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챌린저 2 전차. [뉴시스]
최근 바딤 오멜첸코 주프랑스 우크라이나 대사는 12개 나라로부터 서방제 전차 321대를 공여받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오멜첸코 대사가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현재 우크라이나에 전차 공여를 약속한 나라는 미국, 영국, 독일, 폴란드, 스페인,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캐나다, 핀란드, 포르투갈이다. 이들 나라는 각자 보유한 전차 상태를 점검하면서 공여 예정 물량을 조금씩 늘려 발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공급되는 서방제 전차 수가 당초 예상보다 늘어날 가능성도 크다.
美 M1A2 전차 31대는 내년 도착
미국 M1A2 전차. [GETTYIMAGES]
우크라이나에 가장 많이 공급될 예정인 전차 모델은 레오파르트 2A4다. 냉전 막바지인 1980년대 양산된 모델로 레오파르트 2 시리즈 중 생산량이 제일 많다. 첫 등장했을 당시 레오파르트 2A4는 화력·방어력·기동력 모두 세계 정상급으로 평가됐다. 독일이 통일 후 대규모 감군을 추진하면서 퇴출된 물량이 세계 각국에 싼값으로 대량 수출됐다. 레오파르트 2A4가 유럽에서 가장 흔한 전차가 된 배경이다.
한때 ‘유럽 표준 3세대 전차’로 평가받던 레오파르트 2A4. 데뷔 후 40년이 흐른 지금은 서방 세계가 우크라이나에 제공할 전차 가운데 가장 성능이 떨어진다. 이 전차의 주포는 라인메탈 Rh120 44구경장(口徑長: 총포 구경 단위로 나타낸 총포신 길이) 120㎜ 활강포다. 국산 K1A1에 탑재된 M256 120㎜ 활강포의 원형이다. 다만 레오파르트 2A4의 주포는 사격통제장치 개량이 거의 이뤄지지 않아 신형 포탄 사용이 불가능하다. 공격 능력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현재 레오파르트 2A4 전차를 운용하는 국가가 대부분 표준으로 채택한 DM33 철갑탄의 경우 2000m 거리에서 균질압연강판 560㎜를 관통할 수 있다. 같은 구경장을 지닌 K1A1 전차는 K276 철갑탄을 사용해 최대 700㎜ 관통력을 발휘한다.
레오파르트 2A4는 방어력도 상당히 떨어진다. 오늘날 전차 모델은 대부분 장갑 두께를 늘려 방어력을 극대화하고자 경사형 장갑을 채택하고 있다. 반면 레오파르트 2A4는 수직형 장갑을 채택한 탓에 중량 대비 방어력이 떨어지는 편이다. 이 전차의 포탑 전면은 철갑탄을 비롯한 운동에너지탄에 430㎜, 대전차고폭탄(HEAT) 같은 화학에너지탄에 860㎜의 방어력을 보인다. 러시아군이 보유한 거의 모든 대전차 무기 및 전차포로 레오파르트 2A4를 손쉽게 파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독일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차 공여를 계기로 레오파르트 2 시리즈의 뒤떨어지는 공격력과 방어력이 드러날 것을 우려한다. 독일연방군이 보유한 개량형 레오파르트 2A6가 공여 대상이 된 배경이다.
독일 레오파르트 개량형 아쉬운 방어력
독일 레오파르트 2A6 전차. [크라우스-마페이 베그만 제공]
독일은 레오파르트 2A6 포탑 전면 방어력이 운동에너지탄에 800㎜, 화학에너지탄에는 1100㎜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최근 새롭게 장착한 장갑재가 세라믹, 티타늄 등을 이용한 복합장갑이 아닌 고강도 압연강판이기에 실제 방어력은 640~700㎜로 평가된다. 이 정도 스펙이라면 2000m 거리에서 발사된 러시아군 전차포탄을 어느 정도 방어할 수 있다. 문제는 근접 교전이 벌어질 경우다. 러시아군 전차가 센서 성능이 뛰어난 레오파르트 2A6 전차에 접근하는 게 쉽진 않겠지만, 근거리에서 피격되면 생존을 보장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의 희망으로 떠오른 게 영국이 제공키로 한 챌린저 2 전차다. 현재 영국군이 보유한 챌린저 2 전차 227대는 이라크전쟁의 교훈을 반영해 이른바 TES 장갑 키트를 추가 부착한 모델이다. 챌린저 2 전차는 2006년 이라크 남부 아미라 마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70여 발의 대전차 무기 세례를 맞고도 생환했다. TES 키트는 쇄도하는 적탄에 대한 방어력을 강화하고자 도입된 추가 장갑 패키지다. TES 키트를 장착한 챌린저 2는 레오파르트 2A6보다 10t가량 무거운 74.5t의 육중한 덩치를 자랑한다. 그 덕에 포탑 전면 기준 운동에너지탄에 1380㎜, 화학에너지탄에 2388㎜라는 막강한 방어력을 지녔다. 현존하는 대전차 무기로는 파괴하기 어려운 ‘움직이는 강철 요새’라는 평가까지 있다.
