10년이 넘고, 기업들도 중장기 로드맵이 있다. 정부는 기업, 학계, 연구소와 협력해 국가적 중장기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
국가적 중장기 로드맵 절실
한국이 경쟁국과 비교해 반도체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다.“인력은 숫자만 많이 늘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과제를 주문대로 이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력, 즉 데이터를 해석하고 판단할 수 있는 석사급 학생들이 필요하다. 또한 대학에서 인재를 양성하면 기업이 그 인재를 받아 성장시켜야 하는데, 최근 SK하이닉스가 하청 기업들에서 경력사원을 뽑기 시작했다. 기업은 전문 인력 부족을 하소연하면서도 정작 그런 인력을 키우는 데는 큰 힘을 쏟지 않고 있다. 중소기업은 안 그래도 인력이 부족한데 대기업에서 이런 식으로 인력을 데려가면 굉장한 타격을 받는다.”
당분간 선순환 생태계 구축이 어렵고, 시스템 반도체 시장 진입도 힘들다면 기술력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차세대 반도체산업을 이끌 기술은 무엇인가.
“어떤 연구가 미래 기술이 될지 확답하기 어렵지만 양자 분야를 주목하고 있다. 미·중 반도체 패권 전쟁은 양자 분야에서 촉발한 것이다. 양자 분야를 먼저 개발하면 보안뿐 아니라 모든 게 다 뚫릴 수 있는데, 중국이 양자 분야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서다. 물론 한국은 양자 분야에서 한참 뒤처졌지만 첨단 반도체 제조 시설이 있지 않나. 어느 나라보다도 앞서 반도체 칩으로 양자컴퓨터를 구현할 수 있는 환경이다. 하지만 현재 미국, 중국과 달리 한국 기업들은 양자 분야에 거의 관심이 없다.”
KIST 차세대반도체연구소에서는 어떤 연구를 진행하고 있나.
“2015년 설립 이후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 일례로 현재 전력 소비를 줄이는 인공지능 칩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 인공지능 칩은 전기를 굉장히 많이 쓴다. 과거 알파고가 바둑 한 판을 두는 데 전기료가 7000만 원이 들었다. 앞으로 소비자가 더 발달한 인공지능 기능을 원하면 전기 사용량을 감당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전력 사용을 저감할 하드웨어를 선제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중국의 반도체 기술이 상당 수준으로 성장하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마저 일부 분야는 중국 업체들과 기술 격차가 줄어들고 있다.
“중국은 메모리 반도체를 제외하고 시스템 반도체, 팹리스 등에서는 한국의 반도체 기술력을 거의 따라잡았다. 특히 중국의 양자 기술 수준이 엄청 높아졌다. 만약 글로벌 반도체산업 재편으로 중국이 메모리 반도체를 100% 자국에서 생산한다면 한국 기업은 굉장히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국 중심으로 글로벌 반도체가 재편되는 것은 확실하다. 한국은 미국 편에 설 수밖에 없고, 메모리 시장에서도 분명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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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여진 기자입니다. 주식 및 암호화폐 시장, 국내외 주요 기업 이슈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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