극심한 전차 부족 시달리는 러시아
러시아 방위산업체 ‘우랄바곤자보드’의 전차 생산 공장. [뉴시스]
이번에 우크라이나에 공급되는 서방제 전차는 본래 운용국에선 퇴역했거나 퇴역 예정인 구형 모델이다. 레오파르트 2A6만 해도 등장한 지 20년이 넘었고, 챌린저 2 전차는 실전 배치된 지 30년이 다 돼가는 노후 모델이다. 이에 따라 일각에선 “러시아군 전차가 서방제 구형 전차를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no)’다. 우크라이나는 300대 이상의 서방제 전차와 500대 이상의 서방제 장갑차로 구성된 대규모 기갑군단을 꾸릴 예정이다. 3~5월이 되면 러시아군엔 전차라고 할 만한 전력이 사실상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극심한 전차 부족을 겪는 러시아는 생산 공장을 24시간 가동해 증산을 독려하고 있다. 문제는 러시아 사회의 고질인 비리와 부패 때문에 실제 전차 생산량이 거의 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 방위산업의 부정부패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심각하다. 국영 방산업체가 신형 전차 생산 명목으로 국방부로부터 받은 계약금을 빼돌려 생산이 무산될 정도다. 전국 각지 전차 생산·수리 공장이 24시간 체제로 가동되지만 출고되는 전차 수는 거의 늘어나지 않는 기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 러시아군의 전차 부족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부대별 전차 편제율을 보면 알 수 있다. 부대 이름에 ‘근위(近衛)’라는 수식어가 붙는 러시아군 정예부대의 전차 편제율은 1월 말 기준 30~50%다. 일반 부대는 10%를 밑돈다. 1개 전차여단에 전차 100대가 배치된 것이 정상 편제라면 러시아 근위 부대는 전차 30~50대, 일반 부대는 10대 미만을 보유한 셈이다.
러, 보병 대전차 로켓으로 기갑부대 막을 처지
이 때문에 현재 러시아는 극소수만 남은 T-90M 전차와 T-90A 계열 전차를 10대 안팎 중대급 규모로 묶어 운용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티거’ 전차를 운용하던 것과 같은 전술이다. T-90M과 T-90A는 신형 철갑탄을 사용할 경우 650㎜ 장갑을 뚫을 수 있는 화력을 지녔다. 제원상 800~1100㎜ 장갑 방어력을 갖춰 우크라이나군의 현용 T-64·72·80 계열 전차를 손쉽게 상대할 수 있다. 러시아의 T-80 계열 최신 버전과 T-90 계열 전차는 카탈로그 제원만 보면 서방 전차의 철갑탄을 모두 막아낼 수 있다. 다만 현실은 제원과는 다르다. 러시아가 자랑하는 ‘최강 전차’ T-90M이 최근 우크라이나 보병의 관통력 400㎜짜리 경량 대전차 로켓 1발에 전면 장갑이 뚫려 완파됐다고 한다. 실전에선 러시아군이 어떤 전차를 들이밀어도 우크라이나군의 서방제 전차에 대항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올봄 우크라이나군이 서방제 전차로 대규모 공세를 시작하면 러시아군은 구형 대전차 로켓을 든 보병으로 기갑부대를 막아야 할 처지다. 지난해 대규모 기갑전력을 동원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는 1년 후 자기네와 우크라이나 처지가 180도 바뀔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서방의 전차 공여를 계기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판도가 어떻게 바뀔지 주목된다.